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협의 없이 바뀐 요금 체계
여의도 한국전력 본사 회의실. 지난해 12월 말,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 요금 변경을 알리는 내부 문건이 조용히 배포됐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한전이 사전 협의 한 번 없이 요금 체계를 바꾼 것이다. PPA 기본요금은 최대 50.5%까지 차등 인상됐고, 기업들이 꼽은 직접 PPA의 최대 걸림돌인 '높은 비용' 문제는 더욱 악화됐다.
재생에너지 PPA는 기업이 태양광·풍력 발전소와 직접 계약해 친환경 전력을 구매하는 제도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에너지솔루션 등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목표를 선언한 대기업들이 핵심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그런데 이번 인상으로 기업들의 연간 재생에너지 조달 비용이 수백억 원 단위로 늘어나게 됐다. 기후솔루션·RE100협의체가 585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기업의 67.7%가 직접 PPA의 최대 걸림돌로 '높은 비용'을 지목했는데, 이번 인상이 그 장벽을 더 높인 셈이다.
정부는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지만, 실제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2023년 도입한 녹색프리미엄 요금제도 kWh당 10원에서 시작해 지속적으로 올랐다. 전력거래소 통계에 따르면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8.2%에 불과하다. OECD 평균(30.5%)의 4분의 1 수준이고, 독일(46.3%)과 비교하면 격차가 더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도입 비용을 올리는 정책이 나오자 업계의 당혹감은 크다.
CBAM 시한폭탄, 3조 원의 무게
타이밍이 특히 문제다.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2026년부터 본격화된다. 철강·시멘트·알루미늄 등 탄소 다배출 업종부터 시작해 점차 확대될 예정이다. 재생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국내 기업은 EU 수출 시 톤당 최대 100유로의 탄소세를 물어야 한다. 대한상의 SGI 추산에 따르면 2026년 철강업계만으로도 851억 원의 CBAM 부담이 발생하고, 전체 수출 기업으로 합산하면 연간 3조 원을 넘는다. 한전이 재생에너지 요금을 올린 시점은 이 시한폭탄의 초침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급망 압력도 현실이다. 애플은 2030년까지 모든 협력업체에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도 비슷한 기준을 협력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제조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제때 확보하지 못하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도태될 수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한전의 이번 요금 인상이 단기 적자 개선에만 초점을 맞춘 근시안적 판단이라고 지적한다. 독일은 기업의 재생에너지 전환에 연간 10조 원 이상을 지원하고, 미국도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대규모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한국만 역주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삼성·SK·LG 협력업체에 다닌다면, 이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밀려날 경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재생에너지 전환 실패는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전의 누적 적자 40조 원은 결국 가계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 대상 PPA 요금 인상은 그 신호탄이다.
EU CBAM 이행이 본격화되고 글로벌 공급망의 재생에너지 요구가 강화되는 지금, 정책 방향 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구조적 경쟁력 손실이 고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