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문학 공간에서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건 페미니즘 문학이다. 창작과 비평 모두에게 해당하는 진단이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 페미니즘 문학이 지닌 면모에 대해 얼마나 균형 잡힌 판단이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넓은 시야를 갖고 최근 페미니즘 소설 경향을 정리하고 분석한 김명인 평론가의 판단이 그렇다.6)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지난 30년간의 한국소설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읽을 것인가? 이런 화두를 들고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펼친다. “한국문학의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아마도 1970년대 민중문학의 시대 이후 동시대 다수 대중의 일상적 삶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가 문학 속에 육박해 들어온 형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체 한국사회의 동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문학이 다시 동시대의 사회적 의제의 한복판으로 개입해 들어온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김명인 45)

 

김명인은 박민정의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사례로 들면서 이 작품이 어떤 관점이나 관념을 앞세우고 삶과 세계의 자료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듯한 연역적인 글쓰기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후 박민정은 점차 이러한 약점을 극복해나가며 기왕의 문제의식을 보다 심화·확장해 가고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김명인, 39) 그런데 내 판단으로는 젠더 문제를 다루는 적지 않은 작품이 여전히 섹슈얼리티에 대해 어떤 관념이나 '정답'을 전제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삶과 세계의 자료들을 다룬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아는 어떤 좋은 소설도 정답을 전제하는 작품은 없다. 영국 소설가 로런스(D.H. Lawrence)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사유의 모험(thought-adventure)이다. 그 모험에서 미리 정해진 정답은 없다. 들뢰즈에 기대면 작가는 의견(opinion)을 갖지 않는다. 작가에게 필요한 건 주장이나 의견이 아니라 깊은 질문이다. 페미니즘 문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일종의 페미니즘 편향이라 할 시각은 한기욱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에서도 나타난다.7) 이 평론집에서 한국문학 작가 목록에는 황정은, 권여선, 김애란, 정미경, 김금희, 김려령, 신경숙, 조해진, 김세희 등이 이름을 올린다. 남성 작가는 황석영 정도가 언급된다. 여성 작가가 압도적인 대세를 형성하는 한국문학 현황에 대해 저자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재현-대의 체계상의 성차별을 철폐할것을 요구하는 성평등 주장일뿐더러 무의식적인 남성우월적 발상과 언어, 관행에 대한 정통적 저항"(한기욱, 21)이라고 강조하는 대목이 그런 예다. 이런 현실 진단은 "한국문학의 주력이 어느새 여성 작가 독자로 바뀐데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이 한몫했음이 분명하다"(한기욱, 41)는 판단에서 나온 결과다. 여성 독자층의 대두와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좀 더 따져볼 문제는 페미니즘운동의 어떤 분파가 드러내는 인식론적 오류나 독단성은 주목하지 않으면서 페미니즘운동과 갑질반대운동은 적폐청산과 더불어촛불혁명의 강력한 보루"(한기욱, 234)라고 단정하는 시각이다. 페미니즘운동을 포함해 어떤 이론이나 운동도 선험적으로 옳을 수 없으며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이 "촛불혁명의 강력한 보루였는지도 의문이지만 촛불 이후의 페미니즘운동이 보여온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드러낸 착찹한 궤적을 점검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많은 페미니즘 비평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성별 임금 격차, 성역할 구분을 강조한다. 사회학적 분석으로는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당수 20대 남성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은 사회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감정적인 액션과 리액션을 보여줘야 한다. 차별받는 여성의 모습을 재현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최근 페미니즘 문학이 압도적으로 젊은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작동하는 성적 억압 기제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여성들이 관계를 맺는 남성들의 내면, 감정, 정서와 구체적인 관계에서 섹슈얼리티를 대하는 리액션의 방에 현상 소홀하게 다뤄진다고 본다. 이번 대선에서 논란이 된 이대남(20대 남성) 현상이 좋은 예다. 일단 20대 남성을 뭉뚱그려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문학에서 필요한 건 일부 이대남이 보여주는 뒤틀린 인식을 비판하는 걸 넘어서는 관점이다.

 

20대 남자의 인식 세계에서 남성은 약자이므로 자신들이 받는 불공정은 역차별이 아니라 그냥 차별이고 자신들은 차별받는 마이너리티다. 결혼 시장과 같은 사회문화적 권력관계에서도, 법 집행에서도 20대 남성은 자신들이 약자라고 느낀다.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느냐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게 느낀다는 점이 포인트다. 20대 남성의 4명 중 한 명이 이런 강고한 정체성 집단에 속한다. “이들은 게임의 법칙을 왜곡시키는 정부의 양성평등 정책과 '여성의 우월'을 쟁취하려는 페미니즘을 확고하게 반대한다. 이들은 또래 여자에게 위축되거나 피해의식을 가졌을 개연성이 있다. 교육과정이나 입시 경쟁에서 데이트 관계에서 취업 경쟁에서 자신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한 피해 경험을 공유한다. 사실이든 허위든 이것이 일부 이대남이 지닌 정체성을 구성하는 원재료일 수 있다.”8) 문학이 할 일은 이런 잘못된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사회과학 논문이나 여성학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다. 문학은 이들이 느끼는 피해의식의 메커니즘이 실제로 성적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실감 나게 형상화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문화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예컨대 20대 남성이 부담을 지고 있는 군 복무라는 예민한 이슈가 그렇다. “국방의 의무는 분명 모든 국민의 의무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가 국민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고 착취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같은 피해자끼리 누가 더 큰 피해자인지 전시하고 경쟁할 일이 아닌 것이다.”(이선옥, 40) 맞는 말이지만 원론적인 주장에 그친다. “남자든 여자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는 건 당연하지만 현실적으로 20대 남성만이 군 복무를 감당하는 데서 발생하는 피해의식과 불공정의식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문학은 그걸 감정과 정념의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나는 페미니즘을 다루는 작품에서 단지 여성들의 재현만이 아니라 그 여성들이 관계 맺는 다른 성들의 입체적인 형상화를 만나고 싶다. 문학은 정체성 정치를 고민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정체성이 작동하고 형성되는 성적 관계(sexual relationship)의 탐색이다. 페미니즘 문학, 젠더 문학도 몇 걸음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