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하는 것 / 변하지 않는 것

황정은은 단편 <파묘>에서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을 그린다. 소설은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2016년 겨울을 배경으로 우리 삶의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광장의 장대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한편,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개로 흘러가는 어머니 이순일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묻는다. 소설 속에서 일흔둘인 이순일은 워킹 맘인 장녀를 대신해 황혼육아에 시달리며, 홀로 돌보던 조부의 묘를 대를 이어 관리할 이가 없다는 이유로 파묘한 후 허탈해한다. 황정은은 광장의 구성원이면서도 정작 어머니 이순일의 삶을 문제 삼지 않는 자녀들의 무의식적 이중성을 지적하며 결코 균질하지 않은 광장의 아이러니를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돌봄 노동에 바쳐진 이순일의 평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소설은 가부장제라는 '툴'을 그 원인으로 제시하는데, 툴이란 일종의 장치로서 지배 질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도구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장치는 사회 구성원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참여하게 만드는 치밀한 전략으로 체제의 자연스러운 영속을 이끌어 낸다. 2017년, 촛불혁명의 성공은 가부장제를 비롯한 구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여러 장치들에 제동을 걸며 관행적으로 반복되었던 여러 부조리와 불합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페미니즘 문학 역시 여성, 성소수자 등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젠더의 현실을 다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불평등한 현실의 위계를 조정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촛불혁명 이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윤리적 의제는 이제 집단과 개인의 일상을 규율하는 또 다른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순일들'에 있다. 이순일의 삶은 포기와 순응, 인내와 희생으로 점철된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가부장제가 여성의 삶을 지속적, 반복적으로 억압해 온 장치라면 그것이 장치로서의 기능을 의심받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여성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할 시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의 '이순일들‘은 2020년에도 돌봄 노동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할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며, 여성(소수자)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바뀌지 않는/바뀌기 어려운 것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여성의 삶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는 또 다른 장치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수전 그리핀은 <페미니즘과 엄마됨>에서 자신의 삶이 수백 년 동안아이를 키워 온 과거 여성들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해방의 실체를 명확히 아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고백한 바 있다.2) 인류사를 통틀어 볼 때, 여성의 몸은 그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 절대적 상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구석기시대의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부풀어 오른 복부와 둔부, 거대한 가슴 등 '모체'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임신과 출산, 양육 등 돌봄 노동의 핵심이 여성의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여성이 오랜 세월동안 무엇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글은 여성의 몸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장치로 기능하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각기 다른 형태의 모체를 그린 김유담과 김초엽의 소설을 겹쳐 읽음으로써 이 시대의 돌봄 윤리를 사유하고자 한다.

 

2. 돌봄의 무한회로 : 김유담, <조리원 천국> <돌보는 마음>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대가족제도에서 벗어나 부모와 미혼자녀만으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가 보편화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서 돌봄에 참여할 기회를 갖기 어렵게 되었다. 가정과 마을공동체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돌봄에 필요한 여러 지식들을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부모가 돌봄에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돌봄의 주체가 된다. 출산 후 대부분의 산모들이 필수적으로 머무는 산후조리원은 흔히 산모의 기력 회복을 돕는 곳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이곳은 돌봄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제공하고, 돌봄 전문가의 지도하에 각종 실습이 이루어지는 수련 시설에 가깝다. 모유 수유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리원의 일상을 짧게 스케치한 김유담의 조리원 천국은 엄마의 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불평등의 근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어제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고, 홧홧하고 얼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젖몸살이 시작되려는 거예요"3)

 

소설은 출산 후 젖몸살을 겪게 된 '그녀'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일명 “신의 손”으로 불리는 모유 수유 실장에게 가슴 마사지를 받고 "묽은 빛깔의 액체가 분수처럼 솟아"(15쪽)오르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보는 앞에서 낯선 이에게 가슴을 내맡긴 채, 단지 젖을 얻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했던 경험은 "관리나 보살핌을 받았다"는 느낌 대신 "젖소"(15쪽)에 동원된 것 같은 불쾌한 기분만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에서는 젖몸살을 단단하고, "홧홧하고 얼얼한 느낌"(15쪽)이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젖몸살은 출산의 고통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출산 후 호르몬의 영향으로 생성된 젖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젖몸살은 가슴 부위의 엄청난 통증은 물론이고 마치 심한 독감처럼 고열과 근육통을 동반한다. 젖을 먹여 아기를 기르는 일은 대부분의 암컷 포유류가 본능적으로 해내는 일임에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 직후부터 바로 수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나 수유의 과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서인 것일까. 나는 학교나 병원 어디에서도 모유 수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바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배 속에서 아기가 나왔다는 사실보다도 내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는 사실이 훨씬 더 판타지적으로 느껴졌다.

