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 기업공시실. 매일 수십 건의 공시가 쏟아지지만 올해 들어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게 있다.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신규 상장 공시다.
올 상반기 스팩 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5년 1월부터 5월까지 신규 상장한 스팩은 단 한 곳도 없다. 작년 같은 기간 8개사가 상장한 것과 대조적이다. 2021년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던 스팩 시장이 올해 들어 사실상 멈춰 섰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상장한 스팩들이다. 합병 기한을 앞둔 스팩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지만 마땅한 합병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교보15호스팩은 최근 씨엠디엘과의 합병 일정을 정정 공시했다. 애초 계획보다 상장 예정일이 늦춰졌다. 아이비김영 역시 브라운편입과의 흡수합병을 결정했지만 재무구조 문제로 진척이 더디다.
스팩은 상장 후 3년 내에 비상장 기업과 합병해야 한다. 실패하면 해산하고 투자금을 돌려줘야 한다. 현재 상장 중인 스팩 40여 개 중 절반 이상이 올해와 내년 사이 합병 기한을 맞는다. 시장에서는 '시한폭탄'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정이 직격탄이 됐다. 미국 연준의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위험자산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됐다. 스팩 합병의 핵심인 밸류에이션(기업가치 평가)에서 투자자와 피인수 기업 간 간극이 벌어졌다. 피인수 기업은 높은 가격을 원하지만 투자자들은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한국 스팩 시장의 구조적 문제도 드러났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스팩 운용사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단순히 상장 수단으로만 스팩을 활용하려는 기업들이 많았고, 합병 후 시너지를 내는 사례는 드물었다.
정부와 국회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최근 발의된 상법 개정안에는 합병 시 공정가액 평가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소액주주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취지지만 스팩 업계에서는 합병 절차가 더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당장은 해산하는 스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장기적으로는 옥석이 가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스팩들은 이미 해산 절차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팩 시장의 침체는 중소·벤처기업들의 상장 기회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IPO(기업공개) 문턱이 높은 상황에서 스팩은 대안적 상장 통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 통로마저 막히면서 유망 기업들의 자금조달 경로가 좁아졌다.
결국 스팩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려면 금융시장 안정과 함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운용사의 전문성 강화, 투자자 보호 장치 마련, 합병 후 관리 감독 강화 등이 과제로 꼽힌다. 2021년 붐을 일으켰던 스팩이 3년 만에 빙하기를 맞았다. 이제는 양적 성장보다 질적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