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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째주 · 2025
[11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노란 조끼와 조커의 미소
영화로 세상을 보다

[11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노란 조끼와 조커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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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7일, 프랑스 전역의 고속도로 요금소와 로터리에 형광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동차에 비치해야 하는 안전조끼를 그대로 뒤집어입은 이들은, 휘발유·경유 가격 인상과 연이은 세금 부담에 항의하며 도로를 막고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온라인 청원으로 촉발된 이 시위는 첫날에만 30만 명 넘게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곧 ‘노란 조끼 운동(Gilets jaunes)’이라는 이름의 전국적 저항으로 번졌다. 표면적 계기는 연료세였지만, 그 밑바닥에는 “부자와 대도시에 유리한 정책이 중하층·지방 주민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는 분노, “더 이상 끝이 보이지 않는 물가와 세금, 정체된 임금”에 대한 피로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파리의 은행 창문이 깨지고 차량이 불타오르는 장면은 곧 전 세계 뉴스의 상징 이미지가 되었고, 많은 이들은 11월 셋째 주 프랑스의 도로 위에서 “불평등의 시대에 시민은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

노란 조끼가 드러낸 것은 특정 국가의 세제 갈등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조세 정의, 생활불안이 한 몸처럼 얽힌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 시민의 구조적 곤경이다. 프랑스의 연료세 인상 자체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소득의 상당 부분을 자동차 연료비와 통근 시간에 쏟아붓고 있던 지방·저소득층에게 그것은 “기후위기의 비용을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전가하는 정책”으로 체감됐다. OECD는 2021년 기준 회원국 상위 10%와 하위 10%의 평균 소득 비율이 8.4대 1에 이른다고 분석한다. 또 다른 보고서는 전체 소득 불평등의 최소 4분의 1 이상이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출신·성별·지역 같은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구조에서 “연료세 인상”은 단순한 가격 조정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기울게 만드는 추가 압력으로 다가온다. 노란 조끼의 분노는 그래서 한 나라의 일탈이라기보다, 기후·복지·조세정책을 둘러싼 세계적 딜레마를 선명하게 드러낸 징후에 가깝다.

이 구조적 분노와 좌절을 보다 어둡고 극단적인 감정의 언어로 번역한 영화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Joker, 2019)를 떠올릴 수 있다. 러닝타임 122분, 심리 스릴러·범죄 드라마 장르로 분류되는 이 영화는 미국 코믹스 세계관에서 악당의 탄생기를 가져와, 복지 축소와 불평등 심화 속에서 무너져가는 도시의 초상을 그린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파트타임 광대이자 코미디언 지망생이지만, 공공 정신건강 서비스 축소로 약도 끊기고, 버스 안에서 아이와 웃었다는 이유로 민원을 당하고, 직장에서는 ‘웃음거리’로 이용당한 뒤 버려진다. 지하철에서의 우발적 살인과 연쇄적인 폭력, TV 쇼 생방송 스튜디오에서의 총성 끝에 그는 마침내 ‘조커’라는 이름으로 거리에 선다. 영화 속 고담시에서 광대 가면을 쓴 군중은, 쓰레기가 쌓이고 복지와 일자리가 무너진 도시에서 “더 이상 소리칠 곳도, 들을 귀도 없는 사람들”의 분노가 익명성 뒤에 집결한 형상이다. 〈조커〉는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며, “불평등 시대의 가장 불편한 자화상”이라는 평가를 낳았다.

2018년 프랑스의 노란 조끼와 〈조커〉의 광대 가면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둘 다 ‘보이지 않던 존재가 스스로를 과장된 상징으로 드러내는 순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노란 안전조끼는 원래 사고 현장에서 운전자의 몸을 눈에 띄게 하기 위한 도구다. 그 조끼가 시위의 상징이 되었을 때, 그것은 “사고가 나고 있는 것은 도로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마찬가지로 〈조커〉의 광대 분장 역시 타인의 웃음을 위해 고용된 인물이 자신의 모멸과 상처를 과장된 얼굴로 드러내는 행위다. 노란 조끼가 교통 체계를 멈추며 “더 이상 이 구조를 그대로 달리게 둘 수 없다”고 말하듯, 조커의 춤과 폭력은 “당신들이 만든 도시가 이미 망가져 있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물론 현실의 노란 조끼는 민주적 요구와 폭력, 극우·극좌가 뒤섞인 복잡한 운동이었고, 영화 속 조커는 명백히 파괴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둘을 나란히 놓을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제도 정치와 주류 담론이 포착하지 못한 균열들이 어떻게 상징과 폭발의 형태로 튀어나오는가 하는 메커니즘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이런 균열은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확산되고 있다. 팬데믹과 고물가, 주택 가격, 청년 고용 불안이 겹치면서, OECD 다수 국가에서 상위 10%와 하위 10% 간 소득 격차와 자산 집중은 더 심해졌고, 상속·부동산·금융자산을 통한 부의 대물림은 “다시 상속의 시대”라는 말까지 낳는다. 동시에 기후위기의 비용은 전 세계 최하위 50%가 거의 기여하지 않았음에도, 상위 10%의 고탄소 생활 방식 탓에 훨씬 더 가혹하게 돌아온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휘발유 가격 인상”이나 “대중교통 요금 조정”, “청년층 복지 삭감”은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저울의 한쪽에 더 무게를 얹는 행위가 된다. 그때 정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구조적 불평등의 원인을 정면으로 건드리며 조세와 복지, 노동·주거 체계를 재설계하든지, 아니면 분노를 ‘과격한 소수’의 일탈로 축소하고 치안·질서의 언어로만 응답하든지다. 후자를 택할수록, 노란 조끼와 조커의 얼굴은 더 자주, 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국 11월 셋째 주 프랑스 도로 위의 노란 조끼와 스크린 속 조커의 미소는, “불평등과 위기를 관리하는 방식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노란 조끼 운동은 분열과 피로, 정부의 부분적 양보 속에 서서히 사그라들었지만, 그 밑바닥에 있던 생활불안과 불평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경찰차 창문 너머 불타는 도시를 보며 피투성이 얼굴로 웃는다. 우리가 그 장면에서 섬뜩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허구라서가 아니라 “어디선가 이미 시작된 현실의 한 조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이 오늘의 노란 조끼를 입게 된다면, 혹은 광대 가면을 쓴 군중 속에 서게 된다면, 그 분노를 단지 파괴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무엇을 요구하고, 어떤 연대를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요구에 응답해야 할 자리에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먼저 바꾸려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