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튜브 안 하세요?"
한때 '국민의 알권리'와 '사생활 보호'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 문제는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기도 했지만, 2022년 오늘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이런 개념들을 뒤돌아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변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소하게 보이지만, 이 변화는 상당히 결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는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이제 사생활은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라기보다 상품화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 어딜 가나 듣는 소리가 바로 '유튜브 안 하세요?'라는 질문이다. 과거 이런 질문이 새로운 기술을 재빨리 습득해야 한다는 계몽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다분히 자기계발의 논리와 결합한 인간의 자본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최소한 트위터와 페이스북만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는 어떤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잉여로운 놀이'에 가까웠다. 그리고 유튜브와 유사하게 보이는 팟캐스트만 하더라도 '방송'의 영역은 여전히 전문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스튜디오를 빌려야 하고, 미리 대본을 준비하고 출연자를 섭외하고, 녹음을 한 뒤에 편집을 해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는 서버에 업로드를 해야 했다. 그러나 유튜브는 이러한 차원과 달리, 말 그대로 '아무나' 자신의 이야기를 촬영해서 업로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블로깅을 하려면 최소한 글쓰기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춰져야 하지만, 유튜브는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 라면을 끓여서 먹거나 배달 음식을 탐식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줘도 방송이 되는 것이다.
간단한 장비만 갖추면 누구나 텔레비전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이 시대야말로 미디어 민주주의가 극상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이 유토피아의 도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라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 개념을 근대의 보편성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파놉티콘이 실제 건축물이라기보다, 그 상상 자체가 근대인의 의식을 구조화하는 패러다임이라는 뜻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의 파놉티콘 개념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에서 온 것이다. 벤담에게 파놉티콘은 규율 장치였다. 벤담은 범죄자를 구죄하기 위한 '경제적인 방법'으로 원형 감시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자신의 건축물을 '교정소(the house of correction)'라고 지칭했다.
규율 장치라고 하니까,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파놉티콘'의 목적은 오히려 개인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한 건축물이었다. 벤담에 따르면 이 '교정의 집'에서 개인은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능력껏 일한다면, 생계 수단을 지급받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더 나아가서 의심으로부터 자유롭게 그 노동의 대가로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노동이 강제 노동일지언정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아닐까. 강제성을 통한 자발성이라는 중요한 의제가 이 지점에 숨어 있다. 푸코는 이런 '파놉티콘'에 대한 벤담의 생각을 경제적 자유와 통치의 기술을 결합하려는 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구상이라고 보았다. 푸코의 분석처럼, 벤담은 기존의 처벌 방식보다 월등한 파놉티콘의 경제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건축물에 대한 구상이야말로 자유주의 하에서도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
벤담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또는 1인 미디어의 범람은 공리주의의 이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벤담의 구상은 상호 감시라는 중요한 모더니티의 속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디어는 감시의 기능을 의미한다. 로장발롱은 '사회적 감시'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 시기에 '귀족화'하는 혁명 대표부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이런 감시의 문제와 민주주의를 연결한다. 여기에서 로장발롱이 말하는 감시라는 것은 과거처럼 권력이 시민을 감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처럼 만인이 만인에 대해 감시하는 경우도 있다. 로장발롱이 감시 권력이라고 지칭한 '사회적 감시'야말로 근대의 민주주의 시초다.
미셸 푸코의 선구적 작업 이래로 "감시 사회"라는 용어는 보통 권위적 집단이 훨씬 밀접해진 존재의 양상에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범위한 방법에 의존하는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푸코가 제레미 벤담으로부터 빌려온 "파놉티콘"의 이미지는 감옥의 형식과 방법에 대한 상징으로 정립되었다. 다양한 감시 기술로부터 파생된 권력이 사회에 퍼져 있다는 생각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컴퓨터, 도시 감시 카메라, 다른 향상된 장치들의 사용은, 개인의 행동을 이전보다 훨씬 밀착된 관찰에 종속시키는 근대적인 관리 체계를 발전시킨 것만큼이나 오웰적인 전망에 믿음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뒤집힌 현상, 말하자면 사회에 의한 권력 감시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한다. 반-민주주의는, 물론 사회를 통해 수행되는 것으로서, 푸코가 묘사한 바로 그것들과 유사한 통제 메커니즘을 차용한다.