가령, 제왕절개술을 시행한 산모 대부분은 개인이 느끼는 통증이나 회복 여부와는 상관없이 병원의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수술 후 사흘째부터 모유 수유를 시도하도록 요구받는다. 병원에서는 출산 후 사흘이 지난 시점부터 약물의 투여를 최소화하고 ‘수유콜’(아기에게 수유를 하러 오라는 전화)을 통해 일방적으로 수유를 지시하고 학습하게 하는데, 이때 산모의 선택권은 존중되지 않는다. 수유실에는 노련한 간호사가 상주하며 산모가 입실할 때마다 모유 수유의 중요성과 필요성, 장점, 방법 등을 되풀이해 설명한다. 산모들은 긴 의자에 일렬로 앉아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시늉에 가까운 병원에서의 모유수유는 퇴원 후 조리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소설에서 가슴 마사지를 받는 '그녀' 옆에서 구경꾼처럼 박수를 치는 "남편"(15쪽)의 형상은 모유 수유가 공동 양육자의 참여가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갓 태어난 아기는 신생아실에서 머물며 정해진 면회 시간 외에는 부모라 하더라도 창 너머로 아기를 바라보는 것조차 제한되는데, 엄마에게만큼은 모유 수유라는 행위를 매개로 아기와 대면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작고 소중한 생명을 접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기회는 “자신과 아기가 서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정"(16)하는 계기가 되며, 아기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내재화하는 역할을 한다.

"산모님 더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이번 텀은 분유로 보충할게요."(16쪽)라는 수유실 선생님의 말이 그녀에게 "꾸중"(16쪽)처럼 들리는 것은 부족한 것을 보태어 채운다는 의미의 '보충'이라는 표현 때문일 것이다. 출산 후 내가 머물렀던 조리원에서는 모유 수유를 무척이나 강조했다.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국제모유수유전문가’라는 명찰을 단 간호사가 방문해 모유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가슴상태를 체크했으며, 퇴식구에 둔 식판을 확인하고 식사량을 더 늘리라거나 미역국의 국물을 모두 마셔야 젖이 잘 나온다는 친절한 조언을 전하기도 했다. 또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모유 수유 강좌에서는 모유가 아기에게 얼마나 이로운 음식인가를 설명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이렇듯, “젖 잘 나오는 산모”(17쪽)가 인정받는 조리원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모유량이 많은 "처음 본 여자에게 이상한 질투"를 느끼며,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겠다는 오기”(16쪽)를 부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진다.4)

 

아기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다. 내가 낳은 아기도 타인이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아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벅차면서도 고통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정체 모를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17쪽)

 

