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랄한 풍자, 우울한 시대
풍자가 되살아나고 있다. 한동안 서바이벌 예능과 막장 드라마가 주도하는 듯 했던 방송계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부활하더니 풍자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80년을 숨만 쉬며 갚아야 할 등록금이 한 개그맨의 입에서 풍자되었다. 내 집을 갖고 대학을 졸업하여 평범하게 살고 싶은 꿈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멀어진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를 뉴스 앵커나 기자가 아니라 개그맨이 폭로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당 공천을 받아 서민 코스프레를 하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이에 발끈한 여당 국회의원이 그 개그맨을 고소하는 코미디 사태도 일어났다. 각하의 꼼수를 꼼꼼하게 까발리고 비웃는 개인 방송은 가장 핫한 이슈였고, 뒤따라 각종 개인 방송들이 스마트폰이 대중화 물결을 타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넘쳐나고 있다. 방송뿐만 아니다. 사회적 이슈에 개인적인 의견과 토론을 덧붙이는 트윗 멘션들은 시시각각 타임라인으로 소개되고 있고 각종 패러디 포스터나 사진, 동영상은 매일매일 유머와 풍자를 담당하며 인터넷 공간에 흘러넘친다.
유쾌 발랄의 재치와 기지가 기반하고 있는 곳은 우울한 현실이다. IMF 이후 우리 사회를 장악한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은 이제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경제적 궁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 유일의 가치로 지정되고 경쟁이 당연한 생존 논리로 강요되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구조에 진입할 수 없거나, 혹은 영원한 박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회구조, 거기에서 오는 절망감이 우리의 삶을 더 우울하고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심리적 정신적 공황 상태, 공포의 문화와 선망의 문화를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경쟁에서 밀려나면 끝장이라는 공포,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다는 성공과 행복의 이데올로기는 가질 수 없는 것을 끝없이 선망하게 만든다. 경제적 궁핍이나 폐쇄적 사회구조뿐 아니라 거기에서 발원한 공포와 선망의 병적 심리 상태, 이미 신자유주의의 게임 논리에 내포되어 전전긍긍하는 주체들의 불안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에 드리운 가장 치명적인 그늘일지도 모른다.
자본이 유일한 가치라는 논리를 승인하고, 자본을 얻기 위해 가혹한 경쟁 논리와 승자 독식의 법칙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 내부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부의 축적이나 행복의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상황. 이를테면 이는 지젝이 지적한 바 대타자와 주체의 분리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타자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으며 그러므로 대타자와의 동일시는 언제나 실패한다. 자본이라는 대타자는 주체를 자발적으로 복속하게 만들었지만 주체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타지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고 심지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경쟁의 논리를 딛고 일류 대학에 진학하고 무한한 스펙 쌓기로 청춘을 압착하여 안정된 직장에 취직한다해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부를 쌓고 더 놓은 지위에 오르기 위한 무한 경쟁과 자기소외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주체는 대타자가 진정으로 제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대타자가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면, 대타자의 절대적 권위는 훼손된다. 유일 가치로서의 자본과 그것을 얻기 위한 경쟁 논리로부터 이탈하는 분리가 일어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리고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일련의 저항과 분노의 움직임은 이 분리의 어떤 징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의 횡포와 비윤리에 분노한 시민들이 월가를 점령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저항의 가능성과 당위성을 전 세계에 전파시키고 있고 그 이전에 한국에서는 이미 촛불시위가 저항의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창출한 바 있다. 용산과 FTA에 분노한 시민들은 촛불과 희망버스로 답했다. 