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의 역설: 누가 소외되고 왜 말 못하나
서울 영등포구의 한 버스정류장, 73살 이모 씨는 저녁 버스에 올라 동전지갑을 꺼냈다가 당황했습니다. 버스에 현금 통이 없었던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이 버스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고 알리자, 이 씨는 “그런 건 할 줄 모른다. 현금 받는 버스를 타고 가겠다”며 서둘러 내렸습니다. 강원도에서 딸을 만나러 온 그는 계좌이체 방식으로 요금을 내라는 설명에 끝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서울시가 최근 ‘현금 없는 버스’ 노선을 대폭 늘리면서, 카드 사용에 익숙지 않은 고령층이 돈이 있어도 버스를 못 타는 일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신용카드나 모바일 결제가 일상화되면서 현금 결제가 예외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현금이 여전히 필수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주민, 노숙인, 신용불량자, 고령층 등 금융 접근성이 낮은 계층은 ‘현금 없는 사회’의 편리함 이면에서 소리 없이 불편을 떠안고 있습니다. 편의를 앞세운 디지털 전환의 그늘에서 누가 손해를 보고 있으며, 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짚어봅니다.
편리함 뒤에 가려진 사람들
“소수를 배제해 버리면 소비자들은 그냥 따라야 하나요?” 현금 결제를 거부당한 신모 씨는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잔돈까지 정확히 맞춰 내겠다고 했지만 매장 측은 “현금 없는 매장이라 현금 결제가 불가하다”는 답만 내놨습니다. 신 씨는 “현금만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는데, 대책도 없이 현금 결제를 막아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대표적인 피해자는 고령층입니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70대 이상 노인의 최근 한 달 내 현금 사용률은 98.8%에 달하지만, 모바일 결제 이용률은 1.3%에 불과합니다. 절반 가까운 노인이 신용카드를 아예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카드를 깜빡 잊고 나오거나 스마트폰 사용이 서툰 노인들은 대중교통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실제로 서울시 ‘현금 없는 버스’에서 “휴대폰으로 송금하라”는 안내를 들은 한 노인은 “그런 건 할 줄 모른다”며 버스에서 결국 하차했고, 다른 60대 승객도 현금 밖에 없어 버스에서 내려 15분을 더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디지털 격차 앞에서 노인들의 이동권이 제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주민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어 장벽과 낯선 금융 환경 탓에 디지털 결제망에서 소외되기 쉽습니다. 수도권에 사는 한 중국인 이주 노동자는 “버스에서 현금을 내려다 안 된다고 해서, 다시 집에 가 카드를 가지고 오느라 출근에 늦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이런 불편을 어디 하소연하기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특히 미등록 체류자 등 일부 이주민은 은행 계좌 개설이나 카드 발급이 어려워 현금에 의존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정책에 불만조차 표출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현금 없는 버스나 현금 없는 가게가 우후죽순 늘어날수록 금융망 밖의 이주민들은 일상 전체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길거리 노숙인들에게 현금은 생계의 마지막 수단입니다. “지갑에 현금이 없어서…”라는 행인의 한마디에 오늘 한 끼를 굶어야 하는지 결정되곤 합니다. 그런데 지폐와 동전 대신 카드와 간편결제만 들고 다니는 세상에서, 노숙인이 받던 동전 몇 닢의 온정마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영국에선 급기야 노숙인이나 거리 공연자가 카드 단말기를 내미는 풍경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만큼 현금 사용 감소의 직격탄을 받는 계층입니다. 전문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를 가속화할수록 노숙자들이 극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신용불량자 또한 보이지 않는 디지털 차별을 겪습니다. 금융채무 불이행으로 은행 거래가 제한되면 신용카드 발급이 불가능합니다. 간신히 체크카드나 선불카드만 사용할 수 있지만, 사회가 현금 대신 신용결제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마저도 소용없어집니다. 실제로 정부는 신용불량 실업자의 경우에만 특별계좌를 개설해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제도를 두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어려운 계층임을 방증합니다. 