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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 이전과 이후를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코로나 19’는 실로 맹렬하고 집요한 사신(死神)’이었다. 지구상에 코로나 19의 안전지대는 없다고 단언될 정도로, 바이러스의 생존기는 끈질겼다. 중국에서 처음 보고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아 전 지구를 집어삼켰다. 동양인 병이라고 냉소하던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멈췄고, 이어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가 멈췄다.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피부색이나 그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또 어떤 민족이며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숙주로서의 인간을 집어삼킨다. 많은 국가에서는 전시를 방불케 하는 지역 봉쇄령과 각종 금지령을 내려야 했다. 감당할 수 없는 환자들 때문에 의료 시스템이 붕괴된 국가도 속출했다. 시신이 거리에 방치되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세대가 경험한 적 없는 지독한 악몽, 21세기의 새로운 디스토피아(dystopia)’가 눈앞에 창궐했다.

 

악몽은 전염된다. 악몽이 무서운 이유가 그것이다. 악몽 속에 똬리를 튼 또 다른 악몽이 인간에게 옮아가며 인류를 잠식한다. 페스트를 통해 카뮈가 말했던 것은, 악몽을 단지 꿈으로 남겨 두는 인간의 의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몽 속의 또 다른 악몽에 대해서 우리는 자칫 간과할 수 있다. ‘코로나 19’를 종식시켰다 해도 우리는 악몽의 심연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국가 안팎에서 자행된 숱한 차별과 같은 타자-죽이기가 그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우리나라에도 모든 언론의 이목을 이상하게 집중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202056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생활방역으로 전환시킨다는 정부 방침이 나오자마자, 이태원 클럽을 중심으로 다시 집단감염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특정 종교에서 발발한 대규모 감염사태와는 양상이 달랐고 그동안 생활방역을 꾸준히 실천해 바이러스에 대한 내성과 저항력이 쌓인 상태였지만, 언론의 카메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코로나 19’ 사태와는 상관없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지극히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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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지금 우리가 겪는 디스토피아의 악몽은 순전히 코로나 19’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바이러스에서 악의를 찾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와 함께, 인간에게 내재한 고질적인 악습과 편견, 병폐 등이 이번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적 취향을 우리 사회가 존중했다면, 이태원 클럽의 집단감염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졌을 것이다. 얼마든지 다르게 사유하고 대처할 수 있었음에도, 우리나라는 성숙하지 못했다. 멈춘 사회는 다시 움직일 것이고, 의료 시스템의 붕괴는 다시 완성을 향해 질주하겠지만, 우리 내부에 도사린 악몽의 디스토피아들은 어느 때고 튀어나와 다시 집단감염을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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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디스토피아는 희망의 부질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상당히 미시적이고 포괄적인 전략이며, 존재를 그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붕괴시키는 잔인함이다. 이에 대한 조지 오웰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목격한 디스토피아의 섬뜩한 풍경을 묘사한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해 가는데 슬럼가에 사는 스물다섯 살 정도의 젊은 여자를 보게 된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까닭 모르고 당하는 어느 짐승의 무지한 수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모진 추위 속에, 슬럼가 뒤뜰의 미끌미끌한 돌바닥에 꿇어앉아 더러운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지를, 내가 알 듯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젊은 여자가 모진 추위 속에서, 슬럼가 뒤뜰의 돌바닥에 꿇어앉아 있다. 그녀의 손에는 가늘고 긴 꼬챙이가 들려 있는데, 아마 얼어붙어 막힌 더러운 배수관을 뚫는 것이리라. 조지 오웰은 분명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 권태와 굴욕은 물론 동시에 앙상한 팔뚝에서 꿈틀거리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의지도 읽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슬럼가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의 끔찍한 운명은 바로 눈앞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그 자체이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 악몽 속에서의 그녀가 꿈꾸는 희망은 진짜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벗어남이라는 단어조차 기억해낼 수 없을지 모른다.

 

조지 오웰이 본 젊은 여자의 눈빛에는 일말의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빈약하고 모호했으며 아주 잠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묻어 있는 감정들은 슬럼가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부질없는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악몽을 벗어날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잔인한 디스토피아는 없다. 이 출구 없는 악몽은 빅 브라더의 교묘한 통치술로 이어지며 전체주의로까지 이어진다. 잡혀 온 윈스턴에게 오브라이언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그의 미소는 상대에 대한 비웃음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동시에 얽혀 있다.

