'야담, 괴담, 신파'라는 문턱에서 바라보는 근대
1. 윤백남이라는 이름
작자 윤백남 씨는 두말할 것 없이 우리 대중소설계에 첫손가락을 꼽는 거장으로 그 멋떨어지고 풍부한 말씨와 유창하고도 아름다운 글, 그 빈틈없은 구상과 아슬아슬한 묘사는 독자의 마음을 처음으로부터 끝까지 움켜 쥐고 놓지 않아, 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독서게를 태풍과 같이 뒤흔드는 것은 여러 말할 필요조차 없읍니다.
-<삼국시대재현 신소설 봉화 윤백남 작 이청전 화 입오일부터연재>, <동아일보>, 1933.8.22
<동아일보> 기사문에 따르면 윤백남은 1933년 조선 독자들을 '태풍과 같이 뒤흔드는 작가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이 이름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겨버린 이름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몸담은 출판사에서 딱지 시리즈'라는 기획, 그러니까 100년 전 딱지본 소설 중 지금 독자들에게도 흥미롭게 읽힐 작품들을 찾아 현대어로 다시 내는 작업을 맡지 않았더라면, 아마 내가 이 이름을 눈여겨볼 일은 없었으리라. 시리즈를 이어 가기 위해 여러 딱지본 소설을 검토하던 중에 '눈물의 전당포』라는 작품집을 찾게 됐고, 제목을 보고 신파겠거니 지레짐작을 하며 작품을 읽어나가던 중 의외의 요소들에 흥미를 느껴 작가 이름을 다시 보게 됐다. 책 제일 앞머리에 '윤백남 야담'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대성서림에서 1933년에 발행된 <눈물의 전당포>는 꽤나 인기가 좋았는지 이듬해 말 다시 인쇄를 해 1935년 1월에 재판이 나온다. 이 글에서 참고한 것도 재판본인데 그 속에는 <눈물의 전당포>를 비롯해서 <보석반지>, <금봉채>, <관상> 등 총 4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중 <눈물의 전당포>와 <보석반지>는 괴담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금봉채>는 "김치 깍두기로 젖은 입에 기름진 청요리도 이따금은 미상불 해롭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고, <관상>은 조선시대 배경의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책의 부제로 윤백남 야담(野談 )십이야화(十二夜話)가 적혀 있는데,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그의 책들에서는 이런 식의 부제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1936년 신명서림에서 나온 <승방미인>에는 '윤백남 야담집'이라는 부제가, 1938년 보성서관에서 발행된 <원수가 은인>이라는 책에도 ‘윤백남야담 십야화’라는 부제가 쓰여 있다. 1930년대에 “누구나 다 아는 야담 대가”1)로 활약했던 윤백남의 명성을 상업적 출판 시장에서는 판매 전략의 하나로 내세웠을 것이다.
윤백남의 활동은 야담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1888년에 태어난 그는 경성학당 중학부에 다니다가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반조우중학교에 편입한다. 와세다 예과를 거쳐 정치과에 진학하나 당시 정치과 지망자에게는 관비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던 조선 통감의 조치로 인해 정치가의 꿈을 접고 도쿄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한다. 1910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윤백남은 잠시 한성수형조합(이후 조선식산은행)에서 일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 및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다. 이 시기 연극 활동을 하며 배우로 서기도 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학교를 그만둔다.
1910~20년대 윤백남의 이력을 살펴보면 언론·교육·예술 등 다방면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매일신보>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반도문예사를 설립했으며, 극단 예성좌(藝星座) 및 백남프로덕션을 창설하는 등 연극·영화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3년에 발표된 한국 최초 무성 극영화 <월하의 맹서>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바로 윤백남이다. 이 시기에 그는 다양한 희곡 및 소설을 집필했다. 또한 1926년부터 1928년까지는 김해 합성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윤백남이 야담가이자 대중 소설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김해를 떠나 경성으로 돌아온 1920년대 후반부터이다. 1928년 12월 조선야담사 창립 1주년 기념 야담대회에서 야담가로서 첫발을 뗀 윤백남은 1929년부터 경성방송국(JODK)의 조선어 방송을 맡아 야사나 야담을 방송했는데 이것이 청취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야담가로서 유명해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 <대도전> 등 그가 쓴 역사 소설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윤백남은 홍명희와 함께 당시 “朝鮮서 고료의 최고”2)를 받던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이르면 '윤백남=야담대가'라는 공식이 성립되며, 이는 1934년 <월간 야담>이라는 야담 전문 잡지의 발간으로까지 이어진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윤백남은 만주와 간도를 오가다가, 해방 후 귀국해 서라벌예술대학 초대 학장을 지내고 1954년 심장병으로 타계했다.3)
윤백남은 1930년대 '야담 대가'로 널리 알려진 대중소설 작가이자, 언론, 교육, 연극, 영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근대 문화 전반의 거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윤백남은 야담, 괴담, 신파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활동했으며, 이를 통해 당시 대중문화의 저변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윤백남은 193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으나 현대에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므로, 그의 업적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