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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째주 · 2024
[2월 1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검은 비는 방사능 낙진이자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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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검은 비는 방사능 낙진이자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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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리틀 보이'라 불린 이 폭탄은 3초 만에 도시 중심부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폭발 당시 약 8만 명이 즉사했다. 생존자들은 '히바쿠샤(被爆者)'라 불리며 평생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다나카 시게코는 폭심지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폭됐다. 당시 13살이던 그녀는 얼굴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켈로이드 흉터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었다.

역사 사건

일본 원폭 피해자.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원폭 투하는 전쟁 종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미국의 입장과 달리, 일본인들에게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피폭자들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 차별도 감내해야 했다. 결혼과 취업에서 배제됐고, 자녀들까지 2세 피폭자라는 굴레를 짊어졌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원폭의료법을 제정했지만, 피폭자 인정 기준이 까다로워 많은 이들이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냉전 체제 하에서 원폭 피해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했고,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Black Rain은 원폭 투하 20년 후 히로시마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야스코는 원폭 투하 당시 방사능 비를 맞았다. 외견상 건강해 보이지만 '검은 비를 맞은 여자'라는 소문 때문에 혼담이 번번이 무산된다. 삼촌 시게마츠는 조카의 결백을 증명하려 피폭 당시의 일기를 꺼내 보인다. 다나카 요시코가 연기한 야스코는 절제된 표정으로 내면의 불안을 드러낸다. 갑작스러운 탈모와 잇몸 출혈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평범한 일상을 갈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영화 스틸

Black Rain (1989),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 Production Company

영화는 원폭이 남긴 상흔이 단지 물리적 파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야스코의 혼담 실패는 피폭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시게마츠의 일기는 기억의 무게를 상징한다. 검은 비는 방사능 낙진이자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은유다. 역사 속 피폭자들처럼 영화 속 인물들도 보이지 않는 공포와 싸운다.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방사능 후유증은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이마무라는 흑백 화면을 통해 원폭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방사능의 공포가 과거의 일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피해자들 역시 히바쿠샤들이 겪었던 차별과 소외를 경험했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 아래 건설된 원전들은 언제든 재앙이 될 수 있다. 북한의 핵 개발, 러시아의 핵 위협 등 핵무기의 그림자는 여전히 인류를 위협한다.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전쟁의 참혹함을 넘어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야스코는 결국 백혈병으로 쓰러진다. 그녀의 죽음은 원폭이 남긴 시한폭탄이 터진 것이다. 79년이 지난 지금도 피폭자들과 그 후손들은 방사능의 유령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과연 핵의 시대를 끝낼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 모두가 검은 비를 맞게 될 운명일까? 인류가 만든 가장 파괴적인 무기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무력하기만 한 것일까?

공식 예고편

Black Rain (1989) —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