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모델들이 삼성전자 '갤럭시 북6 시리즈' 출시를 기념해 열린 팝업스토어에서 교보문과와 협업한 AI 도서 추천 서비스 'AI 책봇'을 선보이고 있다.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모델들이 삼성전자 '갤럭시 북6 시리즈' 출시를 기념해 열린 팝업스토어에서 교보문과와 협업한 AI 도서 추천 서비스 'AI 책봇'을 선보이고 있다.

 

2025년 9월, AI 기업 앤트로픽이 작가들에게 15억 달러(약 2조 원)의 합의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저작권 역사상 최대 규모다. 지식재산권 전문 변호사 세실리아 지니티는 이를 "AI 산업의 나프스터 모먼트"라고 명명했다.

나프스터. 2000년대 초 음악 산업을 뒤흔든 불법 다운로드 서비스다. 음악 산업은 나프스터와의 법정 싸움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 승리가 산업을 구하지는 못했다. 진짜 변화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같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법정에서의 승리는 시간을 벌어줬을 뿐, 산업의 미래를 결정한 것은 "어떻게 기술과 공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지금 전 세계 출판계가 같은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들은 나프스터 시대의 음악 산업보다 훨씬 빠르게 배우고 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해외 출판계의 대응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다. 펭귄랜덤하우스는 모든 도서의 저작권 페이지에 "이 책의 어떤 부분도 인공지능 기술이나 시스템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복제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미국작가협회는 OpenAI와 메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프랑스에서는 출판조합과 작가조합이 연합하여 메타를 파리 법원에 세웠고, 독일에서는 음악저작권협회가 OpenAI를 뮌헨 법원에 끌어들였다. 일본에서는 스튜디오 지브리, 반다이남코, 슈에이샤 등 19개 콘텐츠 기업이 연합 성명을 발표하며 OpenAI의 영상 생성 AI 'Sora 2'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시기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했다. "우리 허락 없이 우리 것을 가져가지 마라." 현재 전 세계 법정에서 70건 이상의 AI 저작권 소송이 진행 중이며, 2025년 한 해에만 소송 건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디즈니, 유니버설, 워너브라더스 같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까지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방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이기더라도 AI 기술의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메타가 소송 답변서에서 밝혔듯이, "AI 개발자가 수백만 명의 작가와 개별 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말은 냉소적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출판계는 영원히 싸우기만 해야 하는가?

 

2025년 하반기부터, 해외 출판계의 전략에 미묘하지만 본질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단순한 거부에서 조건부 수용으로의 전환이다.

앤트로픽의 15억 달러 합의금이 그 전환의 상징적 사건이다. 앤트로픽은 Library Genesis, Pirate Library Mirror 등 불법 복제 사이트에서 48만 2,460권의 도서를 다운로드하여 AI 모델 '클로드'를 훈련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은 AI 학습 행위 자체는 "변형적 사용"으로 공정이용에 해당할 수 있다고 봤지만, 불법 복제물을 다운로드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었다. 결국 앤트로픽은 작품당 약 3,000달러, 총 15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출판계의 승리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미국작가협회 CEO 메리 라센버거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 합의는 AI 기업들이 저작권자에게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고도 혁신과 경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이것은 "AI 훈련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가격을 지불하라"는 협상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같은 흐름이 음악 산업에서도 나타났다. 유니버설 뮤직은 AI 음악 생성 기업 Udio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다가, 2025년 10월 합의와 함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워너뮤직도 Udio 및 또 다른 AI 기업 Suno와 유사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들은 2026년 "완전히 승인된 음악으로만 훈련된" 새로운 구독 서비스를 함께 출시할 예정이다. 소송에서 합의로, 합의에서 파트너십으로. 적에서 동업자로의 전환이다.

 

 

이 모든 변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옵트인(opt-in)'이다.

기존 AI 기업들의 논리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이었다. 저작권자가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면 사용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 아래서 AI 기업들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콘텐츠를 학습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가 일일이 자신의 작품을 찾아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하는 구조였다. 수백만 명의 작가가 수십 개의 AI 기업을 상대로 각각 거부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출판계가 요구하는 것은 이 권력 구조의 전복이다. '옵트인' 방식, 즉 저작권자가 명시적으로 동의해야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변경이 아니다. 누가 기본값을 가지느냐의 문제, 즉 권력의 문제다.

유니버설 뮤직과 Udio의 라이선스 계약이 '옵트인' 방식을 채택한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본의 19개 콘텐츠 기업이 OpenAI에 대해 연합 성명을 낸 이유도 같다. 그들은 OpenAI의 옵트아웃 시스템이 "일본 저작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일본법은 사전 동의를 요구하며, 사후 이의제기에 기반한 사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뮌헨 법원이 OpenAI에 대해 유럽 최초의 AI 저작권 침해 판결을 내린 것도 이 흐름의 일부다. 독일 음악저작권협회 GEMA의 CEO 토비아스 홀츠뮐러는 판결 후 이렇게 선언했다. "인터넷은 셀프서비스 매장이 아니며, 인간의 창의적 성취물은 무료 템플릿이 아니다."