한 신용불량인은 “가게 문에 ‘현금 안 받습니다’라는 안내문만 봐도 불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일수록 현금을 쓰고 싶어도 눈치가 보이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작 사회의 대다수는 이러한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 굳이 현금을 쓰냐”는 반문이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스마트폰 앱 결제와 키오스크 주문에 익숙한 이들에게 현금 없는 사회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만 여겨집니다. 하지만 내가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걸까요? 더 편리해진 세상의 뒤편에서 불편을 홀로 감내하는 소수자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편의를 위해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추진된 변화의 이면에, 그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한국, ‘현금 배제’ 현실화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비(非)현금 결제 사회로 평가됩니다. 전체 소비 중 카드나 모바일 등 캐시리스 결제 비중이 99%에 육박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지하철 개찰구부터 편의점, 식당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카드를 찍고 QR 코드를 대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소비 트렌드가 자리 잡으면서 현금 대신 간편결제를 쓰는 문화가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소매점주 입장에서도 카드·모바일 결제가 매출 관리와 위생 측면에서 편리하고, 대기시간 단축 등의 이점이 있다 보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편리함의 이면에는 불편과 논란이 쌓이고 있습니다. 교통 분야가 단적인 예입니다. 서울시는 2021년 10월 일부 노선에 시범 도입했던 ‘현금 없는 버스’를 2022년에 18개 노선(버스 418대)까지 확대 시행했습니다. 이후 인천, 대구, 광주, 제주 등 여러 지자체들도 잇따라 현금 승차 차단에 나섰습니다. “어차피 현금 승객이 거의 없다”는 판단이 배경이었습니다. 실제로 서울 시내버스의 현금 승객 비율은 2010년 5%에서 2020년 0.8%까지 떨어졌고, 2021년엔 0.7%로 내려앉았습니다. 버스 수입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도 채 안 되는데, 현금함 유지·관리비용은 연간 20억 원이나 들어 비용 대비 효용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 것입니다. 서울시는 현금 요금함 철거로 운전기사의 잔돈 관리 업무가 줄고 안전 운행 환경이 좋아지는 효율성을 내세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효율이 일부 시민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다는 점입니다. 버스에서 현금통이 사라지면서 카드 사용이 서투른 노인들이 발길을 돌리는 일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앞서 영등포구 버스정류장의 이 씨처럼, 현금을 내려고 했다가 방법이 없어 하차하는 승객이 종종 생겨난 것입니다. 서울시는 “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 번호 옆 LED 표시로 현금 없는 버스임을 안내하고, 정류소마다 QR 코드를 부착해 모바일 교통카드 사용을 유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버스에 탄 카드 미소지 승객에게는 휴대폰 송금을 안내한다는 방침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계좌이체나 QR 결제조차 어려운 고령층에게 이런 대책은 그림의 떡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실제로 2023년 이후 서울시는 전체 시내버스의 약 25%를 현금 미승인 버스로 운행 중이며, 인천·대전·대구 등 주요 도시들도 대부분 버스 노선에서 현금 승차를 폐지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현금 없는 버스 시범운영이 곧 현금 결제 전면 폐지의 전초전인 만큼 섣부른 추진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며, “정부 차원에서 고령층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보완책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소매 유통업계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프랜차이즈 카페들을 중심으로 '노 캐시(No Cash)' 매장이 빠르게 늘었습니다. 스타벅스는 2018년 일부 매장을 시작으로 불과 1년 만에 전체 매장의 60%를 현금 결제 불가 매장으로 전환했고, 2022년 1월 기준 64%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투썸플레이스, 할리스 등 다른 카페들도 동참하면서, 극장·편의점·패스트푸드점 등 유통·외식업계 전반에 현금 없는 매장이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비대면 주문과 무인 키오스크가 늘어난 것도 한몫했습니다.
