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세상
세계와 스크린 사이
11월 4째주 · 2025
[11월 4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총성과 미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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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총성과 미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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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의 맑은 겨울 햇살 아래를 천천히 달리던 오픈카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린 순간, 미국의 한 대통령만이 아니라 20세기 민주주의의 ‘무결성’ 신화도 함께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끌려 나왔다. 존 F. 케네디 암살은 텔레비전 생중계와 사진, 녹화 필름을 타고 실시간에 가깝게 세계로 전파되었고, 사흘 뒤 범인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즈월드마저 경찰서 지하 통로에서 생중계 도중 피격되어 사망하면서 사건은 더욱 깊은 의혹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11월 넷째 주에 벌어진 이 연속극은 “한 개인의 범행인가, 국가와 권력의 음모인가”라는 질문을 남긴 채, 이후 반세기 넘게 수많은 조사위원회와 폭로, 음모론을 양산해 왔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사건이 민주주의 체제에서조차 ‘국가가 말하는 진실’과 ‘시민이 믿지 못하는 진실’ 사이의 균열을 전면에 드러냈다는 점이다.

케네디 암살이 열어젖힌 것은 하나의 범죄 사건이 아니라, 현대 정치의 구조적 불신이라는 심연이었다. 워런 위원회가 “단독 범행” 결론을 내렸어도, 수많은 시민은 탄도학과 동선, 필름의 프레임 수까지 분석하며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다져갔다. 공적 조사와 비공식적 추적이 끝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진실은 점점 더 명료해지기보다는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이때 의심의 에너지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제도와 권력이 정보를 독점한다는 감각, 그리고 “국가는 우리에게 다 말하지 않는다”는 체험으로 굳어졌다. 이는 냉전기의 불안, 정보기관의 비밀 작전, 언론과 권력의 밀착으로 이미 예열되어 있던 사회적 감수성과 맞물렸다. 결국 11월 넷째 주의 총성은 한 사람의 심장을 멈추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서구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방식, 시민이 정치에 대해 느끼는 근본적 신뢰의 수준을 바꾸어 놓았다.

이 미완의 진실과 집단적 집착을 은유적으로 비춰보려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조디악〉(Zodiac, 2007)을 떠올려볼 수 있다. 1960~70년대 샌프란시스코를 공포에 빠뜨린 연쇄 살인범 ‘조디악 킬러’를 둘러싼 이 영화는, 러닝타임 157분 동안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쫓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부식되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장르는 범죄 스릴러이지만, 실제로는 미결 사건과 단편적인 증거, 제각기 다른 증언이 얽힌 거대한 미로 속에서 기자와 형사, 만화가가 각자의 강박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심리극에 가깝다. 신문사 편집국, 경찰서 기록실, 어두운 차고와 지하실을 오가며, 그들은 자필 편지와 암호문, 필적과 알리바이의 조각을 붙들고 밤을 새운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 “이 사람이 범인이다”라는 확실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한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종이 더미와 낡은 기록, 지친 표정들이다. 〈조디악〉은 살인의 수수께끼보다, “어떤 사회가 설명되지 않는 폭력에 어떻게 중독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윤리적 스릴러다.

케네디 암살과 〈조디악〉이 교차하는 지점은, 진실의 부재가 불신의 과잉을 낳는 구조에 있다. 케네디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이론들―마피아, 쿠바, CIA, 군산복합체, 소련, 심지어 부통령까지―은 하나같이 “공적 진실이 충분히 설득력 있지 않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조디악〉 속 인물들 역시 공식 수사와 발표를 믿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진실 지도’를 그려 나간다. 만화가 그레이스미스는 결국 결혼과 직장을 잃을 만큼 사건에 집착하고, 노년의 형사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 끝냈다”는 허탈함을 숨기지 못한다. 이것은 JFK를 둘러싸고 평생 필름을 돌려 보고, 비밀문서 공개를 기다리고, 책과 다큐멘터리를 써 온 수많은 시민 연구자들의 초상과 겹쳐 보인다. 영화의 카메라는 조디악의 정체보다 그를 쫓는 사람들의 어둑한 방과 눈빛을 오래 응시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카메라 역시 사건의 내부보다는, 사건을 해석하고 소비하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이 영원히 미결일 수 있다는 감각은, 어느 순간부터 “어차피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냉소와 “내가 본 것만이 진짜”라는 독단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오늘의 세계에서 이 진동은 한층 더 가속되고 있다. 영상 편집 기술과 딥페이크, SNS 알고리즘이 결합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자료를 더 빨리 접하지만, 그 자료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리는지 판단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다. 대형 참사와 국가 폭력 의혹, 국제 분쟁과 선거 개입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유튜브와 커뮤니티, 메신저에는 수많은 ‘해설’과 ‘내부자 증언’, ‘결정적 증거’가 넘쳐난다. 케네디 사건 당시 시민들은 몇 장의 사진과 필름을 수십 년 동안 곱씹었다면, 우리는 수천 개의 클립과 캡처를 몇 시간 만에 소비해 버린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쌓여도 여전히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감정만 강화될 때다. 음모론은 언제나 권력의 어두운 얼굴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책임과 구조적 개혁의 요구를 “어딘가의 보이지 않는 절대 악”으로 돌려버리며 무력감을 키우기도 한다. 11월 넷째 주의 총성과 조디악의 미결 사건을 함께 떠올려 볼 때, 중요한 것은 ‘더 자극적인 설명’이 아니라, “불완전한 정보를 어떻게 공동의 진실로 다룰 것인가”라는 민주주의의 오래된 과제일 것이다.

 

결국 케네디 암살과 〈조디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같다. “진실이 끝내 명확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와 공동체를 유지할 것인가.” 모든 퍼즐 조각을 맞추지 못한 채 사건이 닫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무력한 냉소,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와 증언을 검증하고, 제도를 개선하며, 권력의 투명성을 넓혀 가려는 느린 노력이다. 진실을 향한 집착이 우리를 고립된 음모의 방에 가두는 대신, 더 나은 공론장의 규칙을 요구하는 에너지로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만약 당신이 1963년 댈러스 거리의 목격자이자, 〈조디악〉 속 신문 편집국의 기자라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수사에서 어떤 질문을, 누구와 함께 계속 던지고 싶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