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2026년 1월 20일경, 바오 출판사에서 596쪽 분량의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손민석의 『자본 이전의 세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드디어 제 인생을 갈아넣은 책이 서점에 풀렸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출간 직후 2쇄가 찍힐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과거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던 손민석은 "우리는 왜 식민지로 전락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던 중 마르크스를 만났고, 그 결과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그는 마르크스를 철학자나 경제학자, 혁명가가 아닌 '역사학자'로 재정의하며,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 인류 사회가 어떤 내적 논리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추적했다.
책이 출간된 지 며칠 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의 신현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1962년생인 신현준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이자, 1993년부터 음악평론을 시작해 『한국 팝의 고고학 1970』,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 등을 펴낸 대중음악 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손민석의 책에서 '임금농노'라는 개념을 문제 삼았다. 신현준의 비판에 따르면, 손민석은 현대 한국의 플랫폼 노동자와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중세 농노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임금농노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민석의 책 어디에도 플랫폼 노동이나 가계부채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손민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강하게 반발했다. "플랫폼 노동이나 가계 부채에 관해 한 마디의 언급도 없는데 그걸 근거로 임금농노의 이동의 제약을 논했다고 서평을 쓰면 어떻게 하나." 그는 신현준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AI 검색 결과에 기반해 비판했다고 주장했다. 손민석의 책은 '자본 이전의 세계', 즉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근대 사회 구조를 분석한 것이지,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신현준이 비판의 근거로 삼은 내용들은 손민석의 책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논쟁은 빠르게 격화되었다. 손민석은 신현준을 페이스북에서 차단했고, 신현준은 손민석의 트위터까지 찾아가 해명을 시도했다. 양측 모두 상대방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손민석의 『자본 이전의 세계』는 무엇을 말하는 책인가. 이 책의 핵심 개념은 '중층적 소유구조'다. 손민석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라는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영주, 공동체, 농민의 권리가 겹겹이 쌓인 구조가 존재했다. 농민은 단순히 착취당하는 예속민이 아니라, 생산수단과 결합되어 일종의 '경영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 복잡한 소유구조가 비록 착취관계와 얽혀 있었지만, 오히려 삶의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는 것이 손민석의 주장이다.
손민석은 이를 통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발전 5단계설'(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을 재검토하고, 유럽 사례에 국한된 기존 연구를 넘어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포함한 인류사의 통일된 체계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이 책을 시작으로,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근대를 재해석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지속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신현준이 문제 삼은 '임금농노'라는 개념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손민석이 사용하는 '임금농노제'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묘사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재통일을 매개하는 역사적 범주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신현준의 비판은 이 개념을 현대 플랫폼 노동과 가계부채 문제에 적용한 것으로 오해했다.
신현준은 결국 자신의 페이스북에 "손민석 『자본 이전의 세계』 비판을 중지합니다. 그리고 휴전을 제안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책에 나오지도 않은 플랫폼 노동과 가계부채를 AI 검색을 통해 '조작'해 내고 비판했습니다. 이건 후지무라 신이치가 한 것과 진배없는 것이었다고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일본 고고학계를 20년간 속인 인물이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그는 1970년대부터 일본 각지에서 구석기 유물을 잇따라 발견해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발견한 유물들은 일본 역사를 수십만 년 전까지 끌어올렸고, 교과서에 실렸다. 그러나 2000년 11월, 마이니치 신문이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후지무라는 미리 준비한 가짜 유물을 발굴 현장에 몰래 묻어둔 뒤 며칠 후 그곳을 찾아가 '발굴'하는 방식으로 조작해왔던 것이다. 정밀 조사 결과 그가 관여한 180곳의 유적 중 162곳, 즉 90%에서 조작 흔적이 발견되었다.
신현준은 자신의 행위를 이 조작 사건에 비유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유물을 땅에 묻고 파내는 것이나 AI가 만든 허위 정보를 근거로 비판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악의는 없었고 전과가 없었다는 점 참작해서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신현준은 사과문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신현준은 '손민석'을 비판하거나 『자본 이전의 세계』를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세대의 연구자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공부해서 두터운 책을 간행했는데 이를 놓고 널리 토론하는 걸 제가 왜 비판하겠습니까. 시간이 흐른 뒤 정식 서평을 쓰면 모를까 찔끔찔끔 시시비비 가리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학계 전체를 향한 당부도 덧붙였다. "'니 따위가 감히 마르크스에 대한 책을 쓰냐'라는 식의 비판도 하지 않기 권해 봅니다. 마르크스가 가볍고 유쾌하게 토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성경이나 불경처럼 신도들은 직접 읽지 않고 서가에 꽂힌 채 목사님이나 스님이 대신 읽어주는 좋은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손민석도 화답했다. "사과하시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큰 결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선생님께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저의 인격의 부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마음 상하셨던 게 있으시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손민석은 역사학자로서 마르크스 원전에 충실한 보편적 역사 법칙을 모색한다. 신현준은 문화경제학자로서 현대 자본주의의 문화적·정치적 차원에 주목한다. 둘의 관심사와 방법론은 다르지만, 반드시 대립할 필요는 없다. 손민석의 '중층적 소유구조' 개념이 전근대 사회의 구조를 설명한다면, 신현준의 문화산업 분석은 현대 자본주의의 일상적 작동 방식을 포착한다. 이 둘이 결합될 때 한국 사회를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신현준은 사과문 말미에서 "페북과 트위터 차단 풀어주면 감사합니다. 댓글은 달지 않겠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약간의 농담기가 섞인 이 문장에서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풀리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1번에서 이렇게 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손민석과 신현준의 논쟁은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지만, 화해는 연대의 가능성을 열었다. 자본 이전의 세계를 탐구하든, 오늘의 K팝 산업을 분석하든, 목적지는 같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