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인공지능) 시장의 패러다임이 거대언어모델(LLM)의 파라미터 사이즈를 겨루는 ‘덩치 싸움’에서, 실제 산업 현장의 난제를 해결하는 ‘특화형 솔루션’ 경쟁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오픈AI와 구글이 더 자연스러운 대화 능력에 집중하는 사이, 기업용(B2B) 시장에서는 복잡한 사내 데이터를 정확하게 분석해내는 ‘Text-to-SQL(자연어-데이터베이스 변환)’ 기술이 AI 도입의 성패를 가를 ‘마지막 퍼즐’로 떠올랐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의 핀테크 기술을 모태로 한 스타트업이 글로벌 IT 거인들이 즐비한 ‘Text-to-SQL’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벤치마크 1위를 차지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웹케시그룹의 사내 벤처로 출범한 ‘다큐브’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 성과는 단순한 기술 순위 등극을 넘어,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이 ‘AI 에이전트(Agent)’라는 새로운 기술 물결을 타고 글로벌 B2B 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 기업용 AI의 최대 난제 ‘데이터 환각’, 한국 기술이 해법 찾았다
현재 대다수 기업이 챗GPT와 같은 범용 LLM 도입을 주저하는 핵심 이유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과 ‘데이터 보안’ 때문이다. 기업의 데이터베이스(DB)는 수천 개의 테이블과 복잡한 스키마(구조)로 얽혀 있어, 일반적인 AI 모델로는 “지난달 강남 지점의 20대 여성 재구매율을 보여줘”와 같은 질의를 정확한 SQL 명령어(데이터 추출 언어)로 변환하지 못한다. 엉뚱한 데이터를 가져오거나 없는 숫자를 만들어내는 치명적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큐브가 이번에 1위를 차지한 ‘Spider 2.0’ 벤치마크는 바로 이 능력을 검증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시험대다. 미국 예일대학교와 글로벌 산업 파트너들이 공동 개발한 이 지표는 실제 기업 환경과 유사한 고난도 데이터 구조를 AI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변환하는지를 평가한다.
특히 다큐브가 석권한 ‘Lite 부문’은 지난 2년간 전 세계 AI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경쟁해 온 격전지다. 다큐브는 여기서 65.81점을 기록하며, 글로벌 클라우드 데이터 플랫폼 1위 기업인 ‘스노우플레이크(Snowflake)’와 삼성SDS, 중국 칭화대학교 연구팀 등 막강한 자본과 인프라를 갖춘 경쟁자들을 모두 제쳤다. 이는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만드는 원천 기업(스노우플레이크)보다 한국의 스타트업이 해당 DB를 활용하는 ‘응용 기술’에서 더 앞서 나갔음을 의미하는 놀라운 결과다.
◇ 거대 모델 이기는 ‘똑똑한 에이전트’… 기술 방법론의 승리
전문가들은 이번 다큐브의 성과가 ‘모델의 크기’가 아닌 ‘설계의 정교함’에서 비롯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큐브 김하정 CTO가 밝힌 기술의 핵심은 최근 실리콘밸리의 화두인 ‘에이전틱 워크플로우(Agentic Workflow)’다.
과거에는 하나의 거대 모델에게 모든 작업을 시켰다면, 다큐브는 역할을 세분화한 다수의 ‘AI 에이전트’를 투입했다. ▲사용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에이전트 ▲SQL 코드를 작성하는 에이전트 ▲작성된 코드의 오류를 검증하는 에이전트 ▲실패 시 원인을 분석해 재시도하는 에이전트 등이 마치 숙련된 개발자 팀처럼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구조다.
이러한 ‘멀티 에이전트 시스템’은 LLM의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정확도와 처리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다. 다큐브의 성과는 자본력이 부족한 스타트업이라도 창의적인 아키텍처 설계를 통해 빅테크의 성능을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로, 향후 국내 AI 스타트업들의 기술 개발 방향성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 ‘데이터 민주화’의 열쇠… 글로벌 SaaS 시장 정조준
산업적 측면에서 이번 기술 혁신은 기업 내 ‘데이터의 민주화(Data Democratization)’를 가속할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다. 그동안 기업 데이터를 추출하려면 SQL을 다룰 줄 아는 데이터 엔지니어나 분석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의사소통 비용이 발생하고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병목 현상이 만연했다.
그러나 다큐브의 ‘QUVI’와 같은 고성능 Text-to-SQL 솔루션이 상용화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마케터나 경영진, 영업 담당자가 자연어로 질문하는 것만으로 즉시 정확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초자동화(Hyper-automation)’의 핵심 기반이 된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확장성’이다. 다큐브의 솔루션은 구글 빅쿼리(BigQuery), 스노우플레이크 등 특정 벤더에 종속되지 않는 범용성을 갖췄다. 이는 클라우드 환경이 파편화된 북미와 유럽의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형태로 빠르게 침투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특정 DB에 갇히는 ‘록인(Lock-in) 효과’ 없이 어떤 환경에서도 즉시 작동한다는 점은 글로벌 B2B 바이어들이 가장 선호하는 요소다.
다큐브 윤예지 대표는 “지난해 신설된 DBT 부문 1위에 이어, 경쟁이 가장 치열한 핵심 부문인 Lite 트랙까지 제패한 것은 우연이 아닌 기술적 필연”이라며 “한국의 AI 기술이 글로벌 표준을 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남은 ‘Snow 트랙’까지 석권해 세계 무대에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의 토종 AI 기술이 인프라 구축 단계를 넘어, 실제 산업의 난제를 해결하는 ‘애플리케이션 계층’에서 글로벌 톱티어(Top-tier) 수준에 도달했다. ‘말 잘하는 AI’를 넘어 ‘일 잘하는 AI’를 요구하는 시대, 다큐브의 도약은 K-소프트웨어가 글로벌 AI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