그러나 개별 작가나 소규모 출판사가 거대 AI 기업과 일대일로 협상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 메타의 항변이 틀린 것은 아니다. 수백만 명과의 개별 협상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혁신적인 해법이 영국에서 나왔다. 2025년 4월, 영국 저작권라이선싱기관(CLA)은 세계 최초의 'AI 훈련용 집단 라이선스' 개발을 발표했다. 이 라이선스는 개별 협상력이 없는 소규모 작가들도 AI 훈련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작가들을 대표하는 Authors' Licensing and Collecting Society(ALCS)의 CEO 바바라 헤이스는 "회원 설문조사에서 81%가 개별 라이선스가 불가능한 경우 집단 라이선스를 통해 보상받기를 원한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메타의 "개별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해법이기 때문이다. AI 기업은 더 이상 그 핑계를 댈 수 없게 된다. CLA의 CEO 맷 플레거는 "혁신가들이 변형적 생성 AI 기술을 개발하면서도 저작권을 존중하고 권리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할 수 있는 명확하고 합법적인 경로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는 단순한 방어가 아니다.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저작권 생태계의 설계다.

흥미로운 점은 법정에서의 승패가 반드시 최종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5년 11월, 영국 고등법원은 Getty Images와 Stability AI 간의 소송에서 Stability AI의 손을 대부분 들어줬다. Getty는 Stability가 자사 웹사이트에서 1,200만 장의 이미지를 무단 스크래핑하여 AI 모델을 훈련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사 조애나 스미스는 "Stable Diffusion AI는 저작물을 저장하거나 복제하지 않으므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기술적으로 보면 AI 기업의 승리다.

그러나 법률 전문가들은 이 판결이 핵심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AI 모델이 저작권 자료로부터 학습하는 과정 자체가 적법한가?" 판사 스미스도 인정했다. "창조 산업과 기술 산업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라는 "진정한 사회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라고.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법정은 시간을 벌어줄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법정 밖에서 만들어진다. 영국의 집단 라이선스, 음악 산업의 파트너십 모델, 일본의 산업계 연합 성명, 앤트로픽과의 15억 달러 합의 — 이 모든 것이 법정 판결과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는 '진짜 협상'의 조각들이다.

AI와 저작권의 충돌은 음악, 영상, 이미지 등 모든 콘텐츠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출판계가 최전선에 서 있는가?

텍스트는 대형언어모델(LLM)의 핵심 연료다. ChatGPT, Claude, Gemini 등 현재 가장 주목받는 AI 서비스들은 모두 텍스트 기반이다. 이들이 "지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인류가 수천 년간 축적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의 상당 부분이 책이다. 또한 책은 ISBN으로 명확하게 식별된다. 앤트로픽이 불법 복제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한 48만 2,460권의 도서 목록이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추적 가능성이 법적 대응과 협상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출판계는 저작권 보호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텐베르크 이래 500년 이상, 출판 산업은 저작권이라는 개념과 함께 진화해왔다. 미국작가협회는 1912년에 설립되었고, 영국의 저작권라이선싱기관은 수십 년간 복사권 관리 경험을 축적해왔다. 이 제도적 역량이 AI 시대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출판계가 다른 콘텐츠 산업보다 먼저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다.


해외 출판계의 AI 대응은 단순한 산업적 자기방어가 아니다. 이것은 "AI 시대에 창작물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하고 보상할 것인가"라는 문명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현재까지의 흐름을 종합하면, 세 가지 원칙이 부상하고 있다. 투명성 — AI 기업은 학습 데이터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EU의 AI법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동의 — 옵트아웃이 아닌 옵트인. 저작권자의 명시적 동의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보상 — 앤트로픽의 15억 달러 합의금, 영국의 집단 라이선스, 음악 산업의 파트너십 모델이 모두 "공짜는 없다"는 원칙을 확립하려는 노력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이 확립된다면, AI와 출판계는 공존할 수 있다. AI 기업은 합법적으로 고품질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고, 창작자는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출판계가 구축하려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2000년대 초 나프스터와의 전쟁에서 음악 산업은 법정에서 이겼지만, 산업 자체는 무너졌다. CD 판매량은 곤두박질쳤고, 수많은 음반사가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 스포티파이가 탄생했다.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모델이 음악 산업을 재건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작동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지금 출판계는 그 나프스터 모먼트를 통과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 산업이 겪었던 10년의 혼란을 단축하려는 듯, 출판계는 법정 싸움과 동시에 새로운 모델을 설계하고 있다. 영국의 집단 라이선스, 유니버설과 워너의 AI 기업 파트너십, 앤트로픽과의 역사적 합의 — 이것들은 모두 "스포티파이 이후"를 미리 준비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이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2026년에는 더 많은 법정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 더 많은 협상이 타결되거나 결렬될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확해 보인다. 출판계는 더 이상 "AI를 막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AI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완성되는 데는 아마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해외 출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한국 출판계, 더 나아가 모든 콘텐츠 산업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위기인가, 기회인가.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현명하게 배우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