현재의 세계가 견딜 수 없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때, 그리고 변화의 당위와 가능성이 분명할 때 저항은 촉발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변수와 우연성이 개입되겠지만 부당하고 천박한 세계에 대한 절망과 변화를 향한 열망이 서로 부딪히며 새로운 충동을 만들어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이 병든 1:99의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 풍경이 곧 풍자의 부활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생존의 공포와 불안을 유쾌한 풍자와 희망으로 전환시킨 이즈음의 일련의 문화 풍경이야말로 일종의 감각의 재배치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의 전면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에서 표명된 세계에 대한 해석 불가능성, 혹은 저항 불가능성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상업주의적 대중매체의 확산으로 인한 문학의 입지 약화, 근대 문학의 종언 논의에서 촉발된 문학의 근대적 역할론에 대한 회의 등 문학이 위기에 처한 환경과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되 그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는 모색으로 그간의 위기론을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면 문학과 정치 담론은 이명박 정부 이후 더욱 강력해진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의 압박과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윤리가 막다른 곳까지 내몰려 있다는 위기의식, 이러한 현실에서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더욱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학장 바깥으로 시야를 넓혀보았을 때 이러한 소중한 성창들이 문학장 내의 자기 담론으로만 공전할 뿐, 우리 시대 대중의 감각, 문화에 활기 있게 접합하지 못하고 문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들은 현실에 대한 분석과 대응을 위해서는 SNS를 참고하며 감각의 즐거움과 쾌감을 위해서는 각종 방송과 영화와 웹사이트를 선택한다. 인간과 사회, 문명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할 때면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 문학은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감각적으로도 인식적으로도 새로운 시각과 언어를 제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물론 지나친 비관론이며 이러한 진단은 문학이 표현할 수 있는 감각과 인식의 재배치, 언어와 상상의 새로운 모험들을 폄하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문학인들이 문학과 정치이든, 문학과 윤리이든 그 장 내부의 담론에 골몰해 있는 사이, 현실과 대중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새로운 문화의 새로운 삶의 방법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장 내의 담론들이 자족적인 수준에서 폐쇄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단순히 일축될 수도 없독 일축되어서도 안 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가령 자크 랑시에르를 참조한 문학과 정치 논의가 그 고민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귀결되고 마는 과정을 좀 더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랑시에르가 치안과 정치를 구분하면서 감각적인 것을 재분배하는 문학의 정치성을 규정할 때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과 변화들을 문학이 어떻게 일상적 감각의 영역에서 재구조화되고 표상해느냐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져야 할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오히려 문학의 자율성이라기보다는 타율성에 관계된다. 물론 그간의 논의가 이러한 문학의 타율성에 전혀 무관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 내부의 자율성 문제로 귀결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동의되는 예술적 원칙으로 수렴되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치적 실천과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구분하면서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가능성에 주목했던 알튀세르의 논의를 참고해볼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 분야의 분리가 아니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이론적 실천 간의 상대적 자율성과 상호규정성이다. 그리고 각각의 자율성을 지닌 다른 차원의 실천들이 서로 관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전체성의 문제에 육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문학과 정치는 문학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대중적 소통의 접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이른바 문학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강박적 회피는 또 다른 편향을 낳았는데, 단순화를 감수하고 요약하자면 그것은 개인성과 문학성의 강조로 특정된다. 개인의 진정성과 문학의 자율성의 차원에서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수렴하려는 태도는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위험을 내포한다. 