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9일,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서 라미즈 알리아 대통령이 정권 이양을 선언했다. 엔베르 호자의 철권통치를 이어받아 집권했던 그는 동유럽 공산정권 중 마지막까지 버티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스칸데르베그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은 환호했고, 47년간 지속된 유럽 최후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막을 내렸다. 호자가 건설한 75만 개의 콘크리트 벙커들만이 황폐한 대지 위에 남아 과거의 편집증적 고립을 증언했다.
알바니아 공산정권 붕괴.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알바니아 공산정권의 붕괴는 단순한 정치체제의 전환이 아니었다. 1967년부터 시행된 '무신론 국가' 정책으로 모든 종교가 금지되었고, 외국 방송 청취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국민의 3분의 1이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적대 계급' 출신은 3대에 걸쳐 처벌받았다.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광기는 중국과도 단교하게 만들었고, 결국 알바니아를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로 만들었다. 1990년 7월 대사관 농성사태로 시작된 균열은 2년 만에 체제 전체를 무너뜨렸다.
게르기 주바니 감독의 Slogans은 호자 시대 말기인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젊은 교사 안드레가 산골 마을에 부임하면서 겪는 부조리를 그린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전체주의의 광기를 해부한다. 마을 사람들은 산비탈에 돌로 만든 거대한 구호를 새기는 일에 동원되고, 누가 더 충성스러운 문구를 만드는지 경쟁한다. 주연 배우 아르탄 이마미는 순진한 지식인이 체제의 부조리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했다. 카메라는 황량한 산과 무의미한 구호들을 교차시키며 이념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Slogans (2001), 게르기 주바니 감독. ⓒ Production Company
역사적 사건과 영화는 '언어의 지배'라는 주제로 만난다. 호자 정권은 일상 언어까지 통제했고, 외래어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이름마저 검열했다. Slogans의 산비탈 구호들은 이런 언어 지배의 극단을 보여준다. 돌로 만든 글자들은 영구적이면서도 무의미하고, 거대하면서도 공허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더 큰 구호, 더 충성스러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은 체제가 어떻게 인간을 자발적 복종으로 이끄는지 보여준다. 붕괴 직전 알바니아 정권이 보인 언어적 경직성은 영화가 포착한 1970년대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알바니아의 경험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디지털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정교해졌고, 알고리즘은 새로운 형태의 사상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 산비탈의 돌 구호가 소셜미디어의 해시태그로 바뀌었을 뿐, 언어를 통한 지배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북한처럼 여전히 고립을 택한 체제들이 존재하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가짜뉴스와 선동이 횡행한다. 주바니 감독이 코미디로 포장한 공포는 형태를 바꾸어 계속된다.
폐쇄된 체제의 붕괴는 자유를 가져왔지만, 알바니아는 이후 피라미드 사기와 내전이라는 또 다른 혼돈을 겪어야 했다. 오랜 고립이 남긴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Slogans이 보여준 부조리한 웃음 뒤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산비탈을 뒤덮은 돌 글자들처럼, 전체주의의 흔적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그 돌들을 모두 치웠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새로운 구호들을 산비탈에 새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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