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실무 수습 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꽤나 인기 있는 곳에서 실무 수습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이력서에 본인의 신장·체중·취미·특기·종교, 가족의 출신 학교·직업·근무처·직위를 쓰라고 돼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왜 이런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냐’, ‘원래 그렇다, 초보처럼 굴지 말아라’, ‘취직 처음 하냐’ 등등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며칠 고민했다. ‘직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옳은가. 관행적으로 해왔던 일이니 그냥 수긍해야 할까’ 접수 마감일쯤,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렸다.
부모님 대학도 쓰라고 한다면서요. 우리 어머니는 초졸입니다. 제가 나이가 많은 건 아닌데, 그리고 늦둥이도 아닌데 초졸입니다. 삼촌 대학 보내겠다고 여자들은 일만 했다네요. 새삼스레 여기 적을 만큼 희귀한 일도 아니죠. 저 키우시는 데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셨죠.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못 배운 한이 있지만 저한테 결코 대학이나 학벌 등을 강요하지도 않으셨고요. 그냥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믿고 응원해주셨죠. (중략) 어머니 대학을 묻는 일자리가 나온다면 전 초졸이라고 쓸 겁니다. 제가 어머니의 결단이자, 얼굴이죠. 왜 묻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시대에 좋은 대학 나온 사람 얼마나 되려고요. 초졸이라 쓸 겁니다. 부끄럽지도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그걸 보고 혹시라도 우리 어머니에 대해 조그마한 편견이라도 갖게 될 사람들 때문에 역겹네요.
그 사람은 이런 곳에는 지원하지 않겠다며 글을 마쳤다. 지원하고 싶었던 곳이라 한참을 더 고민했다. 작성한 이력서를 삭제하고 이곳을 상대로 민원을 제기했다. ‘직무 능력과 관련 없는 개인 정보를 요구하지 말라. 개인의 신체적 특징과 종교적 신념을 알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부모의 능력에 따른 차별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출신 학교·직업·근무처·직위까지 요구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한 달 후 이력서 변경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고, 이력서에서 문제 삼았던 부분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곳은 ‘모두가 훈훈한 새 지평의 법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이다. 변호사 실무 수습자를 모집하면서 불필요한 개인 정보를 요구한 것이다. 국민의 인권 보호에 가장 민감해야 할 법률구조공단조차 개인 정보 수집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이곳이 끝이 아니었다. 변호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지방 변호사 협회에 등록해야 한다. 등록 준비를 하며 서류를 살폈다. ‘별첨’이라고 되어 있으나, “상세히 기재”하라고 안내된 ‘현황 자료’에는 ‘본인의 신장·체중·혈액·종교·재산(동산, 부동산, 주거형태), 가족의 직업 등’을 기재하게 되어 있었다. 주변 변호사들에게 ‘이 부분을 어떻게 작성했느냐’고 물으니 ‘왜? 그냥 작성했지’라고 답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둥글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부당한 개인 정보 수집이었다.
소심하게도 몇 달을 미루다가 최소한의 개인 정보만 적고 등록서류를 제출했다. 지방 변호사회 직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가족 관계’만 써달라고 했다. 나의 부모님이 궁금한 것일까? 아내와 6개월 된 아들의 이름과 생일만 적었다. 거부했어야 했는데, 소심했다. 법조인들이 중심인 법률구조공단이나 각 지방 변호사회조차 관행적으로 불필요한 개인 정보를 요구한다. 그러곤 다른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답안지 작성하듯이 빈칸을 채워나간다.
