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눈물, ‘산재 철옹성’을 무너뜨리다… 서사가 쏘아 올린 노동 정책의 대격변
2025년 12월 11일,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 고용노동부의 2026년도 업무보고가 진행되던 대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통상적인 부처 업무보고가 화려한 성과 지표와 장밋빛 목표들로 채워지는 자리라면, 이날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단상에 오른 이 대통령이 준비된 원고를 잠시 내려놓고 안경을 고쳐 쓴 순간,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한민국 국정 최고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거창한 거시경제 담론이나 노동 개혁의 당위성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아픈 ‘가족사’였다.
“제 여동생이 청소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남들이 모두 잠든 새벽,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홀로 일하다 쓰러져 숨졌는데, 그게 산재 인정을 못 받더군요. 공단을 상대로 소송까지 했지만 결국 졌습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가혹한 일입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울림은 어떤 호통보다 강력했다. 그는 이내 박종길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산재 판정이 너무 짜다는(인색하다는) 주장, 없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엄격한 의학적 인과관계’라는 견고한 방패 뒤에 숨어 있던 노동 행정의 관료주의와 보수성에 대한 전면적인 쇄신 요구이자,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대통령은 이어 “법원의 판결 경향이나 학계 연구 결과를 봐서, 일반적으로 해주는 거라면 빨리 태도를 바꿔주는 게 맞다”며 공단의 판정 기준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이른바 ‘대통령의 눈물’이 쏘아 올린 산재 정책의 대전환이 예고된 순간이었다.
◆ 법원은 “주라”는데 공단은 “안 된다”… 19.8%의 ‘괴리’가 말하는 진실
대통령의 “판정이 짜다”는 지적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었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명확히 입증되는 ‘행정의 지체’ 현상을 정조준하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근로복지공단의 ‘최근 5년간 산재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 현황’ 자료를 심층 분석한 결과, 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에 불복해 제기된 행정소송에서 노동자가 승소(공단 패소)하는 비율은 해마다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11.2%였던 패소율은 2025년 현재 19.8%까지 치솟았다. 이는 공단이 “업무상 재해가 아니다”라며 문전박대했던 노동자 5명 중 1명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가 맞다”는 확정판결을 받아내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대통령이 언급한 뇌심혈관계 질환(과로사)과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행정과 사법의 괴리는 더욱 심각하다. 지난해 기준 뇌심혈관계 질환의 공단 불승인율은 60%에 육박했으나, 법원 소송에서의 구제율(노동자 승소율)은 38.7%에 달했다. 법원은 최근 업무 시간뿐만 아니라 업무의 강도, 정신적 스트레스, 근무 환경의 유해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회적·규범적 인과관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다. 반면 공단은 여전히 ‘발병 전 12주간 주당 평균 60시간 근무’와 같은 기계적인 ‘고용노동부 고시’ 기준이나 엄격한 의학적 수치만을 고수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대통령의 여동생 사례처럼 새벽 청소 노동은 신체 리듬을 파괴하고 급격한 기온 변화에 노출되는 고위험 직군임에도, 공단은 ‘기저질환(고혈압 등)이 있었다’는 이유로 불승인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며 “법원은 기저질환이 있더라도 업무가 이를 악화시켰다면 산재로 인정하는데, 공단은 여전히 과거의 기준에 머물러 있다. 대통령의 발언은 이 20%의 간극을 메우라는 강력한 주문”이라고 분석했다.
◆ “새벽 노동은 목숨 건 전쟁”… 현장의 기대와 안도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산재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노동 현장은 술렁이고 있다. 특히 입증이 까다로운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불승인이 두려워 신청조차 꺼리던 야간·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이번 발언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생존의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서울 여의도의 한 대형 빌딩에서 15년째 청소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박 모 씨(63·여)를 만났다. 그녀는 대통령의 사연을 전해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 “새벽 4시에 첫차를 타고 출근해서 쪼그려 앉아 대소변을 닦다 보면 무릎이고 허리고 성한 곳이 없어요. 하지만 아파도 참고 일합니다. 병원비도 걱정이지만, 일하다 아픈 걸 증명하려면 우리가 변호사를 사야 한다고 하니까 엄두를 못 내죠. 대통령이 자기 동생 일처럼 챙기겠다고 하니, 혹시라도 내가 쓰러지면 억울한 일은 안 당하지 않겠나 싶어 큰 위안이 됩니다.”
택배 노동자 이 모 씨(45)의 목소리에도 기대감이 묻어났다. 그는 “동료가 과로로 쓰러져도 공단은 ‘원래 혈압이 높았다’, ‘술 담배를 했다’며 개인 질환으로 몰아가는 게 다반사였다”면서 “이번 기회에 ‘수치’가 아닌 ‘사람’이 먼저인 기준으로 바뀌어야 한다. 입증 책임을 힘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정보를 가진 공단과 기업이 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산재 인정의 패러다임이 ‘의학적 증명’에서 ‘사회적 보호’로 전환되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 ‘감성 리더십’의 역설… 기금 재정은 누가 책임지나
그러나 대통령의 개인적 서사가 국가 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이른바 ‘감성 리더십’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산재보험은 국민 세금이 아닌, 노사가 납부하는 보험료, 특히 기업이 전액 부담하는 기금으로 운영되는 ‘책임보험’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재계와 경영자총협회(경총)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팀 임원은 “대통령의 안타까운 사연은 이해하지만, 산재 판정은 철저히 과학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기반해야 한다”며 “대통령의 감정이 개입되어 인정 범위가 무분별하게 넓어지면, 업무와 무관한 질병까지 산재로 둔갑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의 재정 추계 시뮬레이션 결과도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노동경제학회의 분석에 따르면, 뇌심혈관계 및 근골격계 질환의 산재 인정률이 현재보다 10%포인트만 상승해도 연간 최소 5,000억 원에서 최대 8,000억 원의 추가 보험 급여 지출이 예상된다. 여기에 최근 급증하고 있는 직장 내 괴롭힘 등 정신질환 산재까지 폭넓게 인정될 경우, 추가 소요 재정은 1조 원을 훌쩍 넘길 수 있다.
산재보험기금은 저출산·고령화와 경기 침체로 인해 수입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정 범위 확대는 필연적으로 보험료율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기업의 인건비 부담 증가와 고용 위축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망하는 집안이 없게 하라”는 대통령의 선의는 훌륭하지만,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생략되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정의의 실현인가, 원칙의 붕괴인가
대통령의 눈물은 강력했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당장 산재 인정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실무 지침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공단 내부에서는 “기존에 기각됐던 애매한 사건들은 전향적으로 승인하라”, “감사원 감사보다 대통령실의 의중이 더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변화가 일시적인 ‘충격요법’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익명을 요구한A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발언은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한 강력한 드라이브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행정의 예측 가능성을 흔들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널뛰는 행정이 아니라, 의학적 엄밀함과 사회적 보호 사이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며 “법원 판결과의 괴리를 줄이는 것은 맞지만, 무조건적인 퍼주기식 인정은 기금 고갈을 앞당겨 미래 세대 노동자들의 안전망을 위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 대한민국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억울한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와 지속 가능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이 쏘아 올린 공은 이제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그것은 정의의 실현인가, 아니면 원칙의 붕괴인가. 그리고 그 늘어난 청구서는 과연 누가 감당할 것인가. 감성을 넘어선 냉철한 사회적 합의와 정교한 정책 설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