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대통령 곁에 있던 사람, 떠나다
2026년 1월 25일 오후, 베트남 호찌민시의 한 병원 중환자실. 이틀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스텐트 시술을 받은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끝내 눈을 감았다. 향년 74세. 민주평통 아태지역회의 참석차 베트남을 방문한 공무 출장 중이었다. 26일 오전 시신이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됐다. 장례는 민주평통과 더불어민주당 공동 주관으로 5일장 기관·사회장으로 엄수된다. 정부는 유족의 뜻을 존중해 국민훈장 중 가장 높은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이해찬은 한국 민주주의 50년을 관통한 정치인이었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보다 운동에 열중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고, 이후 서점 '광장서적'과 출판사 '돌베개'를 운영하며 재야 지식인 사회의 구심 역할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합류해 1988년 서울 관악을에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36세, 최연소 의원이었다. 이후 7번의 선거에서 7번 모두 이겼다. 진 적이 없는 '선거의 왕'이었다.
그가 정치인 이전에 '전략가'로 이름을 떨친 것은 1997년 대선이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 캠프의 기획실장으로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의 'DJP 연합'을 설계해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끌었다. 2002년 대선에서도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본부 기획본부장을 맡아 승리를 만들었다. 2017년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선대위 상임고문을 지냈고, 2022년 이재명 후보의 멘토로 불렸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민주당이 배출한 네 명의 대통령 곁에 그가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 빼고 다 해봤다"는 말이 돌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내며 '책임총리'의 대명사로 불렸다. 2004년 취임 후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설계를 주도했고, 주5일제 근무 확산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동업자' 수준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2006년 대연정 파동과 골프 논란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12년 민주통합당, 2018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두 차례 지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시스템 공천으로 압승하겠다"고 선언한 뒤 180석이라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이끌었다. 승리한 당 대표 신분으로 정계를 떠난 것도 그가 유일하다.
빈소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27일 저녁 업무를 마친 이재명 대통령이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한 시대를 보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같은 대학 같은 과 후배이기도 했던 제게 선거를 가르쳐준 분"이라며 애도했다. 유시민 작가는 영정 앞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국민의힘도 공식 애도 성명을 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장례 기간을 '민주당 애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전국 시·도당에 빈소를 설치해 당원과 시민이 조문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그의 정치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09년 민주당 대표 시절 당직자 폭행 논란으로 사퇴했고, 2011년에는 대선 경선에 출마했다가 문재인에게 밀려 중도 사퇴했다. '원팀'을 강조하면서도 계파 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설계한 공천 시스템, 당내 민주주의 강화, 정책 중심의 선거 전략은 이후 민주당의 기본 문법이 됐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해찬은 '87년 체제'의 설계자이자 수혜자였고, 동시에 그 체제의 한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발인은 31일로 예정돼 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며 설계를 주도한 세종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50년 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청년은 일곱 번의 선거를 모두 이기고, 네 명의 대통령을 만들고, 180석의 승리를 이끈 뒤 베트남에서 생을 마감했다. 빈소를 찾은 한 조문객은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선생님, 이제 쉬십시오. 우리가 이어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