시민 세력 또는 사회가 수행하는 감시 권력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서 로장발롱은 "감찰(vigilance), 폭로(denunciation), 평가(evaluation)"를 제시한다. 감찰은 정부에 대한 모니터링을 의미한다. 정부의 정책 집행을 주시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행동이다. 정책을 중심으로 조직된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주로 여기에 해당한다. 폭로는 말 그대로 정부 관료나 정치인의 비리를 공개하는 것이다. 이 비리에 스캔들도 포함된다. 로장발롱에 따르면, 스캔들의 폭로는 "권위에 동의하지 않는 허무주의적 묘사"와 "투명성이라는 정치적 미덕에 대한 신념", 이렇게 두 가지 차원을 가진다. 가끔 지탄의 대상이 되는 '폭로 저널리즘' 또는 '황색 저널리즘' 역시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내재한 감시 권력의 기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폭로는 명망(reputation)이라는 정치인의 상징 자본을 훼손시키는데, 명망이야말로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제도"를 구축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이런 효과는 무시하기 어렵다.
로장발롱의 주장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라는 1인 미디어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감시라는 것은 결국 '남을 본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남을 모니터링하는 것이 감시이다. 과거에 파놉티콘이라는 하나의 건축물이 감시의 장치였다면 지금은 만인이 다 하나씩 1인 미디어라는 파놉티콘을 설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감시가 사회적인 차원을 떠나 '사생활'에 대한 모니터링으로 전락할 때, 이른바 '관음증'의 상황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3. 관음증과 판타지
결국 '관음증'이라고 명명하는 쾌락의 실현 방식은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전제한다. 1인 미디어는 이 관계의 방식을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따르면 이 증상은 판타지의 문제이다. 라캉은 유명한 판타지 공식($◇a)을 통해 기표와 주체의 관계를 설명한다. 기표와 맺는 관계를 통해 분열된 주체가 어떻게 '대상 a'를 욕망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판타지 공식이다. 중간에 그려진 마름모꼴(◇)은 '대상 a'를 욕망하는(désir de) 회로이기에, 영원히 그 결핍의 공백을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그 결핍은 한때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다가 사라진 것이기에 언젠가 다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가 언제든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 '상실된 그것'이야말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대상 a'이다. 이 '대상 a'는 대타자(Other)와 주체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주체가 대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판타지가 구성되는 것이다.
라캉의 판타지 공식($◇a)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진동하는 욕망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흐름은 $에서 a로 흐르는 벡터(∨)와 a에서 $로 흐르는 벡터(∧)의 결합이다. 라캉은 수학에서 사용하는 명제 논리의 기호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판타지 공식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명제 논리에서 ∨는 '또는'을 의미하는데, A∨B는 A 또는 B 중에 하나라도 참이라면 참이고 둘 모두 거짓이면 거짓이다. 한편 ∧는 A와 B 모두 참일 때만 참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만 참일 경우는 거짓이다. 이를 풀어 보면, $에서 a로 흐르는 벡터는 둘 중에 하나만 참이면 참일 수 있지만, a에서 $로 흐르는 벡터는 둘 중 하나가 참이 아니면 참일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까닭에 이 순환의 구조는 등가성을 나타내는 등식처럼 보이지만, 주체와 대상이 교환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 아래와 위의 벡터는 서로 다른 논리를 내포한다. 흑인과 백인의 관계 역시 서로가 서로를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교환 불가능한 등가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거세를 통해 출현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거세는 '성기 절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세는 '성기'를 '절단'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그것을 떼어 내겠다'고 말하는 발화 자체이다. 이 발화는 '불안'을 부추긴다. 이 '불안'이야말로 거세의 효과인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거세는, 다름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는 욕망의 법(Law of desire)이라는 거꾸로 선 사다리(léchelle renversé)에 달성되기 위해 거부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거세는 곧 주이상스의 위치이다.
거세는 주이상스를 선제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주이상스를 욕망의 법 아래에 둘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주이상스를 거꾸로 세운 것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불안'하다. 주이상스의 전복성은 욕망의 법을 언제든 뒤흔들 수 있다. 따라서 거세는 '성기'를 문자 그대로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단'의 암시를 통해 남겨진 주이상스의 '잔여'를 지시한다. 모든 쾌락의 향유를 뜻하는 주이상스를 모두 제거할 필요는 없다. 할례처럼 '성기' 자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절제하더라도 이런 효과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신체의 정체성은 이렇게 일부의 상실에서 기원한다. 일부를 상실했기에 주체는 전부를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체의 구조이다. 주체는 상징적 교환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거세의 과정에서 상실된 것은 결코 상징 교환의 대상일 수 없다. 이것들은 공통적인 것, 소통적인 것, 사회적인 대상이 구성되기 전에 '대상 a'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다.
