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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째주 · 2024
[8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역사와 영화는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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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역사와 영화는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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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벤섬 감옥. 백인 교도관 제임스 그레고리가 넬슨 만델라의 전담 간수로 배치됐다. 코사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는 정부로부터 만델라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지도부의 대화를 감시하라는 특별 임무를 받았다. 그레고리는 철저한 아파르트헤이트 신봉자였고, 흑인 정치범들을 국가의 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20여 년간 만델라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의 신념 체계는 서서히 균열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관계가 어떻게 인간적 이해와 존중의 관계로 변화할 수 있을까. 남아공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변화가 바로 이 작은 감옥 공간에서 시작됐다.

역사 사건

남아공 인종차별 교도관.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단순한 인종 분리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350만 백인이 2,500만 흑인을 지배하는 구조적 폭력이었고, 법과 제도로 정당화된 일상의 억압이었다. 교도관들은 이 체제의 최전선 집행자였다. 그들은 정치범들의 편지를 검열하고, 면회를 제한하며, 강제 노동을 감독했다. 그레고리 역시 충실한 체제 수호자였다. 그는 만델라가 쓴 편지 한 줄 한 줄을 꼼꼼히 읽으며 반정부 메시지를 찾아냈고, 동료 재소자들과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감시 행위가 그를 만델라의 삶 깊숙이 끌어들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동지들에 대한 걱정, 자유에 대한 갈망 - 그레고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을 마주하게 됐다.

2007년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의 Goodbye Bafana는 바로 이 제임스 그레고리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조셉 파인즈가 연기한 그레고리는 처음엔 전형적인 아프리카너였다. 흑인들이 열등하다고 믿었고, 백인의 지배가 신의 뜻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데니스 헤이스버트가 연기한 만델라와의 오랜 만남은 그의 확신을 흔들어놓는다. 영화는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레고리가 만델라의 손자 손녀 사진을 몰래 전달하는 장면, 병든 아내 위니의 소식에 눈물짓는 만델라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경계가 흐려지며,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싹튼다. '바파나'는 코사어로 '소년'을 뜻한다. 만델라가 그레고리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영화 스틸

Goodbye Bafana (2007),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 ⓒ Production Company

역사와 영화는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개인은 거대한 체제 앞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레고리의 변화는 단순히 만델라의 인품에 감화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복무하던 체제의 모순을 직시하게 된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각성이었다. 영화는 이 과정을 급진적 전향이 아닌 점진적 깨달음으로 그려낸다. 그레고리는 여전히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고,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하지만 더 이상 만델라를 적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는 1990년 만델라 석방 직전 은퇴했고, 훗날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성찰했다. 한 개인의 변화가 체제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체제가 한 개인의 양심까지 완전히 지배할 수도 없었다.

2024년의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감옥들 속에 살고 있다. 편견과 혐오, 차별과 배제의 구조는 형태를 바꿔가며 지속된다. 디지털 감시 체제는 더욱 정교해졌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분류하고 예측한다. 그러나 그레고리와 만델라의 이야기는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체제도 인간과 인간의 만남 앞에서는 균열될 수 있다. 타자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 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신의 신념을 의심해보는 것. 이런 작은 균열들이 모여 거대한 변화를 만든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진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가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들도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다.

그레고리는 만델라와의 작별 인사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고 훗날 고백했다. 가해의 역사를 살았던 한 개인의 뒤늦은 참회였다. 그는 용서받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만 진실을 증언하고자 했다. 우리 각자는 크고 작은 감옥의 간수이자 죄수다. 누군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통제당한다. 하지만 그레고리처럼 우리도 선택할 수 있다. 체제의 충실한 부품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볼 것인가. 만델라가 27년의 감옥 생활 끝에 자유를 얻었듯이, 우리도 서로를 가둔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진정한 자유는 어쩌면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공식 예고편

Goodbye Bafana (2007) —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