현금 없는 매장에 대한 소비자 불만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금 결제보다 편리하고 위생적이라 좋다”는 긍정 평가도 있지만, “일방적인 현금 거부는 불편하고 세대별·계층별 차별”이라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특히 노인·미성년자·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 사이에서 “현금 없이는 결제를 못 해 역차별당한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앞서 카페에서 현금을 거절당한 신 씨 역시 “조폐공사가 왜 있고 현금을 왜 찍냐”며 분노했듯, 소비자 입장에선 법정통화인 현금 사용이 사실상 배제되는 현실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법적 쟁점도 부상했습니다. 현행법상 사업자가 카드 결제를 거부하면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됩니다. 반면 현금 결제 거부는 한국은행법 제48조의 “법화(法貨)의 강제통용” 조항에 어긋날 소지가 있지만, 처벌 규정이 없습니다. 사실상 사각지대인 셈입니다. 많은 매장들이 출입문과 계산대에 “현금 받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놓고 있고, 이는 손님이 이를 알고 들어온 것으로 간주되어 강제통용 예외로 해석됩니다. 국회에서는 2019년 김두관 의원이 현금결제 거부 시 처벌을 명시하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끝내 폐기됐습니다. 이 법안은 “미국에서는 저소득층 보호를 위해 현금결제 거부 금지법을 제정한 바 있다”며 특정 결제수단 강요를 막아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현금사용선택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현금사용선택권이란 소비자가 원치 않는데 현금 사용을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뜻합니다. 유럽 등지에서 ‘현금 없는 사회’ 추진 중 노인 소외 등의 부작용을 겪으며 등장한 개념입니다. 금융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한국도 현금결제 권리를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한 프랜차이즈 업계 관계자는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됐어도 노인·청소년·장애인 등은 여전히 현금을 들고 매장에 온다”면서 “현금 결제 역차별과 불편 호소가 계속되는 만큼 개선 방안을 심도 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교통 분야에서는 고속도로 통행료 현금결제 문제도 제기됩니다. 한국도로공사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무인 정산기를 확대하면서, 현금 받는 창구가 급감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운전자가 지갑에 현금만 있을 경우 차후 계좌이체 등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실제로 한 운전자는 카드를 깜빡한 채 톨게이트에 진입했다가 현금 받는 곳이 없어 미납처리 후 나중에 가산금까지 붙은 고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금을 갖고도 통행료를 내지 못했다”며 “법정화폐인 현금으로 공공요금을 납부할 수 없는 현실이 비상식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공공서비스 영역에서조차 현금 결제가 막히면서, 법적 권리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해외의 선택: 현금 사용권 보장 움직임
세계 각국도 현금 없는 사회 흐름 속에 한국과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대응 방식은 제각각입니다. ‘현금 없는 사회’의 선두주자로 불리던 스웨덴은 최근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한때 스웨덴 정부는 2030년까지 완전한 캐시리스 사회를 국가 목표로 삼았지만, 부작용이 드러나자 속도 조절에 들어갔습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 은행계좌가 없는 저소득층·난민 등이 불편을 겪은 데다, ATM이 사라진 소도시 주민들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대도시까지 가 현금을 인출하는 상황까지 빚어졌습니다. 결국 스웨덴 중앙은행은 모든 시중은행에 현금 서비스를 의무화하며 “어떤 경우에도 국민의 현금 접근성은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스웨덴의 경험은 자칫 수백만 명이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빚·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라며, “현금 없는 사회로 잠들듯(무심코) 진입했다가는 위험하다”는 교훈을 던졌다고 지적합니다.
영국 역시 현금 사용 인구가 급감하면서 사회적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영국 결제의 약 60%가 현금이었지만 지금은 30%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디지털 금융에 익숙지 않은 계층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해지자, 영국 정부와 금융업계는 ‘Access to Cash’(현금 접근성) 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이 위원회 보고서는 현금 감소 추세를 방치하면 영국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800만 명 이상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권고안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필요한 한 현금 접근성 보장: 모든 국민이 필요할 때 가까이에서 현금을 입출금할 수 있도록 할 것. 소비자의 현금 사용 지속 보장: 소비자가 원하면 언제든 현금으로 지불하고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할 것. 효율적이고 탄탄한 현금 유통 인프라 구축: 현금 유통망(ATM, 은행창구 등)을 효율적으로 유지하여, 현금 사용 감소에도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도록 할 것. 모든 이를 위한 디지털 결제 지원: 현금 대신 디지털 결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교육과 지원을 제공할 것. 현금 사용에 대한 종합적 감독체계 마련: 현금의 공급부터 사용까지 정부와 업계가 협력하여 통합적으로 관리·감독할 것.
보고서는 “일단 현금 인프라가 무너져 지역사회가 피해를 입으면 복구가 어렵다”며, “현금 이용 감소 시대에도 사회적·경제적 피해 없이 적응할 수 있도록 지금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따라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우체국에 예산을 지원하는 등 현금 접근성 강화 조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현금 사용 권리(Right to Cash)의 법제화” 논의도 진행 중입니다.