가슴 마사지조차도 어색해하던 그녀는 모유량이 부족하다는 수유실 간호사의 지적에 새벽 3시의 “밤중 수유콜”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급격한 태도 변화를 보인다. 반복적인 모유 수유 행위는 어느 사이엔가 그녀에게 “모유 수유 성공이 아기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거 같”(16쪽)은 비정상적인 책임감과 의무감을 부여하며, 그녀 스스로가 벅차면서도 고통스러운 감정과 함께 자신을 아기의 주 양육자로 인식하게 되는 직접적인 사건으로 작용한다. 김유담의 소설은 여성이 젖이라는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돌봄의 자기윤리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기검열과 자기착취로 이어지는 돌봄 노동의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병원과 산후조리원을 거치며 형성된 자기윤리는 여성이 자기 스스로를 돌봄 노동의 회로 속에 가두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이것을 구태여 모성윤리가 아닌 자기윤리라고 명명하는 까닭은 사회의 의식구조가 개선되고 여성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모성윤리라는 말이 어느새 폐어(廢語)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모성윤리가 신화의 영역으로 사라지고 자기윤리가 되는 과정은 겉보기에 합리적이며,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돌봄의 자기윤리는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여성의 신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띠며, 병동과 산후조리원이라는 폐쇄된 환경에서 일방적으로 주입된다는 점에서 주체적으로 구성된 동력을 상실한다. 게다가 모유가 아기에게 이롭다는 의학적·과학적 팩트는 윤리적 선택지를 더욱 좁힌다. 지난한 돌봄의 나날 속에서 자기윤리를 시험받는 여성들의 비명이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등의 복지제도가 여성의 삶을 보호한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단지 모유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돌봄의 회로 속에 갇히게 된 여성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간을 통해 더없이 훌륭한 돌봄 인력으로 재탄생한다. 그렇다면, 모성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여러 제도들은 돌봄에 바쳐질 인력을 양산해 내는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어쩌면 국가는 이런 방식으로 특별한 추가 비용 없이 효과적으로 사회의 재생산을 도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출산 후 아기를 기르면서 나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음에도 젖을 먹여 아기를 기르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돌봄의 책임이 하나둘 나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분노하고 또 분노하면서도 돌봄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벗어나기는커녕 더욱더 확고한 자기윤리에 갇혀 자기착취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최근 발표된 통계청의 ‘2020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은 이러한 음모론에 무게를 실어 준다.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6세 이하의 자녀를 둔 220만 명의 여성 가운데 일을 하지 않는 비취업 여성은 절반 정도에 이르며, 이 중 경단녀는 39.8%에 달한다. 경력 단절 사유 중 1위는 단연 육아이다.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취업 여성이 돌봄 노동에 할애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남성의 두 배 이상이며, 이러한 불평등은 맞벌이 가구나 여성 외벌이 가구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 육아 등의 돌봄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돌봄 노동을 담당하게 되어 버리는 문제적 현실을 거듭해서 보여 준다. 이 시대의 돌봄 노동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자아실현 기회를 박탈하고, 가정 내에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불평등을 외면한다.

그렇다면, 직장으로 돌아간 나머지 반의 삶은 어떠할까. 김유담은 소설 <돌보는 마음>에서 복직을 위해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여성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섬세한 필치로 그린다. 직장과 육아의 양립을 위해 피로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 '미연'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하다. 이 소설은 결국 '이순일들'이 없다면 나머지 반 역시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사실만을 강조한다. 돌봄의 무한회로 속에서 여성들은 자기 스스로는 물론이고, 또 다른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김유담의 소설은 엄마가 되면서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정체 모를 새로운 세계”(17쪽)에 놓이게 된 여성들의 분투를 통해 이 시대 여성이 처한 비관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진보와 퇴보 사이에서, 평등과 불평등의 기로에서 늘 뒷걸음질 치는 여성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평등과 자유를 고민해 볼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3. 창조자의 자기윤리와 모성 :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공간을 배경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정상성과 비정상성, 모성과 성장 등을 주제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데이지 자신이 왜 남들보다 조금 이른 순례를 떠나려 하는지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다. 소설은 ‘마을’이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데이지'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성년의식인 '순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시초지로 떠난 순례자들이 모두 다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받아들인 데이지는 순례 의식을 최초로 고안해 낸 존재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낀다. 고민 끝에 금서 구역을 찾은 그녀는 그곳에서 "릴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 도시를 만들었다."5)는 올리브의 기록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을의 탄생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성장소설과 추리소설의 구도 위에서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유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은 미래의 모성을 현재적 차원에서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새롭게 읽힌다. 올리브의 (생물학적) 어머니인 릴리 다우드나는 이 마을의 창시자이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미국에 정착한 이주민이자 뛰어난 과학자였던 릴리는 어느 날부터 인간배아를 디자인하는 바이오해커 ‘디엔’으로 활동하며 부와 명성을 쌓는다. 안면장애 때문에 "스스로를 괴물과 같은 존재"(45쪽)로 여겼던 릴리는 “모든 문제가 자신이 태어나기로 결정된 그 순간에 있다고 생각"(45쪽)하며, 유전병 사전 진단을 받지 않은 채 자신을 낳은 부모의 무책임한 결정을 원망한다. 차별과 배제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릴리는 배아 디자인을 통해 신인류라 불리는 완벽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상성에 대한 자신의 욕망과 신념, 의지를 드러낸다. 마흔 살이 되었을 무렵 갑자기 아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릴리는 자신의 클론 배아를 복제해 ‘나’(올리브)를 만들고 그즈음 종적을 감춘다.

 

릴리에게 아이를 만드는 일은 아주 쉬웠다. 릴리는 먼저 자신의 클론 배아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릴리가 그녀 자신에게 주고 싶었던 가장 좋은 특성들, 아름다움과 지성, 호기심과 매력을 모두 유전자에 새겨 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인공 자궁에 조심스럽게 옮겼고 발생 과정의 모든 유전학적 노이즈를 섬세하게 통제했다.

