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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째주 · 2025
[역사를 보다 7월 둘째주] 바스티유 함락 236주년, 광장에서 울린 자유의 함성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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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다 7월 둘째주] 바스티유 함락 236주년, 광장에서 울린 자유의 함성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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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군주제의 억압을 상징하던 바스티유 감옥을 포위해 마침내 함락시켰다. 수감자는 일곱 명에 불과했지만, 왕권의 자의적 구금과 공포를 철거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돌처럼 무거웠던 성벽이 무너지자 “왕이 아니라 시민이 주권자”라는 선언이 대서양을 건너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프랑스 한 나라의 반란이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 자유 · 평등 · 박애 ― 세 단어가 이후 두 세기를 관통해 인권의 기초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혁명은 절정에서 곧바로 결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봉건제 해체와 인권선언 채택이라는 위대한 성과 뒤에는 자코뱅의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전쟁과 제국, 빈 회의 체제 같은 좌절과 반동이 이어졌다.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는 데는 네 시간이 걸렸지만, 억압 없는 제도를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고, 시민은 해방되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다스리는 책임을 지게 된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236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긴장을 경험한다.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자. 2016 ~ 2017년의 촛불집회가 거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권력 감시와 제도 개혁이 뒤따르지 않으면 ‘광장의 함성’은 곧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는 경고도 함께 남겼다. 디지털 시대에는 SNS와 빅데이터를 통해 여론이 실시간으로 분출되지만, 바로 그 기술이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감옥’을 구축할 위험도 상존한다. 정보 독점과 감시가 강화될수록 우리는 18세기의 바스티유처럼 투명성을 요구해야 한다.

 

바스티유는 또한 연대의 급진성을 상징한다. 실패한 농민 봉기와 흉년에 내몰린 노동자, 그리고 변혁을 꿈꾸는 계몽주의 지식인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혁명은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다층적인 정체성을 지닌 시민으로 살아간다. 젠더, 이주, 기후, 세대 갈등이 교차하는 복합 위기 속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고 연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과거보다 절실해졌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이 21세기 파리 교외의 빈곤과 경찰 폭력을 다루며 다시 ‘혁명 이후의 과제’를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혁명의 이상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반복해서 시험대에 오른다.

결국 바스티유 함락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분노의 정당성을 넘어 제도의 지속성을 확보하라는 요청이다. 한순간의 함성은 성벽을 무너뜨리지만, 그 자리에 세워질 새로운 질서는 시민의 참여와 협력 ― 그리고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이해하려는 상상력 ―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7월 14일이 매년 불꽃놀이로만 소비된다면 혁명의 의미는 박제된 기념일로 남을 뿐이다. 오늘도 거리와 온라인 공간에서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바스티유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유는 쟁취보다 유지가 어렵고, 혁명은 완결된 과거가 아니라 언제든 현재형으로 소환되는 과제다. 그러므로 236년 전 광장에 울려 퍼진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선언은, 지금도 우리 일상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이어져야 할 함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