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그라스의 '진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50년을 맞이한 1995년, 일본과 독일의 두 추축국 출신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大江建 , 1935-귄터 그라스 Guinter Grass, 1927~2015는 전쟁 종결의 의미를 둘러싸고 모두 여덟 편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1995년 4월 12일자로 발신된 귄터 그라스의 서간에는 “소련군이 오데르der강 전선을 돌파해 독일군과 베를린 공방전이 펼쳐졌을 무렵”, 독일군이 철수한 마을 곳곳에서 “나는 겁쟁이입니다” 라는 마분지를 목에 걸고 대로변 나무에 매달려 있던 독일군 탈영병의 사체를 소년병으로 목격했던 자신의 전쟁 체험담이 담겨 있다. 귄터 그라스는 독일에서 여전히 '겁쟁이' 취급을 받고 있던 90년대에 이들 탈영병을 나치의 범죄행위를 거부한 '영웅'이라 치켜세우며,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된 모든 사람들은 이들 탈영병들, 즉결재판으로 총살된 사람들,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들을 존경해야 마땅하다”라고 맺으면서, 앞으로 “일본에서도 탈영병들의 명예회복 요구가 거세질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독일과 일본의 전쟁 체험과 이의 계승, 기억을 둘러싼 언설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탈영병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특히 일본 사회에 던진 소중한 지적이었다. 이후 귄터 그라스는 자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2006)에서 두 가지 삽화를 더한다. 하나는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목격담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나치의 무장 친위대 Waffen-SS에 복무했다는'자기 폭로'였다. 이에 앞서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 『게걸음으로』(2002)에서 1944년 1월 30일에 소련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 Wilhelm Gustloff호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으로 동프로이센에서 탈출하려던 독일인 피난민 약 1만 명이나 희생되었지만, 이 사건은 독일 사회에서 오래 동안 금기시되었었다. 동독에서는 가해자가 소련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서독에서는 이 사건이 독일의 피해자성을 드러내 독일의 가해자성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로 비추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 친위대였다는 '고백 아닌 고백에 더해, 독일의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이 작품 때문에, 귄터 그라스는 우익으로 전향했다는 비난에 휩싸이기도 한다. 일찍부터 사회민주당을 지지하고, 나치와 독일 내셔널리즘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가해 책임을 강조해왔던 귄터 그라스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비추어볼 때, 1990년대 이후의 '진화'는 다소 이례적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진화'가 귄터 그라스 개인의 '변심'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독일의 '나치 대면하기의 자장권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와 독일 통일(1990) 이후, 독일의 '나치 대면하기'는 '포괄성inclusiveness'의 성격을 지닌다. 포괄성'은, 빌 니벤 Bill Niven.의 논점에 따르면, 피해와 저항(레지스탕스)의 범위 및 성격 확장을 뜻한다. 피해(자)의 범위는 유대인에 더해, 동성애자, 장애인, 신티 로마 같은 소위 '잊혀진 피해자forgotten victims'로 확장되었고, 그리고 전시반역죄 등으로 처형되거나 복역한 독일군Wehrmacht 탈영병에 대한 최종적인 복권(2009)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포괄성'으로 영화 <작전명 발키리 Valkyrie(2008)로 유명해진 히틀러 암살 사건(1944.7.20)의 주역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Claus von Stauffenberg, 1907~1944 등이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백장미단의 조피 숄Sophia Scholl, 1921~1943 남매 등과 같은 비사회주의적 레지스탕스뿐만 아니라, 나치에 반대한 사회주의 운동도 독일 통일 후에 레지스탕스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베를린 중심가에 자리한 1993년에 개축되어 통일독일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노이에 바헤Neue Wache나 1994년에 새롭게 개설된 독일 레지스탕스 기념관 German Resistance Memorial Center은 통일 독일의 '포괄적' 역사 해석을 대표한다. 물론 “우리(독일인)도 싸웠”고 “우리(독일인)도 피해를 입었다”는 해석, 즉 독일인의 저항과 피해를 강조하는 역사 해석은 유대인 피해(자)의 절대성을 상대화시켜 독일의 가해자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등장한다. 그러나 베를린 중심가에 자리한 속칭 '홀로코스트 기념비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와 '신티 앤 로마 희생자 기념비Memorial to the Sinti & Roma Victims of National Socialism’우여곡절을 거쳐, 2005년과 2012년에 각각 건립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치와 대면하기와 통일 독일의 역사 해석이 가해·피해, 협력 collaboration 저항의 교착점에 자리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포괄성'은 독일에게 '정상성 Normaley' 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정상성은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의해 제약받았던 독일이 국가로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포괄성'과 '정상성'은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기반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부의 전략'이라 볼 수 있다. '자부의 전략'의 핵심은 나치에 가담했던 가학의 과거를 '자학사관'으로 재단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도 저항했고 우리도 피해를 입었다는 역사 해석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데 있다. 울리히 쉬미트Ulrich Schmid는 피해자로서의 역사적 경험이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성이 '정체성 정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역시 여기에 “우리도 싸웠다”는 신화가 더해지지 않으면 '자부의 전략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적 정당화가 '네이션 빌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 빌 니벤의 지적을 상기해보면, 역사 해석과 발굴을 통한 이런 피해 저항의 외연 확장은 정체성 정치라는 차원에서 통일 독일이 나치의 망령'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발돋음하기 위한 기반을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유럽은 정체성 위기에 빠져 관련(피해, 가해, 협력, 도피, 저항) 때문이다. 전후에 나치=악惡이라는 내러티브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 악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가 전후 정체성 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프랑스는 피해와 저항을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 연루 협력의 무게를 가렸고, 덴마크,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은 역시 피해 · 저항을 앞세워 연루를 면해갔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파르티잔 투쟁에 더해, 해방군 소련의 도움을 강조함으로써 나치와의 연루를 벗어나려 했다. '중립'을 택해 전화戰禍에서 벗어나 있었던 스웨덴은 전쟁 말기에 덴마크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유대인을 스웨덴으로 무사히 탈출시킨 '하얀 버스White Buses’나 ‘위조여권을 만들어 헝가리 유대인을 무사 탈출시킨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 Raoul Wallenberg, 1912~1945의 사례를 앞세워, 나치에 협력했던 역사의 치부를 덮었다. 스웨덴 언론인 토르그뉘 세겔슈테트'Toryny Segerstedt, 1876~1945의 전기를 흑백으로 담은 영화 〈마지막 문장The Last Sentence〉(2012)에는 중립적 '소국 리얼리즘' 외교의 성공 이야기에 가려져 있던 스웨덴의 '은밀한 친親 나치의 실태가 날것으로 드러난다. 미즈노 히로코가 이른바 '피해자 신화를 통해 정체성을 세우려 했던 전후 오스트리아의 역사인식을 희생자 내셔널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총괄한 것처럼, 오스트리아의 피해자 신화는 적어도 유엔 사무총장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쿠르트 발트하임 Kurt Waldheim, 1918~2007이 나치의 정보장교였다는 사실이 있었다. 나치와의 폭로되어 국제사회로부터 맹비난에 휩싸일 때까지 오스트리아의 정체성 정치에서 핵심을 이루었다. 이렇게 보면, 유럽 각국의 전후 정체성 정치의 핵심은 나치와 얽혀있던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였고 이는 대체로 피해와 저항이라는 두 가지 내러티브를 통해 형태를 갖추어갔다고 볼 수 있다.