예컨대 윤리적인 것, 문학적인 것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러한 논의는 결코 노골적으로 개인성과 문학성을 옹호하지 않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실천과 정치에 윤리와 문학을 대신 새겨 넣으려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역사적/사회적 문맥에서 멀어진다. 1:99의 사회구조는 점점 고착되어가고 이른바 사회적 기득권층과 소외 계층의 격차는 점점 더 공고해져가고 있는 사회에서 생존의 공포와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실의와 절망은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의와 절망, 불안과 공포는 부정과 저항의 이미지로 전환되어 풍자의 희화로 표출되고 있으니, 거기에서 고독하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고 있는 문학의 자리가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문학은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변화하는 세계의 어떤 국면 속으로 진입하게 될 터인데, 그것이 새로운 정치의 실험이 될지, 아니면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충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아직까지는 징후에 불과한 어떤 변화의 태동들을 감지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는 개인성과 문학성의 문제를 현실의 구조와 관계들 속에서 삽입하고 통과시키면서 그 사이에서 일어날 화학적 변화들을 예측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2. 감금 혹은 미로, 불안과 공포의 하드코어
상징계의 장악력과 실효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을 기투하고 충돌하는 곳에서 문학의 유의미한 소통이 시작된다고 본다면, 2000년대의 문학은 특히 이 부분에서 취약했던 것이 아닌가 했다. 가령 현실 세계에 대한 잔혹과 엽기의 상상력을 극다화한 경우데도 1990년대의 백민석과 2000년대의 편혜영은 전혀 다른 문맥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백민석이 상징계의 질서, 아버지의 법에 대한 극단적 거부와 위반에 근거하고 있다면 편혜영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자기 폐쇄적인 공포와 불안을 강렬한 이미지로 생산해내는 쪽에 속한다. 편혜영의 작품들이 생산해내는 끔찍하고 기괴한 이미지는 그것 자체로 현대 세계의 불안과 공포를 감각화해내지만 그것이 자리 잡은 외부 세계의 문맥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아오이 가든'이 자리 잡은 문맥이 사스가 대표하는 현대사회의 역병과 재해라면, '저수지'의 방갈로는 어린 아이들만 집에 가둬두고 어머니가 돈벌이를 나가야 했던 비니궁의 참상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맨홀'은 구소련의 빈곤과 전체주의를 연상시키고 '시체들'은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밀려난 도시의 영세 상인들의 삶과 관련이 있다. 소설이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공포와 불안은 거의 동일한 이미지로 채워져 있지만 그것이 자리하는 문맥은 전혀 다르거나 혹은 쉽게 전체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파편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의 끔찍하고 기괴한 이미지의 선명성은 문학주의라는 폐쇄회로 속에 갇힌 동어반복이 되기 쉽다.
2000년대 후반 편혜영의 소설 세계가 극단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폭발적 노출로부터 점차 일상적 세계로 옮겨 왔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 있는 변화의 징후라고 판단된다. 폐쇄 공간을 가득 채웠던 불길하고 역겨운 이미지 대신 최근의 편혜영 소설들은 일상의 공간과 사건에 대한 감각들을 세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일상의 공간이 이를테면 현실 세계의 묘사라든가 재현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의 일상성은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의 동일성이라는 폐쇄적 원환 구조 속에 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전작들의 폐쇄 공포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일상의 동일성이라는 테마가 이전의 하드코어적 상상력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세계라고 간단히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편혜영의 미학적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2000년대의 강영숙의 소설 역시 외부 세계와 분리된 불안의 이미지들이 서사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불안과 공포의 파국을 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경향 속에 놓여 있다. 이 자리에서 길게 논할 수 는 없지만 강영숙 소설의 인물들이 자주 여행을 떠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아이를 잃거나 혹은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이들은 집에서 나와 낯선 곳을 떠돈다. 인과 없는 문장들의 중첩은 그 전체로서 세계의 불모성과 황량함을 암시하고 인물들은 그 중첩된 문장들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한 부속물이다. 여행지는 익숙한 일상과 구분되는 장소이지만, 인과 없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일상과 여행을 구분할 수 없게 하고 그래서 세계는 언제나 낯설고 생경한 채로 동일하다. 