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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4월 2째주] 최저임금

월 37만원의 노동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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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권리
게으를 권리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폴 라파르그 · 1880

2024년의 봄, 우리는 여전히 노동의 가치를 묻고 있었다. 장애인의 월 평균 임금이 37만원이라는 통계가 발표되던 그날, 누군가는 아침 출근길에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지하철에 올랐을 것이다. 그 커피값이 5천원이었다면, 장애인 노동자는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그 커피 두 잔을 살 수 있는 셈이었다.

기업들은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 부담금을 택했다. 계산은 간단했다. 사람을 쓰는 것보다 돈을 내는 것이 더 쌌다. 노동의 가치가 벌금보다 가벼운 사회, 그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풍경이었다.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권리』를 쓴 것은 1880년이었다. 산업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뒤덮던 시절, 그는 노동이 신성시되는 시대를 거스르며 인간의 게으름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게으름 자체가 아니었다. 노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노동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라파르그는 하루 3시간 노동을 주장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도 왜 여전히 긴 노동시간에 매여 있느냐고 물었다. 그로부터 1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시대에도 누군가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하루를 보낸다.

장애인 고용률이 낮은 이유를 물으면 기업들은 생산성을 말한다. 하지만 생산성이란 무엇인가. 시간당 얼마나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는가로만 측정되는 것일까. 한 사람이 일터에 존재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변화, 동료들이 배우는 다양성의 가치, 그런 것들은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최저임금위원회가 매년 여름 회의를 열 때마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팽팽히 맞선다. 몇 퍼센트를 올릴 것인가를 두고 밤을 새우며 싸운다. 그런데 정작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그 회의장에 닿지 않는다.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의 노예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공포가 인간을 옭아맨다고 보았다. 그러나 월 37만원의 현실 앞에서 그의 비판은 사치처럼 들린다. 게으를 권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다운 노동의 권리부터 보장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통계는 때로 잔인하다. 장애인 의무고용률은 3.1%지만 실제 고용률은 절반도 안 된다. 나머지는 부담금으로 대체된다. 사람의 자리를 돈이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합리라고 부르는가.

2024년 봄, 농가인구가 전체의 3.8%라는 소식도 들려왔다. 100명 중 4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우리의 먹거리를 책임진다. 최저임금을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각자의 사정에 맞게 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가 지역마다 다를 수 있는가.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과 지방에서 일하는 사람의 시간이 다른 무게를 가져야 하는가.

라파르그의 책은 결국 이런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단지 생존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인가. 월 37만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그 질문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노동의 신성함을 말하기 전에, 먼저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부터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장애인 의무고용 대상 기업의 실제 고용률
출처: 고용노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