 

윈스턴, 자네는 견본에 난 흠과 같군. 한마디로 씻어 버려야 할 오점이지. 우리는 과거의 처형자들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목으로는 만족 못 하네. 자네가 우리한테 항복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야만 하네. 이단자들이 우리한테 반항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형하는 게 아닐세, 우리는 그들을 전향시켜 속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든다네. 그들이 지닌 악과 환상을 불태워 버리고, 외양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영혼까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단 말일세. (중략) 소련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들도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머릿속에 반항의식을 갖고 있었네. 그런데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사람치고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없었네.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

 

1984의 오세아니아는 기술과학이 정점에 달한 국가다. 대신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며 결집할 자유는 박탈당했다. 관료들은 끊임없이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견본에 난 흠으로 치부한다. 통제의 완성은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이 아니며,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 복종이다. 반체제 의식을 가진 자들의 환상을 스스로 지우도록 하고, 겉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장악하기 위해 전체주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꺼내 드는데, 오브라이언이 넌지시 밝힌 빅 브라더의 무서움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의식개조에 있다. 윈스턴은 결국 저항과 의지가 완전히 거세된 새사람으로 바뀌며, 당의 언어에 무조건 복종한다. 이 디스토피아의 비극이 완성되는 것은 윈스턴이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流浪)의 삶이여! 진 냄새가 배어 있는 두 줄기 눈물이 그의 코 양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순간. 디스토피아의 악몽은 완성되고 만다. 짐승을 향한 치밀한 이 결국 그 짐승을 박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신에게 고해성사하듯, 진 냄새가 배어 있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앤서니 버지스의 1962년 작 시계태엽 오렌지도 기억해야 한다. 가까운 미래 사회에서, 폭력의 편재성과 인간 교정의 상관관계를 노골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도 디스토피아의 악몽을 갖고 있다. 주인공 알렉스는 감옥에서 루도비코 프로그램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당국은 이렇게 고백한다. “문제는 그 요법이 과연 진짜로 삶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란다, 6655321번아. 선함이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어떤 것이야.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는 거야.”

 

한 각지 첨언하자. 당에 대한 철저한 복종, 개인의 종속된 의지라는 디스토피아는 소위 빅 브라더의 이념이나 루도비코 프로그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강조한 바 있는, 언어와 사유, 세계의 불일치 속에도 존재한다. 언어와 사유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닿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악의 평범성을 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빅 브라더의 간교한 술책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앞서 언급한 이태원 클럽의 집단감염이 사태의 연관성일 전혀 없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공격으로 이어졌음에도 일상생활에서 이를 공론화하고 토론과 성찰하는 기회는 자주 없었다.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빅 브라더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 발표한 멋진 신세계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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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는 명확히 한정된 실체가 없다. 그것은 징후경향으로 존재하며 역사와 사회마다 다른 표정과 얼굴로 드러난다.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의 개념적 대립쌍으로 본다면. ‘있음없음이라는 양립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응하는 실체는 없지만 일정한 지향성의 기억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디에도 없지만, 그러한 이유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 그것은 가능성의 영역도, 또한 불가능성의 영역도 지칭하지 않는다. 손에 닿는 실체가 없으므로, 마치 수학과 같이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유토피아와 유사하게사유 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유토피아는 없다. 지상에서 결코 실현된 적 없기 때문에, 또한 오직 이상향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의 낯선 곳이자 제로-지대. 공간적 깊이나 시간적 거리감도 없으며, 언어--에서 언어가 사유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뿐이다.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에덴은 도래한 적이 없고, 또한 도래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더욱더 간절히 유토피아를 기억하는 것.

