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꿈의 숫자', 열린 새 장(場)
2026년 1월 22일 오전 9시 3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에 붉은 숫자 '5000'이 찍혔다. 코스피 지수가 장중 사상 처음으로 5000선을 돌파한 순간이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 대비 1.57% 오른 4987.06에 출발해 개장 직후 5000을 넘어섰고, 오전 중 장중 고점 5019.54까지 치솟았다. 종가는 4952.53으로 마감했지만, 이 또한 역대 최고 종가 기록이다.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문을 연 지 70년, 2004년 사상 첫 1000선 돌파 이후 22년 만에 한국 주식시장은 다시 한 번 역사를 썼다.
지난해 10월 22일 코스피는 4000선을 처음 넘었다. 당시 증권가에선 "5000은 아직 꿈의 숫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만에 그 꿈이 현실이 됐다. 1000에서 2000까지는 3년 6개월, 2000에서 3000까지는 14년, 3000에서 4000까지는 4년 2개월이 걸렸다. 4000에서 5000까지는 단 3개월이었다. 왜 이토록 빨랐을까.
증시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랠리'를 첫 번째 동력으로 꼽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끄는 반도체 수출이 지난해 4분기에만 전년 동기 대비 23% 늘었고, AI 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이 실적을 밀어 올렸다.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3개월간 28% 올랐고, SK하이닉스는 41% 상승했다. 두 종목의 시가총액 합산이 코스피 전체의 28%를 차지하는 만큼, 이들의 질주가 지수를 끌어올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두 번째 동력은 외국인 자금의 복귀다. 지난해 3분기까지만 해도 외국인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이유로 국내 주식을 순매도했다. 그러나 4분기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국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본격 가동하며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을 유도하자, 외국인은 10월부터 석 달 연속 순매수로 돌아섰다. 같은 기간 순매수 규모는 12조 원을 넘겼다. 세 번째는 환율 안정 기대다. 이재명 대통령이 전날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두 달 뒤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전후로 내려갈 것"이라고 발언한 뒤, 22일 오전 환율은 장중 1463원까지 하락했다. 고환율이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외국인 투자 심리를 한층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증시 안팎에선 낙관론만큼이나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우선 지수 상승이 소수 대형주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 이날 코스피200 지수는 1.6% 올랐지만, 코스닥 지수는 0.3% 상승에 그쳤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4개 종목이 코스피 상승분의 68%를 차지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지수는 5000이지만, 내 계좌는 여전히 마이너스"라는 개인투자자들의 푸념이 괜한 말이 아니라고 전했다. 반도체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도 있다. HBM 수요가 꺾이거나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가 한국 기업에 불똥을 튀기면 지수는 급락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중 수출 통제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예고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중국 내 생산시설을 가동 중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위협도 변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 백악관에서 "한국에 대한 관세를 다시 25%로 올릴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양국이 합의한 관세 인하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관세 전쟁이 재점화되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와 증시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개인투자자, 이른바 '동학개미'의 존재감도 이번 랠리의 특징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1월 들어 개인투자자의 코스피 순매수 규모는 8조 원을 넘었다. 2020년 팬데믹 당시 '동학개미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주식 투자 인구가 1400만 명을 넘어선 지금, 증시 지수는 더 이상 증권가만의 숫자가 아니다. 국민연금 가입자 2200만 명의 노후 자금 가치와도 직결된다. 국민연금공단은 국내 주식에 약 110조 원을 투자하고 있다. 다만 장밋빛 전망에 휩쓸려 빚을 내 주식을 사는 '빚투'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신용융자 잔고는 이달 들어 23조 원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수가 급락하면 빚을 낸 투자자들의 반대매매가 쏟아지고, 이는 추가 하락을 부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5000 돌파가 단기 랠리에 그칠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증권가에선 "지수 5000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배당 확대, 소액주주 권리 강화 같은 밸류업 프로그램이 지속돼야 외국인 자금이 계속 들어오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증시 활성화가 경제 체질 개선의 중요한 축이라는 점에서, '5000 시대'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정부 정책과 기업 실적, 글로벌 변수가 함께 결정할 것이다. 70년 역사에서 처음 찍힌 네 자릿수 '5'가 새로운 출발선이 될지, 아니면 잠시 스쳐 가는 숫자에 그칠지—답은 시장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써 나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