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는 ‘제1차 장기 배전계획’을 확정하며 한국의 전력 공급 체계를 중앙집중형에서 지역 분산형으로 본격 전환했다. 한국전력은 2024년부터 2028년까지 10.2조 원을 투자해 배전망을 재설계하고 전국 단위 분산형 전력 인프라를 구축한다. AI 기반 지능형 배전 시스템 도입, 민간 협업 확대, 지역 유연성 서비스 시범 운용 등 구조적 개편은 에너지 산업의 지형을 크게 바꿀 전망이다.
이번 계획은 지난해 6월 시행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을 이행하는 첫 조치다. 정부는 분산형 전력 시스템을 ‘보완재’가 아닌 전력 수급의 핵심 축으로 정의한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공급량이 늘 때마다 계통이 불안정해진 이유는 중앙집중형 구조에 맞춘 배전망이 작은 발전 설비를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규모 전원이 수요지 인근에 몰려도 네트워크가 받쳐 주지 못하자 계통 혼잡과 출력 제한이 반복됐다.
한전 자료는 전환 필요성을 분명히 제시한다. 분산형 전원은 2024년 말 25.5 GW에서 2028년 말 36.6 GW로 44 % 증가할 전망이다. 이 같은 속도는 배전망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다. 한전은 분산형 에너지의 적기 연계를 지원하려고 배전망에 2조 원, 전기사용자망에 8.2조 원을 각각 투입한다. 10.2조 원 전액을 ‘지역 중심 전력 생태계’ 구축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번 계획은 기술 인프라보다 제도와 운영체계 전환에 무게를 둔다. 정부와 한전은 AI 기반 ‘분산e 지능형 인프라’를 확대하면서 민간 주도의 DSO(배전망운영자) 개념을 설계에 반영한다. 이 조치는 중앙정부·한전 중심 공급체계를 지역 거버넌스로 바꾸려 하기 때문에 지자체와 지역 전력사업자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커진다.
정부와 한전은 2025년 말 제주에서 ‘지역 유연성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며 민간 ESS를 활용해 지역 전력 수급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높인다. 이 모델은 유럽·일본 등 선진국이 도입한 분산 자원 기반 지역 전력시장과 궤를 같이한다. 제도가 전국으로 확산하면 소비자는 전력을 단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급자이자 수급 조절자로 참여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제1차 장기 배전계획’이 재생에너지 수용 능력을 가늠할 척도가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한 에너지정책 전문가는 “그간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은 발전 허가와 보조금 중심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그 전력을 받아줄 수 있는 계통 역량이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며 “배전망이 병목을 일으키면 발전은 허가만 받고 멈출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한전은 이번 계획과 동시에 기술 개발 로드맵도 마련한다. 올해 하반기 ‘2035 분산 전력망 기술 로드맵’을 공개하고 민간 협의체 ‘DSO Alliance’를 출범해 기술·정책의 공동 개발과 실증을 확대할 방침이다. 한전은 이 모델을 제도 설계와 기술 표준화를 함께 추진하는 민관 거버넌스라고 설명한다.
결국 ‘제1차 장기 배전계획’은 단순 인프라 투자안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기에 한국 전력정책이 새 틀을 선언하는 문서다. 정부와 산업계는 탄소중립·재생에너지 확대·수요 다변화라는 거시 과제를 풀기 위해 전력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에 집중해야 한다. 계획 실행력과 지역·민간의 실질 참여가 가늠자가 되며, 분산형 전력시장 성공 여부는 기술보다 신뢰 기반 운영 시스템에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