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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째주 · 2024
[10월 1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큐브릭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권력의 위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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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큐브릭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권력의 위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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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1일, 프랑스 솜 강변의 진흙탕은 피로 물들었다. 영국군은 단 하루 만에 5만 7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의 기관총 앞에서 젊은이들은 밀물처럼 쓰러졌다. 솜 전투가 시작된 이날은 영국 군사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날로 기록되었다.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이 만들어낸 새로운 전장에서 인간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닌 소모품에 불과했다. 4개월간 지속된 이 전투에서 양측은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지만, 전선은 겨우 10킬로미터 움직였을 뿐이었다.

역사 사건

1차대전 참호전의 공포.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1차 대전의 참호전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비인간적인 전쟁 양상이었다. 산업혁명이 낳은 대량살상무기와 19세기적 전술의 충돌은 전례 없는 교착 상태를 만들었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가로지르는 700킬로미터의 참호선에서 병사들은 쥐와 이, 질병과 싸우며 죽음을 기다렸다. 지휘부는 안전한 후방에서 지도를 펼치고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참호 속 병사들에게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전쟁의 목적과 명분은 진흙 속에 묻혔고, 오직 생존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1957년 작품 Paths of Glory는 이러한 1차 대전의 광기를 냉철하게 해부한다. 영화는 1916년 프랑스군의 불가능한 공격 명령과 그 실패, 그리고 희생양 찾기를 그린다. 커크 더글러스가 연기한 닥스 대령은 자신의 부하들을 변호하지만, 군 수뇌부는 사기 진작을 위해 세 명의 병사를 총살하기로 결정한다. 큐브릭은 화려한 장군들의 저택과 진흙투성이 참호를 대비시키며, 전쟁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한다. 특히 총살 장면의 차가운 연출은 관객에게 전쟁의 부조리함을 뼈저리게 각인시킨다.

영화 스틸

Paths of Glory (1957), 스탠리 큐브릭 감독. ⓒ Production Company

역사적 참호전과 영화 속 재판은 모두 개인의 존엄성이 시스템에 의해 짓밟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호에서 병사들이 무의미한 돌격으로 죽어가듯, 영화 속 세 병사는 체면 유지를 위한 제물이 된다. 큐브릭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권력의 위계를 드러낸다. 장군들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병사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 이는 실제 참호전에서 지휘부와 병사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은유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기계 앞에서 인간은 숫자로 환원되고, 죽음은 통계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시스템의 폭력 앞에 무력한 개인들을 목격한다. 기업의 구조조정, 국가 간 분쟁,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개인의 희생은 '대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참호전의 병사들처럼, 현대인들도 보이지 않는 참호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운다. 디지털 감시, 알고리즘의 통제, 불평등의 심화는 새로운 형태의 참호를 만들어낸다. Paths of Glory가 보여준 권력과 개인의 대립 구조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다.

1차 대전의 참호에서 죽어간 수백만의 젊은이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총살당한 세 병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명분 앞에서도 희생될 수 있는 것인가? 진보라 믿었던 문명이 오히려 더 정교한 파괴와 억압의 도구가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큐브릭의 카메라가 포착한 전쟁의 부조리함은 여전히 우리 시대를 비춘다. 참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 참호를 벗어났는가?

공식 예고편

Paths of Glory (1957) — 스탠리 큐브릭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