'전후에 만들어진 일본의 전쟁 '신화'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했을까? 일본에 독일 같은 저항 기념관이 있는가? 혹은 피해자의 포괄성을 명기한 기념관은 존재하는가?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없다. 일본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도 '발키리'도 없다.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적 사실의 존재를 전후에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저항 · 피해의 기억이 전후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일본의 저항 피해의 역사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치안유지법(1925~1945) 문제이다.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94명이다. 병사로 옥사한 사람은 1,503명이다. 체포된 사람은 수십만이고, 검사국에 송치된 사람은 68,274명이며, 기소된 사람은 6,550명이다. 1968년에 설립된 '치안유지법희생자 국가배상 요구 동맹은 사죄, 배상, 진상규명을 담은 치안유지법 국가 배상법(가칭)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이 단체의 움직임이 구체적인 결실은커녕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킨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또 하나의 사례는 소위 '요코하마사건' 이다. 1942년 종합잡지 『가이조 등에 게재된 호소카와 가로쿠川大, 1888-1962 의 글이 '공산주의 적이고 친소적이며 정부 비판적'이라는 혐의를 받아, 모두 약 60명이 체포되고 이 중 4명이 옥사한 사건이 바로 요코하마 사건이다. 2005년에 재심이 개시되었지만, 결국 죄의 유무를 판단하지 않고 재판을 종결하는 면소 판결이 내려졌다.

