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포르마시옹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의 "딕테(Dictee)": '부서진 혀'로 말하다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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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1982년 출판된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는 1970년대 이후 아시아계 미국 여성문학 중 정치적 전복성과 전위적 독창성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배적 언어의 정치성을 비판하면서 주변인으로서의 이주민 여성 자의식을 기록하며, 기존 장르 관행을 벗어나는 새로운 발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의 <딕테(Dictee)>는 이른바 소수민족문학이 본격적으로 쏟아져나오던 1982년에 처음 출판됐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미국 주류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전면적 저항을 전개하고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의 기치 아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적 문화를 비판한 데 이어,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들이 주도해 온 민권운동과 백인 여성들이 주도해 온 페미니즘의 한계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 1970년대다. 이에 힘입어, 미국 사회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던 여러 소수 인종, 소수 민족은 각자의 '정체성'을 존재론적으로 발전시키고 정치적 실천의 바탕으로 삼았다. 흑인 문학의 재평가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한국계 중국계, 일본계, 인도계 등을 포괄하는 ‘아시아계’ 미국 문학이 널리 주목받게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이 과정에서 인종 문제 비판 의식으로 페미니즘의 지평을 넓힌 비백인 여성 예술가와비평가, 이론가 역시 다수 등장했다.

<딕테>는 1970년대 이후 발표된 아시아계 미국 여성작가들의 작품 가운데서도 정치적 전복성, 전위적 독창성 등 여러 면에서 독보적인 작품이다. 1980년대까지 아시아계 미국문학 작품들이 이주민들의 부적응과 차별의 경험, 세대 갈등, 극복과 화해, 전통과 계보의 인정, 자기 긍정의 가능성 등의 주제를 허구화된 자전적 서사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딕테』는 역사와 현실을 기술하는 언어 그 자체의 정치성과 재현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미국'이라는 (백인중심적, 남성중심적, 영어중심적) 이념과 여러 겹으로 불일치를 겪는 이주민 여성의 자의식을 기록한다. 다시 말해서 <딕테>는 발화의 절실한 필요성을 부각하되 주변인으로서 자신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지배적 언어의 정치적 함의들을 해부하고 비판하면서 기존의 관행을 벗어나는 다른 발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언어 및 시각예술 작품이다. 테레사 학경 차는 익숙한 장르 형식으로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1)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 테레사 학경 차는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국어, 영어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그에게 언어는 늘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버클리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예술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는 영화, 설치미술, 행위예술 등으로 관심 분야를 확장했으며, 포스트모던한 실험을 시도하던 당대 여러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딕테>로 가장 유명하지만, 그의 전위적 창작 의지는 그가 남긴 다른 여러 저술 및 비디오 예술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어 '딕테dictée'는 구술 받아쓰기를 뜻한다. 언어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종종 등장하는 받아쓰기는 맥락이나 의미와 상관없이 발화된 낱말과 문장을 글로 옮기는 훈련으로, 일방적 발화, 강요된 형식, 모방적 재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딕테>의 도입부에 제시되는 프랑스어 받아쓰기 문단은, 상호성의 여지가 없는 이 일방적 언어 행위의 역학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전제하는 결과를 뒤틀어버린다. 형식적 정확성을 강조하는 받아쓰기의 명령에 충실하게 "문장 시작"이라는 지시어부터 “쉼표” “따옴표" "마침표"라고 문장부호까지 그대로 기록할 때,(1쪽)2) 받아쓰기는 더 이상 소박한 순종이 아니라 지배적 규범적 언어 요구를 형식적으로 모방하는 행위의 공허함을 전시하면서 언어를 파열하는 저항적 글쓰기가 된다. 명령을 초과하는 순응은 때로 명령의 부조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주인의 연장으로는 주인의 집을 허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3) 그러나 주인의 명령과 어긋나는 방식으로 주인의 연장을 사용할 때, 그 연장은 주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차는 이처럼 받아쓰기를 문화적, 언어적 권력관계의 모델로 제시하는 동시에 그 모델이 강제하는 동화(同化)의 저항과 거부를 수행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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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출간 연도
소수민족문학이 본격 등장한 시기
1970년대 정체성 정치 개념 출현 이후 소수민족 문학이 꽃피운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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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주 나이
1951년 부산 출생, 미국 이주
어린 나이에 이주하여 다중 언어 환경에서 성장한 배경이 작품에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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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이름으로 구성된 장
희랍 신화 아홉 뮤즈의 이름
역사, 서사시, 천문, 비극 등 다양한 장르로 여성적 발화 가능성을 탐구

