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세대론

세대적 패배감, 그 ‘어딘가’에서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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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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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다. 친구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게 마냥 부러웠던 것 같다.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그 때가 생각나곤 한다. 학원을 다닌다는 게 차라리 이런 마음이기만 했다면 마냥 좋았을 것이다. 왜 이십 대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시 학원에 다니는 걸까.

이십 대들은 대학을 취직의 일환으로 다녔음에도 ‘다시’ 취직을 위해 학원을 다닌다. 대학에서는 가질 수 없는 자격증, 일명 ‘스펙’을 쌓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이십 대들은 더욱 절망감에 빠져있는 듯하다. 그들이 준비해왔던 ‘스펙’이 이력서에 쓰이기 전에 무용지물이 된 경우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씁쓸한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사포 세대를 넘어 육포 세대 그리고 N포 세대까지. 이십 대를 지칭하는 말들은 점점 쌓여만 간다. 이십 대들은 무엇을 더 포기하려는, 아니 포기 ‘당하는’ 걸까. 

지속되는 취업난에 이십 대들의 세대적 패배감은 더욱 깊어져 간다. ‘헬조선’과 ‘탈조선’이라는 말도 이젠 낯설지 않다. 해외에서 살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 이유도 이러한 세대적 패배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들은 그것에 기꺼이 안주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가령 “나만 안되는 게 아니니까”, “지금 다 안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내 주변도 그래, 취직 안 되는 게 당연하지”와 같은 말들처럼. 패배와 절망감에 자신의 처지를 안주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에게 여느 유행 같다. 이 유행 철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세대적 패배감에 자신을 의탁하는 게 이십 대의 전형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쩌하면 좋을까? 그럼에도 자신들만의 ‘힙(Hip)한 세대적 감성’을 형성하고 있는 이십 대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힙(Hip), 세대적 감성

90년생.
88올림픽 이후 사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 때 나고 자란 세대들이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현 이십 대들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사회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체화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말이 ‘빠르다’지, ‘빠르다’라는 속도를 느낄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가 많다. 새로운 것의 출현이란 어찌 보면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갑을 없앤 지가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휴대폰에 자주 쓰는 카드를 등록해뒀기 때문에 실제로 카드를 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혹시 현금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ATM기 전용 입출금 카드가 휴대폰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다. 이 같은 변화는 소비의 형태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편의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굳이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지 않는다. 스스로 휴대폰을 포스기에 가져다 대면 그게 결제의 끝이다. 이젠 직원들도 이 행위에 익숙해져 있는 눈치다. 

이는 더치페이 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다 함께 식사를 한 후, 한 사람이 총 결제를 한다. 그럼 남은 사람들이 총 결제를 한 사람들에게 돈을 계좌이체 한다. 이 과정은 다들 마음만 맞으면 5분도 안 돼서 가능한 일이다. 계좌이체도 휴대폰과 지문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도 이미 등록해둔 카드나 가상계좌로 결제를 완료한다. 이전에 했던 결제 기록이 있으면 정말 지문 하나로 끝날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빠르고 간편하며 쉬운 과정’이다. 어떻게 하면 빠르고도 간편하게 일상적 일 처리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여러 간편 앱(App)이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이유도 ‘빠르고 간편한 과정’을 추구하는 세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대는 새로운 것에 빠르게 익숙해질수록 자주 뒤를 돌아보는 것 같다. 이십 대들은 흔히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 “와 진짜 힙하다!”라고. ‘힙하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힙하다’는 영어인 ‘Hip’과 동사인‘-하다’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으로 그 뜻은 ‘개성적인’ 혹은 ‘트렌디함’으로 정의되곤 한다. 일종의 형용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그저 ‘개성적인’ 혹은 ‘트렌디함’으로는 정의내릴 수 없는 이십 대만의 ‘세대적 감성’이 담겨있다. ‘힙(Hip)’이라는 개념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십 대가 ‘힙하다’라고 칭하는 것들은 구체적인 공통분모를 상정하기 힘들 정도로 범위가 넓다. 하지만 예를 하나 들어볼 수는 있다. 