2014년 벽두부터 카드 3사에서 1억 건에 달하는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았느냐”고 발언했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진보네트워크센터 구성원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개인 정보를 다 적지 않으면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제부총리의 발언은 서민들과는 달리 저 높은 곳에 사시는 분의 전형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한국의 잘못된 개인 정보 수집 관행과 엉망인 보안 시스템으로 인한 잦은 유출은 구조적인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 ‘개인 정보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기업을 전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균 1억 건이 넘는 개인 정보 유출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거나 과거 있었던 정보 유출 사태 때마다 내놓았던 대책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은 개인 식별 수단이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을 믿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은 개인 정보를 다루면서 여전히 ‘효율성’을 앞세우고 있다. 개인 정보 유출과 관련한 각종 토론회에서 유일한 반론이 효율성이다. 그러나 이 효율성은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사고가 터졌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다. 스스로 챙겨야 한다. 모든 시민이 자기 개인 정보를 쉽게 넘겨주지 않고 그것이 과연 필요한지, 정당한지 하나하나 따져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효율성’과 ‘안전’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 한국 사회가 아직도 효율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사회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개인 정보 유출 사고가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가 돈이고 권력이기 때문에 개인 정보 유출은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한다. 다만 한국은 조금 특수한 상황이다. 주민등록번호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을 신뢰할 수 없으니 개인이 자기 정보를 챙겨야 하지만, 이미 유출된 정보, 특히 주민등록번호는 반드시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를 ‘만능열쇠’라고 부른다. 거의 모든 개인 정보가 주민등록번호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1991년 주민등록 전산망이 가동되었다. 가동을 앞두고 공공 기관의 정보화 촉진과 정보화 관련 정책 개발 및 지원을 주 업무로 하는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사회진흥원)은 다음과 같은 우려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개별적으로 개발된 여러 정보 시스템을 종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가 심각해진다. 같은 자료라 하더라도 개인에 관한 자료가 분야별로 서로 다른 여러 책자에 수록되어 여러 부서에 분산되어 있는 경우 이를 한곳에 소집하여 종합하는 작업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있는 경우 개인의 주민등록번호만 입력하면 분산 수용되어 있는 각 데이터베이스에서부터 개인의 자료가 순식간에 한곳으로 모이게 된다. 이것이 전산화된 기록이 갖고 있는 프라이버시 보호 상의 문제이다.
공공 분야, 민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된 주민등록번호는 정보화 사회와 맞물려 모든 개인 정보를 연결하는 ‘만능열쇠’가 되었다. 게다가 주민등록번호는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개인 정보를 변경하더라도 추가 유출이 발생한다면 주민등록번호를 매개하여 유출된 정보들이 재구성된다. 개인 정보 불법 유통업자와 해커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해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가 중심에 놓인 개인 정보 연결망을 끊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자기 정보에 대한 결정권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C방 이용료를 할인받으려고 회원 가입을 할 때조차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한다. 1991년 주민등록번호가 전산화된 후 2014년까지 1차 유출만 4억 건이 넘는다. 2차, 2차, 4차 유출을 합치면 얼마나 유출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계속된 개인 정보 유출 사태에 주민등록번호는 항상 포함되어 있다. 전 세계에 유출되어 회수할 수 없는 현재 주민등록번호를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개인 정보 유출 사태 이후 국회에서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을 위한 토론회가 수차례 열렸다. 대부분 전문가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에 반대하지 않는다. 토론회는 항상 화기애애하다. 반대하는 토론자를 구하기가 힘들다. 어렵게 섭외한 정부 관계자도 검토 중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 방향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개인의 생년월일·성별·출생 지역이 포함되지 않은, 아무런 의미 없는 임의의 숫자로 바꿔야 한다. 주민등록번호에 기본적인 개인 정보를 담은 것은 주민등록번호 생성 시 중복을 막기 위해서다. 행정망이 전산화되기 이전에는 발급된 주민등록번호와 중복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주민등록번호 구성은 나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 정보화 사회에서는 무작위 숫자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더라도 중복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둘째,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경우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 당연한 요구다. 왜냐하면 주민등록번호는 개인의 번호이기 때문이다. 현행 개인정보 보호법에서도 주민등록번호를 개인 정보로 분류하고 있다. 공사익의 균형을 위하여 아무 때나 변경할 수는 없겠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경우에는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 정보 주체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주민등록번호보다 중요한 개인 식별 수단은 이름이다. 개명은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가능하다. 성명학적인 이유로도 이름을 변경할 수 있다. 주민등록번호 유출로 명의도용 등의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조차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금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셋째, 공공 분야에서 주민등록번호의 사용처를 한정하고 목적별 번호제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처럼 주민등록번호가 다양한 곳에 쓰인다면 무작위 숫자로 새로운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재유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개인 정보의 연결자 역할을 하는 주민등록번호는 그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는 주민등록 사무 등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조세, 연금, 의료 분야별로 목적별 번호를 사용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와 다른 정보 간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면 개인 정보 불법 유통업자와 해커들이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할 이유가 없어진다.
