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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째주 · 2024
[6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적 사건은 '정상성의 붕괴'라는 주제로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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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적 사건은 '정상성의 붕괴'라는 주제로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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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늦은 봄, 뉴욕주 사라토가의 자유 흑인 솔로몬 노섭은 워싱턴 D.C.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그는 두 명의 백인 사업가가 제안한 서커스단 공연 계약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워싱턴에 도착한 그날 밤, 노섭은 약물에 취해 쓰러졌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노예상인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유인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의 항변은 묵살됐고, '플랫'이라는 새 이름을 강요받으며 루이지애나의 목화 농장으로 팔려갔다. 이후 12년간 그는 에드윈 엡스라는 잔혹한 농장주 아래서 비인간적인 노예 생활을 견뎌야 했다.

역사 사건

미국 노예제도 12년.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노섭의 납치는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19세기 미국 노예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북부의 자유주와 남부의 노예주로 분열되어 있었고, 1850년 도망노예법은 자유주에서도 도망 노예를 체포해 돌려보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법적 장치는 자유 흑인들조차 언제든 노예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시켰다. 노섭처럼 교육받고 재능 있는 자유 흑인들이 납치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으며, 한번 노예가 되면 법적 구제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노예제는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였고, 피부색만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잔혹한 시스템이었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12 Years a Slave는 노섭이 1853년에 출간한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영국 출신 흑인 감독인 맥퀸은 미국 노예제도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조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했다. 치웨텔 에지오포가 연기한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의 자존심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며,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에드윈 엡스는 노예제가 만들어낸 괴물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특히 루피타 뇽오가 연기한 노예 소녀 팻시의 모습은 노예제도가 여성에게 가한 이중의 폭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는 134분 동안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며, 역사의 어두운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영화 스틸

12 Years a Slave (2013), 스티브 맥퀸 감독. ⓒ Production Company

영화와 역사적 사건은 '정상성의 붕괴'라는 주제로 교차한다. 노섭은 하루아침에 자유인에서 노예로 전락했고, 영화는 이 급작스러운 신분 변화를 통해 노예제도의 본질을 드러낸다. 자유와 노예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그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법이나 정의가 아니라 폭력과 권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맥퀸은 긴 테이크와 정적인 카메라워크로 폭력의 일상성을 담아내며, 관객들이 그 불편함을 회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노섭이 나무에 매달려 발끝으로 겨우 땅을 디디고 있는 장면에서, 배경의 다른 노예들이 무심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은 폭력이 얼마나 깊이 내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노섭의 이야기가 21세기에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적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인종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은 여전히 미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2013년 영화 개봉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청년 트레이본 마틴 사건으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예제의 유산은 대량 투옥, 경찰 폭력, 경제적 격차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지속되고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이주노동자, 탈북민, 다문화 가정 등 새로운 타자들과 마주하며 우리 안의 편견과 차별을 성찰해야 할 시점에 있다.

솔로몬 노섭은 12년의 노예 생활 끝에 기적적으로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를 납치한 사람들은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그는 여생을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했지만, 1857년 이후 행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노섭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것이 그 시작이 아닐까. 당신은 오늘, 누군가의 인간다움을 온전히 인정했는가?

공식 예고편

12 Years a Slave (2013) — 스티브 맥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