가령 이십 대들은 ‘90년대에 유행했던 패션’ 혹은 ‘90년대에 대학생들이 즐겨 입었던 패션’을 보고서 “힙하다!”라고 말한다. 이십 대들이 말하는 ‘힙한 감성’에는 어느 정도 레트로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이십 대들이 ‘힙하다’라고 말하는 패션 아이템만 보아도 오버 사이즈의 정장, 박스 티, 무테안경, 틴트 선글라스, 통 큰 바지, 짧은 앞머리, 아날로그 캠코더, 스포츠 브랜드의 헤어밴드 등등, 레트로적 요소가 가득하다. 대중적이고도 평범한 패션은 아닌,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무심하고도 자유로운 감각을 ‘힙하다’라고 일컫는 것이다. 

무심하지만 자유로운 듯한 감각은 과거를 경유하고서야 완성에 가까워진다. 왜일까? 이는 과거 한가운데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현재를 사는 내가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시대만의 현시적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자체로 그 시대는 이미 개성적이다. 이십 대는 이러한 향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긴다. 어찌 보면 향수라는 감각조차 패션화하는 것이다. 향수를 패션화하는 것이 이십 대만의 세대적 감성이라면, 이를 일컫는 말은 ‘힙하다’가 될 것이다. 

이십 대는 무언가에 재빠르게 익숙해진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거의 것을 찾고, 색다르게 공감하며, 다시 패션화한다. 신문명이 당연할수록 도리어 문화적으로는 과거의 것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십 대들에게 ‘SNS 메신저’보다 ‘삐삐’가 더욱 ‘힙한’ 물건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레트로는 계속 돌고 돈다. 그러나 레트로 또한 현 시국에 맞게 재정비되고서야 그 시대에 정착이 가능해진다. 가령 향수를 패션화할 수 있는 세대적 감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비혼과 ‘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

벌써 2020년이다. 앞서 말했듯, 정말 숨만 쉬어도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문 하나로 모든 은행 업무가 가능해졌고 각종 플랫폼과 소셜미디어는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유튜브만 해도 그렇다. 유튜브의 성장은 곧 광고업계의 성장과 동일시될 수 있다. 수많은 광고가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확실히 예전보다 ‘나’의 가치와 행복을 강조하는 광고가 많아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광고의 주 타겟은 역시 젊은 층이다. 불완전한 너를 위해 이런 제품을 준비해 봤어. 온전한 네가 되고 싶지 않아? 지금의 너를 위해 투자해야지. 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너를 위해서 말이야, 등등.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코스메틱도, 여행도, 보험도, 연애도 그저 한 명의 개인인 ‘나’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뉘앙스는 매우 유혹적이다. 소셜미디어가 당연한 젊은 층에게 이러한 광고는 어찌 보면 일상과도 같다. 그래서인지 이십 대 사이에서는 소중한 ‘나’를 위해 ‘내’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고생한 ‘나’를 위해 ‘내가 나’에게 선물을 줘야 한다는 마인드를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나’의 가치를 우선할수록 ‘나’를 위한 삶의 형태를 제시하게 되고, 미디어는 그러한 ‘나’를 위해 각종 상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한다. 사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십 대에게 결국 ‘나’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한 우선순위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인드는 기성세대가 은연중에 당연시 해왔던 희생을 거부하는 양상으로 표출되곤 한다. 비혼 선언을 하는 이유도 이와 맥락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왜 비혼을 선언하는 걸까? 여기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언급되곤 한다.

_부모님처럼 살기 싫어서.
_나를 희생하고 싶지 않다. 결혼은 희생이다.
_나 혼자 살아도 충분할 것 같다.
_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_내가 원하는 공존의 형태가 아니다.
_경력 단절. 이를 위해 악착같이 공부한 거 아니다.
_취직조차 못했는데 어느 세월에 결혼을 하느냐.
_돈이 없다.

이는 주변 지인들과의 대화 및 미디어를 통해 자주 언급되는 이유들을 추려 본 것이다. 여기엔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두 가지 결이 산재해 있다. 나의 개인적 삶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경제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것.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것은 길고 긴 취업난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인 듯 하다. 돈이 없다는 것 또한 취업난의 연장 선상에 있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빈곤에 맞춰진 마인드가 아니다. 조금 더 미시적으로 내가 나를 위해 쓸 돈은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를 위해 쓸 돈은 없다는 것. 즉, 나 혼자 자유롭게 살기에는 어느 정도 괜찮지만 결혼식을 올린 후 우리가 되어 살 돈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나’를 결혼이라는 제도에 양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의 선택으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결국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관점에서도 이젠 ‘나’라는 우선순위가 투영되는 것이다. 불안정함 끝에 결국 안정을 얻었다고 해도 그 안정을 도리어 포기하는 결혼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앞으로의 젊은 세대들이 해나가야 할 고민인 듯하다.