 

디스토피아도 마찬가지. 알랭 바디우가 주의하라! 맥베스의 검은 마녀들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문장을 통해 서양의 검은색과 동양의 흰색이 모두 죽음-이미지로 향하고 있음을 환기한 것과 같다. 물론 그 방향과 지향은 바디우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디스토피아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었거나 누군가가 실제로 체험해서가 아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기억이 닿을 수 없는 욕망으로 현실화되어 우리의 살과 뼈를 찢고 피가 흥건한 내륙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족에 머물려고 한다면, 디스토피아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그 을 흔들어 깨운다. 유토피아의 신비로운 질서가 우리를 무기력으로 안내할 때, 디스토피아는 냉정한 현실감으로 엄청난 무질서와 혼란,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산출하면서 우리를 낙원 바깥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에 대립하는 디스토피아의 유일한 긍정성이다. 횔덜린이 노래했듯, “위험이 있는 곳에는 그러나/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는 것이다.

 

유토피아에서 한발 벗어나면 디스토피아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디스토피아를 뒤집으면 멀지 않은 곳에 유토피아가 물러나 있다. 양자는 모두 서로를 매개로 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바,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이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디스토피아는 어느 장소인가. 그리고 기억의 방법은 또 무엇인가.”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경험되고 기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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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명확하다. 디스토피아는 존재가 존재로서의 자기 시간을 멈추고 비-존재로서, 혹은 아주 낯설고 모호하며 불투명하게 나타날 때 시작된다. 요컨대, 디스토피아는 존재론적 단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향한 기억에서 낙원-이미지의 거대한 저장고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기억이란 공통 감각이며, 세대에 걸쳐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 통각들을 유전자에 새겨 놓는 일이다. 디스토피아는 역사적 상황들이 당대 현실로 재구성된다. 당대의 약한 고리들이 끊어진 곳, 혹은 집이나 가족처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돌변하는 곳이 바로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우리는 신이나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일반화된 교환과 일반적인 욕구 충족의 기술적 장치에 의해 언제나 받아들이는 냉혹한 상황 속에 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며,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의 목숨은 살아남았지만 갚을 수 없는 빚에 얽매여 있는 노예들의 상황 속에 있다. 이 모든 것은 교환과 경제 질서 속에서 오랫동안 작동할 수 있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폭력과 테러에 대한 진단은 디스토피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특히나 정치경제에 대한 입론은, 디스토피아의 징후와 경향을 가늠하는 데 유용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현대자본주의의 주도적 이념은 신자유주의로 압축된다. 신자유주의는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경제성과의 최적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은, 역설적으로 민중들이 국가와 싸워 쟁취한 인간의 보편적 이념과 복지의 최소화라는 악몽을 쏟아냈다. 국가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이 방임은 많은 국가에서 의료나 전기, 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초래했고, 죽음의 불가능한 교환마저 가능하게 만들었다. 국가 기간산업조차 민영화되었고, 노조는 약화되었으며 브레이크 없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양적 팽창을 더 가속했다. 코로나 19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쓰레기 더미 옆에서 죽었다. 결국 남는 것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무한 증식뿐이다.

 

신자유주의에서 타자는 계산된다. 양적으로 전환 가능한 에너지 단위로서 말이다. 과학과 기술은 회의(懷疑)한다. 회의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신뢰와 친교를 끊어 버린다. 세계는 측정할 수 있으며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 세계는 익명의 물화 체계다. 세계 전체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원으로 간주할 때, 잔인하게도 디스토피아가 끼어든다. 왜냐하면, 인간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모든 증여가 멈춘 곳, ‘백색 실명의 암흑이 디스토피아다.

 

하이데거는 기술과 전향에서 이러한 모든 사태를 초래한 디스토피아의 현대적 근본 원인을 이렇게 쓰고 있다.

 

기술적 의지는 이제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자립적인 사물들과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철시켜 나가는 지배에 맞추어 획일화되어 만들어진 자신의 재료와 마주 서 있는 것이다. 사물들이 이런 식으로 인간의 기술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능에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데 기술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기술적 인간은 계란, 우유, 고기를 선사하는 가축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계란, 우유, 고기 공급원-이것들은 그 이상의 무()나 다름없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는 편리한 전기를 일으켜 인간의 노동을 가볍게 해 주는 강이 아니라 수압 제공원을 마주하고 있다. 석탄과 광석을 보장해 주는 대지가 아니라 석탄 또는 광석 저장고를 마주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똑같은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즉 사물들이 순전히 기술적인 요구와 관련점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러한 관련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며, 아니 그런 것만이 존재하는것으로 통용된다. 여기에 주체가 그리고 저기에 대상이 아니라, 욕구와 욕구 충족이라는 두 극 사이의 연관만이 있을 뿐이다.