그리고 내가 생겨났다.

릴리가 나의 결함을 눈치챈 것은 발생 초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자인이 예정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는 전체 프로세스에 항상 포합되는 과정이었다. 실수는 늘 일정 비율로 일어났고 그것을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배아는 배아일 뿐이다. 폐기하고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를 폐기하는 것은 릴리에게 어떤 종류의 죄책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릴리는 내가 그녀와 똑같은 유전병을 가진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즉시 폐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릴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릴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46-47쪽)

 

미래의 아기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길러지는 것일까. 복제된 배아는 유전자 디자인을 거쳐 완벽하게 설계되며, 임신과 출산은 인공자궁에 의해 손쉽게 해결된다. 갓 태어난 아기는 로봇에 의해 길러져 생후 6개월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에게 보내진다. 이처럼, 김초엽이 그린 미래에는 임신과 출산, 양육을 담당하는 모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로봇과 사이보그는 여성을 대신해 사회적 재생산의 역할을 담당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로봇을 어떤 유기적 총체성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고향 없는 피조물’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원천을 거부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즉, 이들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성애의 규범과 이분법적인 성역할에 포획되지 않는데, 이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성역할의 구별이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자체를 지우는 이상적 상태를 만들어낼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6)

신인류가 장악한 도시에서는 낙태에 관한 논쟁 역시 불필요하다.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 만들어지는 제품에 가까운 아기(배아)는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전까지는 생명일 수 없으며 조그마한 노이즈라도 발견되는 날에는 그 즉시 폐기된다. 이런 세상에서라면 낙태는 더 이상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일 수 없으며 낙태라는 개념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은 철저한 계획 하에 배아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거쳐 인공 자궁에 이식된 '나'가 릴리의 계획대로 완벽하지 않음으로써 급반전된다. 폐기라는 당연한 선택지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도 릴리는 주저하며 망설인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에(48쪽) 있어 릴리는 창조자의 자기윤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릴리를 통해 구현된 미래의 모성은 모든 생명체가 지닌 저 너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결국 릴리는 나에게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그건 릴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48쪽)라는 올리브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는 릴리가 다른 한쪽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릴리는 자신과 똑같은 안면장애를 갖게 될 배아(올리브)를 위해 자신이 디자인한 신인류의 배아들을 모두 폐기하고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존재를 만든 후, 그들이 모여 살아갈 커뮤니티를 구상한다. 릴리의 올리브를 위한 마을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며 이 마을의 오랜 풍습인 순례란 이들과 다른 존재인 신인류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든 것을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결론적으로 김초엽은 릴리의 극단적인 자기윤리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집요하게 여성을 억압해 온 기존의 장치들을 전복시키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발견된다. 순례에 나타난 창조자로서의 자기윤리는 모체를 매개로 쌓아 올린 퇴행적이고 모순적인 방식의 현재적 돌봄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서 여성은 모체로서의 몸을 벗어나 자유롭게 존재하며, 돌봄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하거나 또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도 우리는 모체로서든, 창조자로서든 돌봄 자기윤리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자기윤리의 정당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각기 다른 욕망이 비록 예상할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1) 가능하다면, 나는 이 글을 '생활 비평'이라고 나름의 이름을 붙인 후에 논의하고 싶다. 생활 비평이란,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을 지닌 '나'가 일상생활 속에서 갖게 된 비평적 고민을 문학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로, 이 글에서 '나'는 한 아이를 막 낳고 기르기 시작한 '엄마'이자 비평가라는 두 개의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2) 수전 그리핀, 김하현 역, <페미니즘과 엄마됨>, <분노와 애정>, 시대의창, 2019, 95쪽.

3) 김유담, ‘조리원 천국’, <릿터>18, 2019 6/7, 민음사, 15쪽. 이하 쪽수만 표기함.

4) 모유수유의 과정에서 느끼는 모순과 양가적 감정에 대해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아이의 젖 빠는 행위는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며 무능감 또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는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즐거움을 유발하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애정 어린 관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에이드리언 리치, 김하현 역, ‘분노와 애정’, “분노와 애정”, 시대의창, 2019, 156쪽.

5) 김초엽, ‘순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20, 23쪽 이하 쪽수만 표기함.

6) 도나 해러웨이, 황희선 역, <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책세상, 2019.

 

박윤영

2016년 <실천문학> 신인상(평론) 등단, <실천문학>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