하지만 평생 혼자 사는 것이 가능할까? 이십 대들이 ‘새로운 공존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고민의 연장일 것이다. 결혼을 원하는 이십 대들도 분명 있다. 사실 비혼을 외치는 이십 대들의 경우에도 결혼이라는 환경을 거부하는 것이지, 인생의 동반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 생각이 그저 이기적이기만 한 걸까? 이를 새로운 공존의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바라봐주면 안 되는 걸까?

김하나, 황선우가 공동으로 저술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위즈덤하우스, 2019.
에서는 4인 가족이 전형인 대한민국에서 결혼도 그렇다고 싱글 라이프만도 아닌, ‘두 사람’이 같이 살며 ‘조립식 가족’을 이루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각자 남남이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한집에 살게 되면서 겪는 공동체적 고민은 여느 가정의 형태와 꼭 닮아 있었다. 또한, 한집에 산다고 해서 꼭 허물없는 사이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동거인으로서 편하고도 존경스러운, 딱 그러한 관계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점점 ‘나’를 양보하지 않고도 가족을 찾을 수 있는 ‘적절한 거리감’이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젊은 세대들이다. 이 과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 각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공존의 방식이 갖은 형태로 출현할 것이란 건 자명해 보인다. 때문에 새로운 공존의 형태와 비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고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취준생과 대학원생의 미묘한 이십 대

이십 대는 불안정한 시기다. 다소 통념적인 이야기지만, 결국 취업준비생으로서도 사회초년생으로서도 자신의 안정감을 찾아가야 하는 시기는 맞으니 어쩔 수 없다. 그 어느 세대도 자신의 이십 대를 평탄하게 보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 2020년에는 잔인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취업난이 이십 대들을 덮치고 있다. 때문에 이 시기 이십 대들의 경험은 ‘스펙’으로, 다시 말해 취직의 연장선으로만 여겨질 때가 많다. 나만 해도 그렇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벌써 석사 마지막 학기를 맞았다. 최근 학교를 벗어나기만 하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그래서? 다음엔 뭘 할 건데?”

난 대답한다.

“아, 다음을 하겠죠?”
“그래? 그럼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이 되겠죠?”
“그 다음이 되면, 또 뭐가 되는데? 그걸 하면 뭘 먹고 사는데?”

글쎄. 
무엇이 되고 싶다고 해도 결국 그게 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꼭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언제부터 ‘직업의 이름’이 곧 ‘장래성’이 된 건지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그들이 원하는 ‘무언가’가 아닌 걸까? 마냥 이런 시기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다. 계속 저런 질문들과 마주해야 되는 시기라고. 사회와 타인들 그리고 스스로와도 말이다. 

이 불안함을 상쇄하기 위해서 이십 대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배운다. 주변 친구들만 해도 토익을 컴활을 영어 회화를 따져가며 배운다. 어디 학원이 좋더라, 어디는 일 년에 얼마를 할인해주더라, 어디 강사가 유명하다더라. 그리고 유튜브의 성황으로 취직에 관한 콘텐츠 또한 흔해졌다. 이젠 취직 관련 학원들도 그들만의 CM송을 만들어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 공시학원만 해도 늘 그렇다. 이런 학원에 지불해야 하는 연 수업비용은 일반 대학 등록금과 비슷하기도 하다.

