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초, 재계는 또다시 중대재해 앞에서 몸을 낮췄다. 포스코, 한화, HD현대의 신년사에는 '안전'이라는 단어가 유독 무겁게 자리했다. 철강·조선·건설업계가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현장에서 매일 위험과 맞서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1970년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황정은의 소설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탄부들은 막장에 들어가기 전 서로의 등을 두드려준다. 살아서 나오자는 무언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위험한 줄 알면서도 매일 그곳으로 향했을까. 소설 속 한 인물은 말한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게 전부라고.
오늘날의 산업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4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874명. 하루 평균 2.4명이 일하다 목숨을 잃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사망자 수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법은 경영진을 처벌하고, 기업은 대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현장의 위험은 여전히 그대로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위험을 방치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노동자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선택지가 없는 선택이다. 후자는 기업과 사회의 책임이지만, 늘 전자의 문제로 치환된다.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거나,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았다거나. 개인의 부주의로 결론이 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취업자의 종사상 지위별 분포를 보면, 임시·일용직 노동자는 전체의 36.2%를 차지한다. 이들 대부분이 위험한 작업에 투입된다. 정규직은 관리하고, 비정규직은 작업한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묻지 않는다. 왜 늘 같은 사람들만 다치고 죽는지.
황정은은 탄부들의 일상을 그리면서 한 가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그들에게도 다른 삶이 가능했을까. 만약 탄광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무엇이 되었을까.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꿈꾸었을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바로 그 상상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기업들이 중대재해를 두려워하는 것은 처벌 때문이지, 사람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 신년사에 등장한 '안전'은 리스크 관리 차원의 단어일 뿐이다. 진짜 안전은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동료가 저녁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당연한 일상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며칠 전 뉴스에서 한 유족의 인터뷰를 봤다. 남편을 산재로 잃은 여성이었다. 그는 눈물 대신 이렇게 말했다. 위험한 줄 알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숙명이라고. 그 체념 섞인 목소리가 오래 귓가에 맴돈다.
2026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터로 간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있어도, 기업이 대책을 세워도,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일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위에 세워진 일상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이 매일 출근하는 건물 어딘가에서 누군가 죽었다면 어떨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추락했거나, 기계에 끼여 숨졌거나, 유독가스를 마시고 쓰러졌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 건물로 출근할 수 있을까.
2024년 1월 둘째 주, 포스코그룹은 신년사에서 산업재해를 언급했다. 지난해 수차례 발생한 사망사고 때문이었다. 한화오션도 국정감사에서 중대재해로 질타받았다. 고용노동부는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관리자 채용 지원을 발표했다. 뉴스는 담담하게 사실을 전한다. 포항의 제철소에서, 거제의 조선소에서, 이름 모를 작은 공장들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전태일평전을 쓴 조영래는 1970년대 청계천 피복공장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루 14시간 노동, 먼지로 가득한 작업장,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는 소녀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다. 법은 바뀌었고, 근로감독관이 생겼고, 중대재해처벌법까지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아직도 사람들은 일하다 죽는가.
조영래가 만난 전태일은 물었다. 왜 아무도 이들의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는가. 왜 신문은 이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가. 전태일은 결국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1970년 11월 13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의 시작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2023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828명이었다. 하루 평균 2.3명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건설현장에서 추락하고, 공장에서 기계에 끼이고, 화학물질에 중독되어 죽었다. 이들의 이름은 통계 속에 묻혔다.
당신은 이 숫자를 어떻게 읽는가. 828이라는 숫자가 단지 작년보다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하다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죽음을 숫자로만 읽게 되었을까.
전태일평전은 증언한다. 죽음은 숫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었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재봉틀을 돌리던 시다들, 하루 50원의 버스비를 아끼려 한 시간을 걸어 출근하던 소녀들, 폐병에 걸려도 일을 그만둘 수 없던 가장들. 그들에게 노동은 생존이었고, 작업장은 삶의 전부였다.
2024년의 작업장은 어떤가.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용광로 앞은 여전히 섭씨 1500도를 넘는다. 조선소의 크레인은 여전히 30미터 상공에서 움직인다. 반도체 공장의 화학물질은 여전히 노동자의 폐 속으로 스며든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의 일터는 안전한가. 당신이 만드는 제품 뒤에, 당신이 받는 서비스 뒤에 누군가의 위험한 노동이 숨어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광양의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철강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일하고, 거제의 조선소에서 만든 배로 운송된 물건을 소비한다.
『트라이앵글』이 조명하는 산업재해의 본질은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시스템의 실패다. 사고는 언제나 복합적 요인이 겹쳐 발생한다. 안전 장비의 미비, 과도한 공정 압박, 형식적인 안전 교육.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사슬처럼 엮여 참사를 만든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산재 사망자 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법이 있어도 집행이 미흡하고, 처벌이 있어도 예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원청의 책임은 하청으로, 하청의 책임은 다시 노동자 개인에게로 전가되는 책임 회피의 연쇄가 반복된다.
전태일이 죽은 지 54년이 지났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왔을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청년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여전히 하루 2명씩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며 그는 또다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까.
이 기사는 한국의 산업재해 현황을 미국 역사적 사건과 비교하며, 근본적 문제 해결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기사는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대부분의 산업재해 사망자가 발생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이 기사는 정부의 새로운 산업재해 예방 정책이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