편혜영과 강영숙의 소설이 세계와의 동일시에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때의 동일시가 의미하는 바는 따뜻한 공감이나 행복한 화해가 아니며 오히려 몰락과 죽음이며 파국이다. 이들은 이 세계의 황량한 진실을 함께 알지만 이 작품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실은 여전히 일면적이다. 이 동일시로 인하여 이들은 세계와 화해한 적도 없지만 또한 불화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강영숙과 편혜영의 소설이 기괴하거나 황량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상의 문법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은 해석 불가능하며 변화 불가능한 세계의 불안과 고포가 구체적인 관계 맺기의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 이는 주체와 동일시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지도 않은 타자들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등장은 이들의 이전 소설들이 타자들의 존재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을 뒤늦게 깨우치게 만든다. 이는 세계에 부딪치거나, 세계를 탐구하거나, 또는 이질적인 존재로서 세계를 해석하게 만드는 개별적 존재가 이들의 소설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타자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성격화가 이후 이들의 소설이 보여줄 새로움의 가장 핵심적 요소가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3. 세속의 문법, 문학의 거리
아직 징후의 수준에 불과한 이 일상성과 타자성을 현실의 문맥 속에 적극적으로 삽입하여 이해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예컨대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가 일상성의 무대로 선택한 파견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할까. 잠시 사전적 정의를 참고해보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일정한 임무를 주어 사람을 보냄이라고 파견을 정의한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국어사전에 등재된 의미도 유사하다. 일정한 임무를 주어 임시로 보낸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파견의 의미가 흥미롭다. 국어 사전이 일종의 규정이나 규범으로서 그 일반적 의미를 정의한다면, 인터넷 검색은 더 현재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소통의 장에서 구체화된 의미를 지시한다. 다음의 검색에서 파견의 연관 검색어는 파견의 품격, 파견직, 비정규직, 아웃소싱 등이며 불법 파견에 관한 지식 검색, 파견 노무법인의 업체 링크, 또는 각종 파견업체의 링크 사이트가 뒤따른다. 정리하자면 파견은 일정한 임무를 주어 임시로 보내는 일반적인 의미로 정의되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언어이며 현실의 문맥에서 파견은 비정규직, 아웃소싱의 동의로 통용된다. 국어사전의 파견과 검색어의 파견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것은 현실적 맥락을 탈각시킨 보편어와 삶의 한가운데에서 생산되고 통용되는 소통의 문맥만큼의 거리이다. 편혜영의 파견은 이 중 어떤 맥락 속에 있을까. 분명하지는 않다. '토끼의 묘'에서 그는 6개월의 파견 근무 기간이 끝나면 원래의 근무지로 돌아가기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규범적 의미 속에 있지만 지시하는 사냥감을 단지 잡아오기만 하면 되고 무엇을 잡을지, 잡은 후에 구울지 삶을지 버릴지 박제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숲을 달리는 사냥개가 아니라 지시를 내리고 서서 구경하는 주인이며 그러니까 개는 잡을 때까지 죽도록 초원을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선배가 말할 때, 그것은 단지 규범의 의미만 뽑아낸 사전적 의미는 동일성의 반복이나 전체를 알 수 없는 체계의 부속물이라는, 일상과 인간에 관한 알레고리를 형성하지만, 또한 비정규직과 불법 파견과 용역업체의 검색어로 이루어진 날 것의 언어들은 비정한 자본주의 한가운데서 위기에 빠진 동시대인들을 향하고 있다. 파견은 낯선 임지로의 이동이지만 곧 익숙한 동일성으로 복귀한다는 측면에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러나 또한 이 파견자들은 파견지의 불안에 시달리며 그 안에서 소멸하거나, 혹은 원근무지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불안과 공포로 멈춰 선다. 일상의 동일성을 반복하는 폐쇄적 원환구조와 파견지와 길 위에서 마주친 불길하고 낯선 타자들, 이것은 이를테면 사전어와 검색어 사이의 균열이며 알레고리와 구체적 현실성 사이의 균열이다. 이는 또한 2000년대 소설의 폐쇄 공포가 현실적 문맥으로 전환되는 징후이기도 하다.
그들은 민욱에게 경운자원관리로 신분이 이전된 뒤에 생긴 변화에 대해 물었다. 민욱은 단문으로 대답했다. 봉급은 줄었다. 십 퍼센트쯤. 노동시간은 늘었다. 한두 시간쯤, 같은 일을 한다. 예를 들어 민욱은 여전히 이주노동자들 작업을 관리 감독한다. 그러나 언제 잘릴 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노동조합은 없다. 흔한 일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때로 엉뚱한 공장에 나가 엉뚱한 일도 해야 한다. 이를테면 냉장고 수리전문 장우식을 포함한 일곱 사람은 지난 추석에 물류회사에 나가 감사고 배달하는 일을 일주일 했다. 그쪽에서 일이 밀리자 경운자원관리에 인력을 요청했고, 그러자 사장이 그들을 그쪽으로 파견을 보냈다. 거부할 수 없었다. 거부한다는 것은 파견 중단, 즉 해고를 뜻했다.