 

요약하면 현대사회에서 디스토피아는 기술과 과학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스스로가 목적이 될 때, 그리고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모든 존재자를 재편할 때 시작한다. 디스토피아는 존재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한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인간과 함께 수천 년을 동고동락한 가족으로서의 가축은 단지 인간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급원으로 전락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기술이 요구하는 관련점으로 사라져 버린다. 일종의 주문 청탁서와 같은 거대한 자연-창고만 있을 뿐이다. 인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 세계를 움켜쥔 손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인간의 본래성이란 영화 <매트릭스>의 지옥과 같은 것이다. 과연 디스토피아에서 세계--존재는 자신의 근본 형식을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는 인간과 세계, 세계와 세계, 인간과 인간의 신뢰와 친교가 깨진 상황의 낯선 순간에 대한 이미지다. 디스토피아는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지옥의 문으로 향하고 끝내는 그 문을 열어 버렸다. 수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우려한 것은 디스토피아의 이러한 편재성이 이미 우리 생활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신자유주의의 무분별한 자기 복제와 무한 팽창의 욕망,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한층 더 심각해진 물신화 양상들이 디스토피아에 각인되어 있다. 둘째,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과 이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성역화한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 셋째, 도구로 전락한 인간 주체의 참을 수 없는 소외와 결핍, 권태는 물론 국가 간의 전쟁이나 내전, 테러, 종교적 억압과 살상, 위안부 할머니나 난민의 존재,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 창궐, 무지막지한 가뭄과 기근, 태풍과 쓰나미, 미세 플라스틱과 쓰레기 섬에 의한 바다 생태계 파괴, 기후 변화에 따른 극지 생물의 몰락, 우주 쓰레기, 체르노빌과 후쿠오카 원전 사고, 대량 살상무기, 남성 권력 구조, 성소수자와 인종 차별, 디아스포라나 호모 사케르로 대변되는 인간 내외 철저한 비인간적 시선에도 디스토피아는 작동한다. 이 모든 것은 타자의 상실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직결되면서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고리라는 것이며, 따라서 디스토피아에 내재된 경험적이면서도 적확한 이중 알레고리를 읽어야 한다는 것.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대립-이미지, ‘일상어디에나 스며든 디스토피아’, 유토피아를 전복하려는 검은 사제들의 이념과 의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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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함께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체제의 이념과 방법을 소진하는 형식이며, 당대인들의 기억을 통해 그때그때 다른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디스토피아가 울리는 경종은 시대를 관통하는 직관적 성찰로 이어진다. 디스토피아는 대상의 모든 것을 죽음 혹은 무()로 돌려세울 정도로 강렬하지만, 그것에 대항하는 자는 철저한 자기-실존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마치 모비딕에서 멜빌이 이슈 메일이라는 목소리-“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를 남겨 두고 에이해브를 비롯한 선원들의 실존을 증언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디스토피아에 던져진 자들은 자신을 비롯한 세계의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질문함이란 위험이 더욱더 가까워져 올수록, 구원자로 이르는 길은 더욱더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더욱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그 까닭은 물음이 사유의 경건함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흉측한 해충으로 변한 자신을 살펴보며 계속 그 이유와 변명과 후회를 묻거나, “내세라는 것, 모든 미래의 세계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인가? 나에게는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누구인가? 나 혼자뿐인가? 이게 나 자신인가?”라며 느닷없이 찾아온 광기의 귓속에 속삭여야 한다. ‘묻는다는 것은 철저한 고립 속에서도 그 파국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의 언어다. 사무엘 베케트의 명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라. 블라디미르는 끝없이 질문하며 자신과 실존의 끈을 잃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들어버린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바라본다.)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사이)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난산하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 찼구나. (귀를 기울이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에스트라공을 바라본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 두자고. (사이) 더는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블라디미르는 자신과 에스트라공의 처지를 잠깐 되새긴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행동들은, 자신들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온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올 리 없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서로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묻는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일까?”라고. 그는 질문함으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망들이 붕괴된 디스토피아를 전복할 일말의 힘을 얻는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디스토피아의 내면을 핍진하게만 그렸던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파국과 희망을 향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디스토피아에 던져진 자는 질문하는 동시에 대답하는 목소리다. 거의 독백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게 말한다. 발음이 느슨하고 마디가 없어 웅얼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말한다. 누가 듣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말하고 말하며 또 말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목소리는 자신의 불행과 행복을 정확히 구분하면서 말한다.