미국에서는 현금 결제 거부 금지법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시는 2019년 미국 최초로 매장의 현금결제 거부를 불법화했는데, 이는 약 13%에 달하는 은행 계좌 미보유 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어 뉴저지주는 모든 소매점과 음식점에서 현금 결제 거부 시 최대 1만 달러 벌금을 부과하는 주(州)법을 시행했고, 뉴욕시,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시카고 등도 비슷한 조례를 통과시키거나 검토하고 있습니다. “현금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장치를 지역 차원에서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인도 등 일부 국가는 부패와 탈세를 막겠다며 법정화폐를 강제로 폐기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2016년 인도 정부는 고액 지폐(1000루피, 500루피)를 기습 무효화하여 지하경제의 ‘검은 돈’을 색출하려 했는데, 이로 인해 금융 시스템 밖에 있던 서민층이 큰 혼란을 겪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때 '현금 왕국'으로 불리던 일본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현금 선호가 강하고 고령층 인구가 많아, 한때 GDP 대비 현금유통량이 20%에 달할 정도로 현금 중심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정부는 캐시리스(cashless) 결제 확산에 박차를 가해, 지난해(2024년) 개인소비 중 무현금 결제 비중 42.8%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불과 10년 전(약 2013~2014년)에 13% 남짓이던 캐시리스 비율을 세 배 이상 끌어올린 셈입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세운 ‘2025년까지 40% 달성’ 목표를 1년 앞당겨 조기 달성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만 여전히 절반 이상은 현금 사용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본 정부는 장기적으로 캐시리스 결제 비율 8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지만, 현재는 해외 주요국에 비해 격차가 있습니다. 또 해외 관광객들의 현금 결제 수요도 고려하여, 일본 사회는 완전한 현금 퇴출보다는 서서히 디지털 비중을 늘리는 접근을 택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덕분에 일본의 고령층이나 영세 상인들은 비교적 충분한 적응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사례는 정부의 인센티브와 국민의 선택을 통해 점진적 변화를 모색하는 또 하나의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현금 쓸 권리도 기본권… 목소리부터 들어야”
“삶의 다양성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이 보장되는 사회가 더욱 자유로운 사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민단체 공공교통네트워크가 던진 화두인데, 편의를 위해 획일화된 결제수단만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의 상황에 맞게 현금이든 디지털이든 결제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자유사회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체는 일방적인 현금 배제 정책이 공공서비스의 보편적 접근권을 침해한다며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는 “현금 결제 금지는 인권 침해”라는 진정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인권위는 이에 대해 “헌법상 기본권 침해라고 보기는 어렵고 불편의 문제”라는 다소 미온적인 판단을 내렸지만, 시민단체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취약계층의 목소리를 반영하라는 것입니다.
언론과 학계에서도 비판적 시각이 잇따릅니다. 한겨레 신문은 “편의를 추구하는 이면에 디지털에 익숙지 않은 노인 등 취약계층의 불편이 존재한다”고 지적했고, 경향신문도 한국은행 보고서를 인용해 “고령층, 장애인, 저소득층, 벽지 주민들이 금융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를 보도했습니다. 경제 칼럼니스트들은 “현금 없는 사회는 비용 절감과 범죄 예방 등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부작용을 짚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현금을 쓰는 사람은 한국에서 살지 말라는 얘기냐”는 신랄한 비판까지 나옵니다.
학계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정부의 적극적 대응을 주문합니다. “현금 없는 버스 시범운영이 곧 현금 전면 폐지의 전초전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지적처럼, 정책적 보완이 필수라는 견해입니다. 디지털 결제 인프라를 늘리더라도 현금 인프라 역시 일정 수준 유지하여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융소외 계층을 위한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병행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도 제언됩니다. 한국은행 역시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취약계층의 금융소외 및 소비활동 제약 문제가 나타나지 않도록 미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포용입니다. 기술과 효율의 혜택을 누구나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편리함의 비용은 가장 약한 이들이 치른다”는 구조적 문제가 고착되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출발점일 것입니다. 현금 없는 사회, 그 빛과 그림자를 직시한다면 이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혁신이며, 그 이면에서 누가 손해를 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