하지만 머리를 맞대고 여러 정보를 교환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난 저 전형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같은 이십 대임에도 말이다. 회사 면접관들이 뽑은 ‘쓸데없는 스펙 목록’들만 보아도 대학원 학위가 높은 랭크에 매겨져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대학원이 취직의 일환으로 생각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나만 해도 마냥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종종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그 ‘다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엊그제 1920년대에 쓰인 시를 읽었다. 오래된 문헌을 찾아봤다. 또 시를 읽었다. 생각했다. 그렇게 밤을 새고, 다시 시를 읽었다. 종종 잡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들’이 말하는 취직의 세계는 가끔 내게 미묘한 것이 된다. 당장 이력서의 한 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그럴까? 아니면 ‘그들’에게서 타인이 되고 싶을 걸까? 가끔 품 안의 문헌들이 ‘그들’의 취직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볼품없는 생각이다. 볼품없는 생각이지만, 불안정함과 두려움이란 결국 이런 걸 따져 묻는 것이다. 난 나를 몰아세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몰아붙인 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안정적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이렇게 앓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젊음을 ‘낭비’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지 않을까?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낭비’ 끝에 취직이 목표가 되지 않는 이상 결국 ‘시간 낭비’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이십 대들이 YOLO를 외치는 것도 가끔 이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세대적 패배감 속에서 놀고먹고 쉬는 것에도 YOLO라는 이유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런 일탈조차 없으면 사회가 ‘평균값’으로 제시하는 ‘높은 스펙들’에 숨이 막히니까. 그러나 이조차도 결국 임시방편이지만 말이다. 씁쓸한 이야기다. 

스물다섯과 시

이십 대에 꼭 해야 할 일이란 뭘까? 하지 않으면 후회하는 것들이란 과연 뭘까? 듣고 자란 걸 나열하기만 해도 마치 가이드가 있는 듯 전형적인 것들뿐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것조차 하지 않고서 뭘 했냐고 물어온다. 그들이 말하는 ‘젊음’이란 정말 찬란하기 그지없다. 새삼 두려워진다. 다들 즐기고 살았던 걸까? 정말, 나만 이렇게 정체되어있는 걸까? 회상된 찬란함은 나의 스물다섯을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곤 한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지나갔음에 부여된 가치란 지나 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그 가치를 어떻게 체감해야 될까? 살갗에 와 닿는 젊음은 내 것이 아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내고 있음에도, 결국 웃으며 이를 ‘낭비’라고 칭하는 자신이 있다. 내 젊음에 내가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디 사회적인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대외적인 젊음이란 결국 입맛대로라 간혹 거북한 것이 된다.

‘어리다’와 ‘젊다’는 또 다르다. 대학원에 입학한 후 줄곧 막내였던 내게 ‘어리다’와 ‘젊다’라는 감각은 각각 다른 것이었다. 젊다는 것은 장점이었지만, 어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단점이었다. 하지만 굳이 공통점을 들자면 어리든 젊든 결국 타인에 의해 정의 당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두 내가 정의한 것은 아니다. 젊어서 그렇지, 어려서 그렇지..., 살갗에 주어진 스물다섯에 관해 스스로는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 느낌이다.

종종 물어들 온다. 어째서 시를 전공하기로 했느냐고. 친구들은 간혹 그런 이야기를 한다. 시를 하는 내내 더 우울해진 것 같다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굳이 시를 하는 이유를 물어온다면, 솔직히 ‘모르겠어서’이다.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저마다의 리듬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시를 쓴 시인, 시를 읽는 시인 그리고 어느 누구도 시를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도피는 아니다. 사실, 처음엔 도피가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호함 속에서 도리어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곤 한다. 무엇에 웃는지, 무엇에 우는지, 왜 슬퍼하는지, 또 기뻐하는지, 스물다섯이 무엇인지. 정의되지 못하는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마주하는 것, 이 쾌감으로 몇 달은 더 살 수 있다. 

간혹 시를 어려운 것으로만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고,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어오는 말들.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것에 관한 거부감 그리고 두려움. 중요한 오지선다의 답이 아님에도 말이다. 쉴 새 없이 정의하고 정의 당하며 명확한 답을 요구 당한 그들에게, 정의되지 않음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저마다의 젊음을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는 ‘어딘가’를 상상하게 할 뿐 걸어가고, 알아가고, 당도하는 것은 나다. 애증의 친구가 생긴 기분이다. 이런 마음을 마냥 어리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음을 즐기는 방법이 곧 각자의 것인 것처럼 달력을 보듯, 앨범을 보듯, 걷고 뛰듯 시를 읽을 분이다. 마주 보게 만드는 것은 큰 힘이라 믿는다. 나에게 이것이 이십 대로서의 ‘그 다음’이다.

세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