 

 

 

대부분 사람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이 운명적인 상태는 지난 몇 년간 더 악화되어 나아지지 않았으며, 나는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빈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나탈로 되돌아오고 나탈에서 다른 큰 도시, 즉 베니스와 로마로 갔다가 되돌아오고 프라하로 갔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라 고백하는, 저 내면에 일말의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행복할 때는 정확히 안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그는 행복할 뿐이다. 가는 곳이 어디든 도착하면 불행해진다는 이 불가해한 목소리는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뚜렷한 목적 없음을 정확히 대변한다. 우리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아침을 먹으며 현관을 나온다. 그리고 대중교통을 타고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한다. 해야 할 일들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 혹은 의 가치를 좀 더 올리기 위해 틈나는 대로 공부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잠시 저녁이 있는 삶을 갖거나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본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을 중심으로, 그것의 기능이 한꺼번에 마비되었을 때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품 서두에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감염자가 나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도시 전체가 시력을 잃은 사람들로 넘쳐나게 된다. 첫 발병자는 갑자기 앞이 안 보여요. 하얀 우유 속을 걷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 백색 실명은 도시 전체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는데, 더 끔찍한 재앙은 인간성이 급격히 상실되면서 사람들이 짐승보다 못한 야만의 세계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얼마 후 백색 실명에 걸린 사람들의 시력이 되돌아오는데,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의 아내만 시력을 잃게 된다. 사람들이 그녀의 의연함을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작가의 통찰대로 우리는 어쩌면 애초부터 눈먼 자들일지 모른다. 그녀의 말처럼 눈을 뜨고 있으나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애써 보지 않을 때, 백색 실명의 디스토피아는 순식간에 펼쳐진다. 이미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눈먼 자들의 도시와 유사하게 소통 불가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그곳의 법은 오로지 약육강식이다. 작가는 얼마 전에 나는 꿈의 문을 지나 그곳에 들어섰다. 유명한 파고의 도시가 자리 잡은 그곳을이라는 호손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그 폐허에 곧장 진입한다. 물론 그 세계는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줄어든, ‘소통 불가의 세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는 알아듣지만, 그것은 우리 정신 속에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 알지 못하는 어느 낯선 언어에 속한 단어로만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낯선 소리의 단어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다 보면 대화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게 당연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언어로만 말을 하는 셈이 되고, 결국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의사소통이 어렵게만 되는 것이다.”

 

이들이 겪었던 디스토피아는 징후적인 동시에 경향성으로서 우리의 삶에 파고든다. 징후와 경향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대칭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 19 사태와 문학이 통찰한 디스토피아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는 디스토피아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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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디스토피아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 저 가공할 자본주의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의 본래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남은 것은 생활의 장식품이라는 물신이다. 디스토피아는 채널을 돌리면 얼마든지 눈앞에 소환할 수 있는, 경험 가능한 목록이 된 것이다. 더 잔인하고 더 지독한 디스토피아를 원한다면 당신은 돈만 지불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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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현대화된 원-이미지를 살펴볼 때다. 시각적으로 단순화된, 그리고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는 신의 입술과도 같은.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프리츠 랑 감독의 1927년 장편영화 <메트로폴리스>를 만나게 된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SF영화로서 가치와 의미가 손색없는 이 작품은,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과학과 기술에 대한 거대한 묵시록을 완성한다,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자본가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신성과 절대 권력은 지하 세계의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과 확연한 대비를 이끌어내며, 비극적 서사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술관료주의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자기 복제를 읽을 수 있으며, 특히 기계-도시의 테크놀로지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와 기술과 과학을 맹신하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징후들까지 찾을 수 있다. 특히, 마리아를 복제한 기계 인간이 노동자들을 향해 기계를 굶겨요. 어리석은 자들이여, 끝장냅시다!”, “기계를 죽이러 가요!”라며, 선동하는 부분에서는 테크노크라시의 놀라운 자기-완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매트로폴리스>는 진보의 낯선 환상, 불확실성과 공포를 예언하며, 지금까지도 기술 시대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약한 고리를 양분하는 이중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이 영화에서 공간과 소리, 색채의 분할은 무척 중요하다. 빛과 그림자 색의 단호한 대비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밝고 부드러운 자연음에 맞물리며 수직의 빌딩과 지하의 깊고 어두운 세계를 완벽하게 분할한다.

