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은 85개 항목, 양약은 기준 자체가 없다
한약을 끓이는 탕전실은 이제 국가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일반 약국의 조제실은 여전히 명확한 평가 기준이 없다. 보건복지부가 27일 발표한 공동이용탕전실 평가인증제도 개선안은 한약 조제의 안전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지만, 정작 더 많은 국민이 이용하는 양약 조제 환경은 여전히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정부가 한방 약침과 탕약 조제 시설의 관리를 강화한 배경엔 최근 늘어난 의료사고가 있다. 지난해 한약 조제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 사고가 3건, 약침 시술 후 감염 사례가 5건 보고됐다. 특히 여러 한의원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탕전실의 경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개선안은 탕전실의 위생 관리, 약재 보관, 조제 과정, 품질 관리 등을 85개 항목으로 세분화해 평가한다. 인증을 받지 못한 탕전실은 영업을 계속할 수 있지만, 건강보험 수가 가산 등 인센티브에서 제외된다. 한방 업계는 기준이 엄격하다면서도 제도 도입 자체는 불가피하다는 반응이다.
32년째 멈춰 있는 양약 조제 기준
반면 양약 조제실의 시설 기준은 1994년 약사법 시행규칙에서 정한 내용이 사실상 그대로다. 당시 기준은 조제대 면적, 냉장고 유무, 조명 밝기 등 최소한의 물리적 요건만 규정했다. 조제 과정의 교차오염 방지, 약품 보관 온도 모니터링, 자동 조제 시스템 검증 같은 현대적 기준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규모의 격차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한약 탕전실 이용 환자는 연간 약 48만 명인 반면, 양약 조제 서비스 이용 인구는 4,800만 명으로 100배에 달한다. 전국 약국 2만 4천여 곳의 조제실이 매일 수백만 건의 처방을 소화하고 있지만, 이 공간에 대한 체계적 품질 평가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대한약사회는 양약 조제실에도 단계적으로 평가인증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전국 약국에 일률적 기준을 적용하면 소규모 약국의 부담이 커질 수 있어 규모별 차등 기준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양약 조제 환경 개선에 대해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겠다"고만 밝혀 구체적 일정은 나오지 않았다.
한약 탕전실은 85개 항목으로 평가하면서 더 많은 국민이 이용하는 양약 조제실은 30년 넘게 기준 변경이 없다.
조제 환경 관리 기준의 부재는 의약품 오염 및 조제 오류 위험을 높인다.
한약 평가인증제 도입을 계기로 양약 조제실에 대한 체계적 평가 기준 마련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