-최인석 '연애, 하는 날' 부분
편혜영의 것이 징후라면 최인석의 이 단문으로 된 대답은 어떤 결단처럼 보인다. 환상과 환각과 알레고리가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호한 실재의 세계. 1990년대 후반 최인석이 보여주었던 귀신과 피물의 세계는 환상과 리얼리티의 어떤 분기점, 그 겹침과 이탈의 긴장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한국 문학은 현실의 인력보다는 환상의 효과에 더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2000년대 소설의 환상과 이미지는 최인석에서 출발하여 너무 멀리 나가버림으로써, 그 출발점을 환기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연애, 하는 날'은 다시 환상과 알레고리가 출발한 그 원점을 응시한다. 십 퍼센트쯤 봉급이 줄고, 한두 시간쯤 노동시간이 늘었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처지가 된, 사소하고도 중대한 변화, 그것은 해고라는 말 대신 파견 중단이라는 말을 채택한 우리 사회의 근본적 야비함의 다른 이름이다. 이십 퍼센트쯤의, 한두 시간쯤의 사소하기에 수용 가능하리라 여겼던 차이에 적응하는 사이, 우리는 연애도 노동도 불가능한 불구의 존재로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자본주의만이 괴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연스러운 대타자의 법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괴물이며 이곳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실재의 세계이다. 그러니 어쩌면 순식간의 혁명, 순식간의 전환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뒤집어 말하면, 이십퍼센트쯤, 한두 시간쯤의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차이에 존재를 걸지 않고는 도무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소하고도 치명적인 차이가 바로 사전어와 검색어의 절단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절단면은 전환의 상상력이 발원하는 최소한의 거점이기도 하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와 경쟁과 소외의 신자유주의를, 혹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모든 것의 상업화를 비판하고 우리 문학의 위기가 거기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자주 말해왔지만 우리는 그 위기의 근원에 대해서 원점에 대해서 의외로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 이는 제대로 탐구조차 되지 않는 영역일 수도 있다. 2000년대 소설들이 세계의 불안과 공포를 이미지의 확충을 통해 표상했다면, 그러나 이 세계의 야비함이 거대한 알레고리나 체제가 아니라 십 퍼센트쯤의 봉급이나 한두 시간쯤의 노동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면, 그 사소한 절단면들이야말로 문학이 포착해야 할 가장 아픈 정치의 순간이 될 것이다. 이 사소한 절단면에 주목하는 것은 현실의 세부에 대한 천착이라든가 구체성의 모사를 주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 일반이거나 세계의 야만성으로 초월하기 이전의, 작은 차이들로 촘촘하게 구촉된 이 세계의 실상과 만나지 않고는 어떤 환상도 어떤 이미지도 의미 있는 소통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위해서이다. 문학이 저자거리의 풍자와 같은 것일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문학과 정치를 고민하며 자의식에 시달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이 존재하는 자리가 저 세속의 감각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그 세속으로부터 더욱 풍부한 함축과 탐구의 자양분을 얻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검색어를 통과한 언어는 결코 사전어로 수렴되지 않는 상상력들로 더욱 발랄하고 더욱 기괴하며 더욱 스산한 다른 말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잉여들이야말로 다른 말들, 다른 정치들을 만들어내는 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실의 모순과 변화와 고통들에 대하여 문학이 구체적인 관심으로 끊임없이 다른 감각들, 다른 세계를 향한 충동들을 형상화해내지 못한다면, 문학은 도처에 난무하는 풍자의 직접성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다른 세상을 향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지도 못하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냉소이다.
서영인
1971년생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2000년 <창작과 비평> 등단, 저서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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