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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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째주 · 2026
[2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식탁은 위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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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식탁은 위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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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2월 21일, 런던의 한 인쇄소에서 스물세 쪽짜리 소책자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주의자동맹의 의뢰를 받아 집필한 『공산당 선언』이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첫 문장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벌어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골을 단 한 줄로 응축했다. 출간 시점이 절묘했다. 불과 사흘 뒤인 2월 24일 파리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고, 3월에는 밀라노와 베를린으로 번지며 '민족의 봄'이라 불리는 1848년 유럽 혁명이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혁명 자체는 대부분 좌절되었지만, 이 소책자가 던진 질문은 좌절되지 않았다. 이후 2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힌 정치 문헌이 된 이 선언문은 (중국인민대표대회 공식 자료, 2018), 단순한 정치 강령을 넘어 "부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돌아가며, 그 분배를 결정하는 권력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보편적 물음을 인류 앞에 놓았다. 178년이 지난 지금, 이 물음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첨예해졌다.

『공산당 선언』이 드러내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구조적 불평등의 자기 재생산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부의 편중을 심화시킨다고 진단했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와 노동력만을 가진 자 사이의 비대칭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의해 교정되기보다 오히려 확대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였다. 물론 이 진단에 대한 반론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제기되었고,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마르크스의 처방전이 품었던 치명적 맹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진단과 처방을 분리해서 볼 때, '부의 편중이 체제 내부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 강화된다'는 구조적 관찰만큼은 여전히 유효한 논쟁의 축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철학적 긴장이 발생한다.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차이가 빚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설계된 방식 그 자체가 특정 방향으로 부를 몰아가는 구조적 산물인가. 이 물음은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진영 이전에, 인간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우리가 속한 체제의 규칙은 누가 쓰는가, 그리고 그 규칙의 수혜자는 규칙을 쓰는 자와 얼마나 겹치는가. 선언문은 답을 제시했지만, 그 답의 유효성과 별개로 질문 자체의 무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지고 있다.

 

이 구조적 물음을 가장 날카로운 공간적 은유로 풀어낸 영화가 있다. 스페인 감독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의 「더 플랫폼」(2019년 개봉, 94분, 사회파 공상과학·공포)이다. 이 작품은 제44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미드나잇 매드니스 부문 관객상, 제52회 시체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최우수관객상·최우수특수효과상·시민 케인상(주목할 감독상) 등 4관왕, 그리고 제34회 고야상 특수효과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수백 층으로 이루어진 수직 구조의 시설이 있다. 매달 수감자들은 무작위로 층이 배정되고, 꼭대기에서 한 장의 거대한 식탁이 내려온다. 음식은 처음부터 모든 수감자가 나누어 먹기에 충분한 양이지만, 위층 사람들이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면 아래층에는 잔반조차 남지 않는다. 주인공 고렝은 자발적으로 이 시설에 들어왔다가 하층으로 배정되면서 체제의 잔혹한 논리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그는 동료 트리마가시, 이마굴레와 함께 식탁에 남은 음식을 아래로 보내려는 시도를 하지만, 체제는 연대를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영화는 총 333층이라는 수직 공간을 통해 계급 구조를 물리적으로 가시화하며,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몇 층에 있는가,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본 적이 있는가.

『공산당 선언』과 「더 플랫폼」이 교차하는 지점은 '식탁'이라는 상징에 집약된다. 영화 속 식탁은 위에서 아래로만 이동한다. 아래층 사람이 위층으로 음식을 올려 보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일방향의 수직 구조는 마르크스가 묘사한 자본주의적 부의 흐름과 정확히 겹쳐진다. 잉여 가치는 노동에서 생산되지만 자본에 의해 포획되며, 그 방향은 항상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 영화가 더 통렬한 것은 음식의 총량이 충분하다는 설정에 있다. 문제는 절대적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구조다. 이 점에서 영화는 선언문이 제기한 핵심 문제의식, 곧 "사회의 생산력은 이미 충분한데 왜 다수는 궁핍한가"라는 질문을 시각적으로 체현한다. 또한 영화에서 매달 층이 무작위로 바뀐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비틀기다. 이론상 누구나 상층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체제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장치로 기능하지만, 실제로 하층에 배정된 자의 고통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능력주의라는 이름 아래 구조적 불평등이 개인의 운이나 능력 탓으로 전환되는 현실 세계의 논리와 불편할 정도로 닮아 있다. 선언문의 언어와 영화의 공간은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이 178년 된 질문은 오늘날 더욱 생생한 숫자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이 올해 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억만장자의 자산은 2025년 한 해 동안 16퍼센트 이상 증가해 사상 최고치인 18조 3천억 달러에 달했다. 이 증가 속도는 직전 5년 평균의 세 배에 이른다 (옥스팜, 2026). 같은 보고서는 억만장자 수가 2025년 중 처음으로 3천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가디언, 2026).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부유층의 노골적인 정치적 영향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영화 속에서 상층 수감자들이 식탁의 음식을 독점하면서도 아래층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장면은, 이 통계가 보여 주는 현실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가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절대 빈곤율은 지난 수십 년간 크게 줄었고, 기술 혁신은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풍요의 총량이 커질수록 그 분배의 기울기도 함께 가팔라지는 역설은, 선언문이 지적한 구조적 모순이 체제의 성공 속에서도 해소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식탁 위 음식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문제는 여전히, 그것이 몇 층까지 내려가느냐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처방전,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적 소유의 폐지는 20세기의 실험을 거치며 그 한계와 위험이 드러났다. 그러나 처방전의 실패가 진단의 무효를 뜻하지는 않는다. 「더 플랫폼」의 결말에서 주인공 고렝은 한 접시의 판나코타를 꼭대기로 돌려보내려 한다. 그것은 체제 바깥에서 온 메시지, 곧 아래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위에 알리려는 절박한 시도다. 그 시도가 성공하는지 영화는 명확히 보여 주지 않는다. 다만 시도 자체가 체제의 논리에 균열을 낸다는 것, 식탁의 방향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이미 저항의 시작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178년 전 런던의 인쇄소에서 나온 스물세 쪽의 소책자도 처음에는 그런 균열이었다.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층에서, 식탁은 어떤 모습으로 도착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식탁을 아래로 내려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