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러 간 사람이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특성화고 학생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갑니다. 성실하게 일하지만 실적 압박과 어른들의 외면 속에서 점점 무너지고, 끝내 세상을 떠나죠. 영화의 후반부는 한 형사가 '왜 이 아이가 죽었는가'를 끈질기게 되짚는 과정입니다.
영화가 가장 아프게 보여주는 건, 소희의 죽음이 한 사람만의 불운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학교도, 회사도, 교육청도 저마다 조금씩 책임을 미뤘고, 그 빈자리에서 한 사람이 스러졌습니다. 형사의 질문은 단순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멈춰 세웠다면 달랐을까.
영화 후반부 내내 형사 유진은 묻고 또 묻습니다. 회사는 실적표를 들이밀고, 학교는 취업률을 말하고, 교육청은 규정을 읊죠. 다들 자기 자리에서 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틀리지 않은' 자리들을 다 합치고 나면, 한 아이가 사라진 빈자리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빈자리를 오래 들여다봅니다.
2026년 6월 1일, 그 질문이 다시 현실로 왔습니다. 이날 대전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나 노동자 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고 원인과 책임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이 글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다섯 사람이 그날 아침 그저 일하러 나갔다는 사실이죠.

다음 소희 (2022), 정주리 감독.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의 죽음 뒤에 누가 있었는지를 끈질기게 되짚는 드라마의 한 장면.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영화가 짚은 대로, 일터의 죽음은 늘 비슷한 구조를 그립니다. 위험은 현장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쏠리고, 책임은 여러 곳으로 흩어집니다. 산업재해 통계가 해마다 비슷한 숫자를 반복하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릅니다. 사고가 나면 원인을 찾지만, 그다음 현장은 또 비슷하게 돌아가죠.
한국에서 일터의 죽음은 드문 사건이 아닙니다. 해마다 적지 않은 노동자가 일을 하다 목숨을 잃고, 사고의 이름만 바뀐 채 비슷한 장면이 거듭됩니다. 폭발이든 추락이든 끼임이든, 그 끝에는 늘 '그날 아침 출근한 사람'이 있죠. 사고마다 원인 조사가 이어지지만, 통계의 곡선은 좀처럼 가파르게 꺾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한 가지를 남깁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넘기지 말라는 것. 소희를 따라간 형사처럼, 우리도 물어야 합니다. 그 일터는 안전했는가. 누가 그 안전을 책임졌는가. 다음 사람은 돌아올 수 있는가.
'다음 소희'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 서늘합니다. 소희 다음에 또 다른 소희가, 또 다른 이름이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일터의 안전을 '비용'으로만 셈하는 한, 그 줄은 쉽게 끊기지 않습니다. 영화가 남기는 건 분노보다 한 가지 다짐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다음 이름은 막아 보자는 마음이죠.
통계 속 숫자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이름이고 하루였습니다. 일하러 간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 당연한 일이 정말 당연해질 때까지 영화가 던진 질문은 계속 유효합니다. 숨진 다섯 분의 명복을 빕니다.
위험은 현장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쏠리고 책임은 흩어집니다. 다음 소희가 보여준 구조입니다.
이 글은 특정 주체의 잘못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섯 노동자가 일하다 숨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고 뒤 원인을 찾되, '다음 사람은 돌아올 수 있는가'를 계속 물어야 현장이 바뀝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