치안유지법과 요코하마 사건 이외에도 메이지 유신 이후,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당한 일본인 저항자 · 희생자들이 존재한다. 대역사건(1910), 도라노몬 사건(1923), 가네코 후미코 사건(1925) 같이 천황가와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간토 대지진 중에 학살당한 오스기 사카에 사건, 1920년대부터 반복된 일본공산당 탄압 사건, 그리고 인민전선 사건(1937~1938) 등과 관련해 적지 않은 저항자·희생자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사건들에 대한 진상조사, 재심, 배상은커녕, 그런 시도조차 공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항 · 피해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저항의 역사를 전후로 이어내려는 시도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즉 문제의 핵심은 전전이 아니라, 전후에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천황제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일본의 저항이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평가의 문제이다. 실제로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저항운동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규모 전향 사태에 휩싸이거나 감옥에 갇혀 실질적인 정치과정에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당시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자력으로 '승리'를 쟁취한 나라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을 빼놓으면 그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이들 강대국조차도 자력만으로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독일은 자력해방은커녕,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함으로써 나치를 단죄하고 민주주의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자력 해방, 혹은 이에 준하는 활발한 레지스탕스 활동만이 저항/피해의 기억을 전후로 이어가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실마리는 앞서 말한 귄터 그라스의 서간에 대한 오에의 답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답신에서 일본군 탈영병을 소재로 삼아 발표한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19588 라는 작품이 전시기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보편적인 인간관의 관점에서” “탈영병의 명예회복을 위한 당신의 제안은 국경을 넘어서 유효하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일본의 특수성'을 말한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오에 겐자부로 유숙자 옮김芽むしり仔撃ち大江三郎 문학과지성사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오에 겐자부로 유숙자 옮김芽むしり仔撃ち大江三郎 문학과지성사

 

 

 

우리나라(일본 - 인용자]에서는 탈영병의 처형과 명예회복이라는 과제가 표면화한 적은, 아마도 탈영병 수가 적어서인지 이것 자체에 일본인 고유의 문하 이 자부로 유자 역, 새싹 하극은 제점이 있는 것이지만 - 지금끼지 없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조는 인용가)

여기서 오에는 다음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일본에서탈영병 문제가 과제로서 표면화된 적이 없으며, 둘은 이는 탈영병의 절대적인 수가 적었기 때문이고, 셋은 이같이 탈영병 수가 적은 이유는 “일본인 고유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에의 논리를 인과관계로 엮으면,일본인 고유의 문제점 → 적은 탈영병 수 → 명예회복의 부재라는 순서를 밟는다. 일본인 고유의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오에는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천황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상명하복의 봉건적 전통을 지칭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봉건적공동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후진성을 설명할 때, 곧잘 동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런 오에의 시각은 '옥쇄/산화華로 형용되는 일본군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하지만 이런 인과관계가 사실일까?