 

첫 번째 장소는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요 프레더젠(Joh Fredersend)’이 거주하는 곳이다, 작품에서는 새로운 바벨탑이라 일컬어지며 근대 문명의 총 집산지로 등장한다. 현대 건축 미학이 집결된 마천루는 물론이고, 공중을 가르는 도로와 고속철도, 비행기까지 그야말로 <블레이드 러너>(1979)의 원-이미지가 여기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인공낙원으로 묘사된 영원한 정원까지 함께 있으니 에덴동산의 기적이 실현되었다 해도 과장은 아니다. 선택받은 자는 매일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경기를 하고, 파티를 열며, 고상한 예술과 학문을 곁들인 채 귀족적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깊숙이 내재된 얼굴-표정은 마천루의 공간-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행동에는 공백이 많으며, 귀족적 풍모에도 불우하고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기 때문이다. ‘권태의 엄습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이 기괴한 기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특히 프레더젠의 아들 프레더(Freder, 그는 머리와 손의 중개자)마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형제라는 단어를 썼을 때 느꼈던 강렬한 끌림의 정체가 이것이다. 인공의 향기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흙냄새가 마리아에게서 넘치도록 흘렀던 것이다.

 

새로운 바벨탑은 노동자들의 지하 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그들은 가장 잘 볼 수 있는곳으로, 즉 구조화된 암흑지점으로서의 파놉티콘(Panopticon)’과 연결된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유토피아로 그려지는 빛의 바벨탑도 구조적으로는 어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암시는 영화 첫머리에도 등장한다. “머리와 손의 중재자는 가슴이다라는 문장은 기술적 진보라는 유토피아가 결코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에피그램인 바, 유토피아와 반()-유토피아의 이중성은 지하로 향하면서 한층 더 분명해진다.

 

두 번째 장소는 더럽고 열악한 지하 세계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이다. 똑같은 검정 제복을 입고 이보다 더 강한 복종 이미지는 없을 정도로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생활한다. 지배계급에 의한 그들의 통제는 일상의 모든 것에 걸쳐 있다. 그들은 하루 10시간 동안 일을 하고 정해진 식사 시간을 준수해야 하며, 기계가 멈추지 않도록 정확한 시간에 교대해야 한다. 동일한 작업복에 동일한 보폭에 동일한 표정-어쩌면 그것만이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자유일 것이다. 그들의 증오는 무기력이고, 그들의 분노는 멈춰버린 공장의 사막과 같다. 사정이 그러하니 페니키아 불의 신 몰록(Moloch)’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몽환적 장면에서 그들은 묵묵히 계단을 올라간다.

 

문제는 지하의 노동자들이 생성파괴라는 이중 주체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메트로폴리스를 유지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도구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기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파국의 주체라는 말이다. 노동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테크놀로지의 배반이라는 역설을 증명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기계-마리아에 현혹된 노동자들이 기계에서 죽음을 내리려고 질주하는 장면은 그들의 증오와 분노가 무기력과 적막에서 혁명적 에너지로 전환되는 경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의 이러한 이중성은 빛의 테크놀로지의 구조와 유사한 형식으로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 프리츠 랑 감독은 폭동’(혹은 혁명)이 아니면 새로운 바벨탑의 지상과 지하는 만날 수 없도록 설계한다. 이 설계도의 질서와 몫으로써 충분히 안정적이었다. 물론. ‘중개자의 등장으로 각각의 최적화된 구조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되지만 말이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와 겹쳐지고 뒤섞이며 혼돈과 무질서로 빠진다. 두 개의 극에 의해 두 계급의 일상이 찢어지는 것이다.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대칭하며, 파국과 희망을 향한 하나의 진혼곡을 연주한다.

 

 

 

박성현

2009<중앙일보>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