4.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인 미디어는 주체의 판타지를 계속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소셜 미디어의 플랫폼들은 새로운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 이미 안다고 믿는 사실들을 계속 공급해 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들은 관심의 대상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1인 미디어는 주이상스를 통제하고, 건전한 욕망만을 확대 재생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와 달리,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또는 유튜브는 항상 '보는 자'를 상정해 놓고 있다. 이 '보는 자'는 주이상스의 타자라기보다, 그 주이상스를 병든 욕망으로 규정하는 정상성의 범주이다. 페이스북에 '싫어요'를 나타내는 버튼이 없는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싫다는 것은 그냥 무시이다. 마찬가지로 1인 미디어의 시대에 가장 두려운 것은 주목받지 못하는 일이다.
여기에 더해 유튜브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달라도 한참 다른 성격을 가진 매체이다. 아이튠을 플랫폼으로 삼는 팟캐스트와 닮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 팟캐스트는 방송 시설을 따로 갖추지 않으면 방송을 하지 못하는 반면, 유튜브는 다른 매체들에 비해 훨씬 1인 미디어의 정의에 충실한 매체이다. 다른 소셜 미디어가 보여주는 장단점을 모두 아우른 느낌이다. 일단 유튜브는 정보를 사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기존의 매체에서 볼 수 없는 현장성을 뽐낸다. 예를 들어,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글과 사진으로 전달하던 방식이 블로그였다면, 유튜브는 영상으로 생생하게 그 지역을 보여준다. 경우에 따라 직접 생중계를 하기도 한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여행지의 정보를 전달하기도 어렵다.
유튜브는 개인이 하나씩 텔레비전 방송국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경우도, 어떤 특정한 영상을 보면 그와 관련된 다른 영상들을 계속 추천해서 볼 수 있게 한다. 한 영상에서 만족한 내용을 찾지 못하더라도 다른 영상을 통해 필요한 것을 찾으면 된다. 주로 영화 리뷰 영상들이 그렇다. 하나의 영화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리뷰를 들려주는 채널이 인기를 많이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방식이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영화 정보야 그렇다 쳐도 정치적 사안에 대한 유튜브 방송은 편향된 내용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에는 아무래도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한 확증 편향을 강화해 주는 기능을 유튜브가 할 수 있다. 이 확증 편향은 소위 '가짜 뉴스'의 원인이다.
시선의 폭력은 이런 '가짜 뉴스'와 짝패를 이룬다. 그럼에도 시선을 통한 대상화는 안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많은 시선의 일방성을 주장해야 한다. 시선을 위반하면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른바 시선의 체제는 위계적이다. 이 위계를 위반하는 순간, 주체는 불안에 빠져든다. 라캉은 스피노자적인 맥락에서 '불안'을 감정(emotion)이라기보다 정동(affect)으로 정의한다. 스피노자에게 정동은 신체의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변용(affection)인 동시에 그 변용에 대한 이념(idea)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동은 변용 자체이자 동시에 이념이다. 우리 자신이 이 변용의 원인이라면 능동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수동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작용을 하면서도 작용을 받는 것이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불안'이 정동이라고 한다면, 주체의 변용 역시 이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공고하게 보이는 미디어 범람의 상태가 사실상 주체의 불안을 드러내는 증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시선은 폭력적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다. 기표는 언제나 주체의 욕망을 위반한다. 이 욕망을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떼어내어서 요구의 차원으로 돌려놓는 것이 관음증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주체의 변용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기술이 만들어 놓은 이 디스토피아에서 주체는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고자 하지만 성공적일 수는 없다. 주체는 끊임없이 실패함으로써 변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정동과 변용의 관계일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럼으로써 불안은 주체를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게 끊임없이 추동한다. 이 끊임없는 욕망과 요구의 순환이야말로 1인 미디어의 시대에 드리운 명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택광
문학비평가 겸 경희대 영미문화 전공 교수, 비평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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