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포르마시옹

피폭 80년, 법은 아직 ‘1세대’에서 멈춰 있다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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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형률 반핵 평화 인권 운동가 /한국 원폭2세 환우회
고 김형률 반핵 평화 인권 운동가 /한국 원폭2세 환우회

2016년 제정돼 2017년 시행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피해자’ 본인을 등록해 정기검진과 의료지원금을 주는 구조다. 하지만 이 법의 적용 대상은 원폭을 직접 겪은 1세대로 한정된다. 2·3세 후손은 법률상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 같은 제도권 지원에서 배제돼 있다. 국회·정부 내에서도 후손을 포함시키자는 문제의식이 누적돼 왔지만, 제도는 여전히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법이 보장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국가는 ‘등록된 피해자’에게 연 1회 정기검진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정밀검사를 무료로 실시하고, 수술비·진찰·검사·입원·약제·진료보조비 등 실질 의료비를 ‘의료지원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 세부 절차는 시행령이 정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항의 전제는 ‘등록된 피해자’ 즉 1세대라는 점이다. 후손에게는 같은 권리 조항이 열려 있지 않다. 

한국인 원폭피해의 스케일은 작지 않았다. 학계·언론은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해자의 10\~20%가 조선인이었다고 추정한다. 한국으로 귀환한 생존자들은 주로 경남 합천을 비롯한 영남권에 뿌리내렸고, 2018년 조사에선 국내 등록 생존자가 2,283명, 그중 약 70%가 경상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4년 보도에 따르면 국내 등록 생존자는 1,600여 명 수준으로 줄었지만, 2·3세 후손은 수천 명 규모로 추정된다. 세대는 바뀌었지만 ‘후손은 제도 밖’이라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건강지표는 더 냉정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연구는 전국 원폭 2세 748명을 조사해, 자가보고 질환·정신건강·활동제한·와병 경험 등 여러 지표에서 일반 인구 대비 건강 수준이 유의하게 낮다고 밝혔다. 미충족 의료 경험은 2배 이상 높았고, 생활습관 요인(흡연·음주)은 오히려 낮아 ‘행태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0년대 초부터 축적한 기초조사도 2세에서 빈혈·우울증·심혈관계 질환 등 이환율이 높다는 결과를 반복해 보여줬다. 인과관계의 강도와 메커니즘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지만, ‘위험 신호’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현장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른다. 합천의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은 1세대 중심 장기요양 시설로 운영돼 왔지만, 정작 고령이 된 2세는 입소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같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한편 민간이 운영하는 ‘합천평화의집’은 국가 제도가 비워 둔 2세의 돌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출범했다. 공공이 해야 할 최소한의 안전망을 시민사회가 떠받치는 풍경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보여준다.

비교의 눈을 일본으로 돌려보면, 일본 정부 역시 법률상 의료지원은 ‘피폭자(1세)’에게 한정한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2024년에 재확인되었다. 다만 중앙정부 위탁으로 지자체가 ‘피폭 2세 건강검진’을 실시해 정기 건강상태 점검을 돕고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2세를 ‘법적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닮았고, 최소한의 건강검진이라도 제도화한 점에선 차이가 난다. 이 대목은 한국 정책의 최저선 설정에 시사점을 던진다.

정치·행정의 시계는 더디게 움직였다. 2019년 정부는 대규모 실태조사를 통해 1세와 2세의 신체·정신적 불건강, 의료비 부담, 사회적 차별을 공식 기록으로 남겼고, 2024년에는 시행령 일부 개정이 입법예고됐다. 2024년 9월 여야 3당은 2세·후손을 지원 대상으로 확장하는 특별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으며, 2025년에도 시민사회는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발의’와 ‘통과’ 사이엔 여전히 거리감이 있다. 당사자의 생애주기가 제도적 검토 속도를 앞지르는 상황이 반복되는 한, 제도는 곧바로 ‘사후 처리’로 뒤쫓을 뿐이다. 

핵심 쟁점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2·3세의 건강위험을 어느 수준에서 ‘공적 위험’으로 인정할 것인가. 완벽한 의학적 인과 규명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제도는 영원히 늦을 수 있다. 장기간 노출 위험군에 대한 ‘예방 원칙’과 ‘한시·한정형 지원’ 같은 정책 공학이 필요한 이유다. 둘째, 최소한의 안전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일본식 2세 건강검진의 전국적 제도화, 2·3세 대상 국가 실태조사·등록제, 의료비 본인부담 경감과 희귀·만성질환 맞춤형 지원, 지역 복지시설(합천 등) 이용 자격의 단계적 확대는 지금 당장 시행 가능한 현실적 옵션들이다. 셋째, 기록과 기억의 문제다. 피해가 세대 간에 ‘느리게’ 재현되는 특성상, 증거와 목격담을 공적으로 누적할 시스템이 없으면 정책은 매번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숙제를 되풀이한다. 

제도 설계의 난점이 없는 건 아니다. 후손 피해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의할지, 구체 질환 목록을 어떻게 작성할지, 재정 소요를 어떤 기준으로 산정할지에 따라 찬반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선택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기검진과 등록제, 최소 의료비 지원, 돌봄 인프라 접근성 개선 같은 안전망은 ‘증명되지 않은 주장’에 예산을 쓰는 모험이 아니라, ‘증명될 때까지 방치하지 않는’ 책임의 기술이다. 2016년 법 제정으로 시작된 공적 책임을, 2025년의 현실에 맞게 업데이트하자는 요구는 과도하지 않다. 

올해는 피폭 80년이다. 그 사이 많은 1세대가 세상을 떠났고, 뒤늦게 노인이 된 2세가 다시 병원 대기실에 줄을 선다. 법과 제도의 목적이 ‘피해의 종결’을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면, 남아 있는 구멍을 메우는 일은 곧 사회의 품위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특별법은 처음부터 완결본이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후손에게도 닿는’ 개정의 펜촉이다.


이 기사는 공공 데이터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