일본군 탈영병의 규모는 공식적으로 조사되거나 발표된 적은 없다. 하지만 오에 시노부江志乃天에 따르면, 탈영 등을 포함한 육군형법위반사건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7,908건에 이른다. 가장 많은 탈영병이 나왔을 것으로 예상되는 1945년을 포함하게 되면,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탈영병 규모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오에의 '해석'은 실제로탈영병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일본군에는 탈영병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던 '전후의 신화, 즉 '옥쇄/신화'라는 전후의 역사 해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같은 역사 해석, 즉 '옥쇄/산화'로 표상되는 무항복주의가 일본문화의 특질, 오에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인 고유의 문제"로 보강되고 재생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진훈」에 대한 해석에서도 그 같은 문0제가 드러난다. 『전진훈은 1941년 당시 육군戰,*장관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1884~1948가 일본군의 규율 강화를 위해 배포한 일종의 실천 강령집이다. 이 책자에 실려 있는 “수치를 아는 자는 강하다. 언제나 향당가문鄕家門면목을 생각하며 확실히 힘을 다해 그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받지 말고 죽음으로써죄화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아라" 라는 구절은『전진훈항복을 거부하고 산화/옥쇄를 선택한 일본군의 행동을 설명하는 문화적요인으로 곧잘 인용된다. 하지만 보수파 작가 야마모토 시치헤이,1921-1991가 자신의 군생활을 바탕으로 발표한 책에서 『전진훈이라는 책자는 들은 바도 없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일본군의 행동을 반드시 『전진훈의 세뇌 결과로 해석하는 데는 일정한 유보가 필요할 듯하다. 또 '향당가문'이라는 말은 자신이 항복을 하게 되면, 고향에 남아 있는 집안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옥쇄/산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즉 자신을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종의 봉건적 연좌제를 뜻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독일군도 일본군 이상으로 '지펜하프트Sippenhaft, 즉 일종의 연좌제를 탈영/저항 방지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연좌제가 반드시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었다는 점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의 사례가 '특수' 하다고 할 때 역사적 실태로서 '특수' 했다기보다는 특수하다고 함으로써 '특수'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특수가 경우에 따라서 '특수'라는 이름하에 경계를 높고 강고하게 쌓아올려 '특수'를 확대재생산함으로써, '보편'을 비가시화하는 가림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문화적 기제를 통해 일본군의 탈영·반항·도망.등의 역사적 사실이 저항 · 피해의 범주에서 사상象되어버림으로써 저항과 피해의 기억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단순화시키면, 저항 · 피해의 여지가 없어진 것은 전전이 아니라 전후이다.

가해자 없는 피해(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후 일본의 전쟁 해석에 피해(자)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느 지역보다 강한 피해자 의식이 일찍부터 전후 언설을 지배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피해(자) 언설의대종을 이루는 것은 대체로 주로 중국전선 및 동남아시아에서 펼쳐진 전쟁, 그리고 시베리아 '억류', 패전 직후의 이른바 '히키아게 1153 [수], 그리9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및 공습 경험 등이다.

그런데 독일의 피해(자) 자기규정과 일본의 그것은 다르다. 논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피해라는 말은 가해자 혹은 적을 특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가해자, 혹은 적이 누구인지를 특정하지 않으면 피해자로서의 자기규정은 논리적 완결구조를 지닐 수 없다는 뜻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나치를 신봉하고 히틀러를 여전히 떠받드는 극우신나치를 제외하면,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한다는 것은 나치를 가해자로 규정한다는 뜻이 된다. 동유럽에서 강제로 추방되었거나 전쟁포로의 가혹한 생활을 겪은 독일인들에게는 소비에트 연방이 또 하나의 가해자였고, 이 같은 소련 사회주의 '체험'이 동서독의 역사적인 정체성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기본적으로 동서독 모두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할 때, 나치가 공통의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차이는 없었다. 물론 동독은 서독을 나치와 다름없는 파시즘으로, 서독은 동독을 나치와 다름없는 전체주의로 각각 규정하였지만, 어느 쪽이든 나치를 적=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즉 나치와의 거리가 자신들을 전쟁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규정하는 일종의 가늠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후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할 때, 가해자는 누구를 특정하는 것일까? 미국? 하지만 미국을 가해자로 규정하는 경우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이 투하한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에 대해서도, 나가사키 피폭(8.9) 직후에 스위스 정부를 통해 미국에 전달한 항의문(8.10)과 이른바 '항복선언문'(8.15)에서만 미국을 가해자로 규정하고 있다. 귀축영미英美를 부르짖었던 전전 파시즘 체제에서 이루어진 미국=가해자 규정을 제외하면, 소위 '평화주의'를 자임한 전후의 일본정부가 미국정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원폭투하에 대해 항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일본의 전후 번영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 관계는 두 가지 경로이다. 안전보장 차원에서는 미일동맹이고, 또 경제적 차원에서는 수요흡수지로서의 미국의 존재이다. 과거에 적이고 가해자였던 미국에 의존해 전후의 번영이 시작되고 그 번영이 이어지고 있으니, 피해(자)의 분노는 갈 자리도 설 자리도 없어진다. 그래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게 된다.