넷째, 민간 분야에서 주민등록번호 사용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 민간 분야에서 주민등록번호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것은 기업이 주민등록번호를 중심으로 다른 개인 정보를 통합하여 고객을 관리할 수 있고 편리하게 채권 추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 관리나 채권 추심은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지만, 그동안 기업은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면서 거의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고 개인 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부담했다.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 방향과 개편 후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기 위한 토론회를 진행하면서 많은 전문가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이 ‘한국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주민등록번호로 상징되는 국가가 통제하는 단일 번호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인이 개인 정보의 통제권을 회복하는 길이고 이는 제1세대 인권인 자유권 회복의 첫걸음이다. 제2세대 인권인 사회권과 제3세대 인권인 연대권을 논의하는 상황에서 제1세대 인권인 자유권의 회복이라니 이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사생활과 개인 정보를 보호하는 것은 자유권의 시발점이며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이다. 국가권력과 사적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영역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밑바탕이다.
현재 정부는 법률의 통제하에 또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주민등록번호’, ‘지문’, ‘DNA’, ‘차량 번호 정보’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추가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둔감하기도 하다. 이미 다 유출된 정보라서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넘겨지지 않은 정보도 있다. 그중에 개인의 생체 정보가 특히 중요하다.
지문 정보는 이미 정부가 보호하고 있으므로 지문 날인에 둔감하기는 하다. 그러나 생체 정보 제공에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경찰에서 수사를 받으면 조서를 작성하고 통상적으로 지문을 날인한다. 지문 날인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도장을 꼭 챙겨 가자. 조서에 반드시 지문을 날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도장을 찍어도 무방하다. 다만, 조사가 끝나고 수사자료표 작성 시 지문 날인은 조금 문제가 된다. 거부하더라도 경찰이 지문 날인을 위해 영장을 청구한다. 이 경우 법원에서 관행적으로 영장을 발부해주기 때문에 대부분 결국에는 지문 날인을 해야 하지만, 영장을 기다리는 것도 부족하나마 한 가지 방법이다.
지문 정보는 이미 정보가 보유하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DNA 정보는 상황이 다르다. 아직 정부는 일부 범죄자들의 DNA 정보만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디엔에이신원확인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 법률에 해당하는 몇 가지 범죄를 제외하고는 국민의 DNA를 강제로 수집할 수 없다. 다만 정보 주체의 동의가 있으면 범죄 범위와 관계없이 DNA 정보 수집이 가능하다. 수사 과정에서 DNA 정보를 요청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요구에 절대 응해서는 안 된다. 영장을 청구한다고 하면 영장이 나오고 나서 응해야 한다. 지문 정보와 달리 고민할 사항이 아니다. DNA 정보는 개인 정보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정보도 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개별 데이터베이스를 손쉽게 연동할 수 있다. DNA 데이터베이스는 아직 개별 데이터베이스로 존재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데이터베이스의 통합은 자유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예속된 존재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고자 한다면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개인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긴장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 정보화 사회가 시민의 족쇄가 될지 해방이 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신훈민
활동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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