문제가 되는 것은 받아쓰기뿐이 아니다. 받아쓰기가 구어와 문어의 기계적 동일성을 전제한다면,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 행위는 두 언어의 등가적 의미 작용을 전제한다. 그러나 번역은 정말 가능한가? 받아쓰기한 프랑스어 문단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문단이 같은 페이지 하단에 제시되는데, 프랑스어에서 “어떤 여자”를 의미하는 quelqu'une은 아래 영어번역문에서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someone으로 바뀐다.(1쪽) 프랑스어에서 여성으로 명시됐던 대상이 영어에서 중성적 혹은 무성적 대상으로 변환될 때, 젠더는 번역되지 못하고 삭제된다. 곧이어 등장하는 "말하는 여자"를 프랑스어 여성형 명사 diseuse로 지칭하는 것은, 여성을 발화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동시에, 쉽게 번역될 수 없으나 삭제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여성성을 가시화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또, 특정한 영어 단어들을 시각적으로 환기하는 프랑스어 diseuse를 굳이 사용함으로써 차는 그 “말하는 여자”가 언어의 전통적 ‘소용(use)’과는 부정(dis)의 관계에 놓인 존재임을, 즉 그의 언어가 관습적 의미작용에서 빗겨나 있음을 암시한다.

가부장제, 제국주의, 식민주의 역사에서 언어는 지배의 도구였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낯선 언어, 지배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존재를 번역해내는 일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배언어를 ‘받아쓰기’하되 그 언어에 함몰, 포섭되지 않는 발화는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지배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타자성, 잉여는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 특히 젠더를 삭제하지 않는 발화,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딕테>는 이 난제들을 제기하고 또 그에 답하는 실험적 시도로서, 특히 여성의 발화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고대 희랍의 여성시인 사포(Sappho)를 호명하면서 시작하는 <딕테>는 희랍 신화 속 뮤즈의 이름을 딴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 서사시, 천문(天文), 비극, 연애시, 서정시, 희극, 무도(舞蹈), 찬가를 상징하는 아홉 명 뮤즈만큼 다양한 장르들이 여성적 발화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서구 문학 전통의 여성적 존재와 목소리를 소환하는 이 형식과 더불어 <딕테>를 직조하는 또 다른 요소는 작가 어머니의 기억으로 매개되는 이산(離散)과 박탈, 상실의 경험이다. 일제강점기를 만주에서 보내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참혹한 전쟁을 겪은 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4·19혁명을 목격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어머니의 이야기와 더불어 텍스트는 유관순, 바리데기, 잔다르크,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 등 여러 여성의 이야기를 반복, 교차한다. 이렇게 차학경의 문화적, 역사적 경계 넘기는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종횡으로 아우르는 여성 서사를 만들어낸다.

3·1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기록을 나열하면서 화자는 "적, 잔학 행위, 정복, 배신, 침략, 파괴" 같은 단어들이 그런 억압을 경험, 목격한 적 없는 나라의 사람들에겐 알 수 없는 것,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의미란 수단이며, 피부를 찌르고 살을 쑤시는 기억, 피로 만든 책,4) 물리적 실체인 피를 잣대로, 기록으로, 문서로 남는 것이다.(32쪽) 우리에게 익숙한 유관순의 사진은 실제로 “말하는 여성,” 일차원적 모방에 불과하는 받아쓰기를 거부한 여성(들)이 있었음을, 그들이 이름 없이 스러져갔음을 상기시킨다. "과거로부터 "왜 지금 그것을 다 부활시키는가” 화자는 “지금 그것을 호명해 망각 속에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답한다.(33쪽) 1장에 부쳐진 이름 클리오, 그는 역사의 여신이다. 기억은 이야기되지 않은 역사를 기어이 이야기해야 하기에 중요하다. 조각난 서사들, 사료, 편지, 사진, 시구, 문구 등 다양한 요소들의 콜라주인 <딕테>는 그 자체로 역사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기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1982년 출판된 『딕테』는 당시 아시아계 미국 여성문학 중 가장 정치적 전복성과 전위적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지배 언어의 정치성을 비판하며 새로운 발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1970년대 이후 등장한 비백인 여성 예술가와 비평가, 이론가들이 인종 문제 비판 의식으로 페미니즘의 지평을 넓혔으며, 이 맥락에서 『딕테』가 주목받게 됐다.

『딕테』는 받아쓰기와 번역 행위를 통해 지배적 언어의 정치성을 비판하고, 주변인으로서 자신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며 새로운 발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언어와 권력의 관계 탐구

『딕테』는 받아쓰기와 번역을 통해 지배 언어의 정치성을 비판하며, 주변인이 지배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는 새로운 발화 방식을 모색한다.

2
젠더와 번역의 문제

프랑스어에서 영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여성성이 삭제되는 현상을 통해, 번역 불가능한 젠더적 특성을 가시화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3
역사적 기억의 복원

유관순, 3·1운동 등 한국사와 서구 신화를 교차시켜 이야기되지 않은 여성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테레사 학경 차아시아계 미국 여성 작가들흑인 페미니스트들
이 기사가 던지는 질문
지배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타자성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
젠더를 삭제하지 않는 번역과 발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기사는 공공 데이터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