남은 길은 독일과 같은 길이다. 즉 앞서 말한 대로 독일의 나치가 전후 독일의 공통의 적이고 가해자였던 것처럼,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전후 일본의 공통의 적이고 가해자라는 전제가 전후 공적인 영역에서 받아들여지게 되면 독일과 비슷한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같은 길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도쿄재판에서 단죄된 A급 전범이 전후 국제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가해자라는 공적 해석이 계속해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천황을 단죄하지 못하고 아시아의 피해자를 고려대상으로조차 삼지도 않은 도쿄재판의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군 점령에서 벗어나자마자, 중의원은 '전범 수형자 석방 결의안을 두 차례(1952.12.9·1953.8.3) 채택하였고, 이에 더해 1953년 8월에는 전범 가족(유족)에 대한 연금 지급이 가능하도록 원호법을 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 전범들은 1956년 3월 31일까지 전원 석방된다. 그 최종적인 완성판은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 1896~1987 의 수상 취임이었고 A급 전범의 야스쿠니신사 합사(1978.10.17)였다. 그것도 소위 '쇼와 순난자昭和殉難’, 즉 희생자로서의 지위를 통해서이다. 

미국을 가해자로 특정하지 못하는 전후, 그리고 천황제 파시즘을 가해자로 특정하지 못한 전후가 형성되면서 전후 일본의 공통된 피해(자) 의식은 가해자 없는 피해(자) 의식'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가해자 없는 피해(자)의식'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전쟁 일반을 가해자로 상정하는 '평화주의'가 언설권을 장악한다. 일본정부의 공식 성명서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른바 '부전戰의 결의'는 이 같은 사정을 반영한다. 전쟁 일반을 '악'으로 규정하는 '가해자 없는 피해자 의식'은 헌법 9조의 비무장평화주의가 담고 있는 절대 평화주의의 이념과 결합되면서, 전후 평화주의 언설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의 전후는 비무장을 담은 헌법과 자위대 주일미군이 동거하는 '평화 없는 평화주의'에 더해, 역사 인식에서는 '가해자 없는 피해자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와 전쟁

1945년 8월 15일 이전과 이후를 일본에서는 '전전'과 '전후'라 나누어 부른다. 전전은 전쟁이 있기 전, 혹은 전쟁의 시대를, 전후는 전쟁이 끝난 후를 지칭하지만, 이를 전전과 전후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전쟁의 유무를 포함한 가치체계의 전도가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치체계의 전도란 민주주의의 도래를 뜻한다. 즉 전쟁의 종결은 곧 파시즘의 종결이며, 전후의 시작은 곧 민주주의의 시작인 셈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로서의 전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민주주의가 일본에 체제로서 '수입되어 자리를 잡게 된 계기가 미군점령기에 미국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만화가 가토 에쓰로加藤悅郞, 1899~1959가 그린 유명한 풍자만화에 등장하는 말을 빌리자면, 당시의 “민주주의혁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다. 이 민주주의의 내재성/주체성의 부재라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민주주의의 계기를 내재적 힘에 연결지어 설명하려는 '고육지책'이 등장하게 된다. 마쓰모토 시게하루松本重治의 개념을 차용한 나카무라 마사노리의 마케타 민주주의', 즉'전쟁에 패함으로써 쟁취한 민주주의'나, 존 다우어John Dower의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mocracy' 같은 형용과 논리는 미군정에게서 주어진 민주주의의 계기를 그 후의 민주주의의 번영으로 연결지으려는 시도였다면, 1950년대부터 본격화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발명'이나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연구는 전후의 민주주의의 계기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일본 민주주의의 계기가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1945년 8월 15일을 전후로 해서, 마루야마 마사오 山真男, 1914-1996가 말하는 '무혈혁명'을 통해 가치체계의 전도가 일어났다면, 당연히 피해자를 준별하고 이 피해가 국가권력에 의해 어떻게 자행되었는지, 그 피해의 실태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배상/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이른바 '이행기의 정의'와 같은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을 가운데 두고 이를 전전과 전후로 나누는 시점에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시점은 투영되어 있어도, 또 전투행위의 유무라는 평화주의'의 관점은 투영되어 있어도, 전쟁과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가져다준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시점은 말소되어 버렸다. 이 말소가 결과적으로 침략과 전쟁 피해자를 국가/민족 간으로 구분하고, 이를 국가 대 국가의 대립 구도로 전환시켜, 일본인 피해자를 일본이라는 국가의 틀 안에 가두고 이들의 소리를 봉쇄함으로써 이들 일본인 피해자와 아시아의 피해자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박탈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