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은 그대로인데 용량만 슬그머니 줄어드는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에 대한 제도적 제동이 걸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4월 14일(화) 한국소비자원, 한국소비자중심기업협회, 그리고 깨끗한나라·미래생활·에이제이·LG유니참·우일씨앤텍·웰크론헬스케어·웰킵스컨슈머블·유한킴벌리·제이트로닉스·한국P&G·호수의나라 수오미 등 국내 위생용품 제조·유통업체 11개사와 '용량 변경 등 중요정보 제공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기저귀·생리대·물티슈·화장지 등 위생용품의 내용량·규격·개수 등을 축소하는 경우 그 사실을 소비자와 한국소비자원에 반드시 알리고, 가격 안정화에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소비자원이 2023년 12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주요 9개 품목에서 37개 상품이 용량 축소 사례로 확인됐다. 2024년 4분기 모니터링에서도 주로 식품류 9개 상품에서 추가 축소가 확인됐다. 물가 상승 압력이 완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가격 표시 없이 용량만 줄이는 방식이 식품에서 위생용품·생활용품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꾸준히 지적돼 왔다.
이번 협약의 핵심은 "변경 사실의 사전 공지"다. 참여 기업들은 제품의 중량·용량·개수·규격이 5%를 초과해 감소할 경우, 그 사실을 제품 포장과 자사 온라인 홈페이지, 판매처 등을 통해 최소 3개월 이상 소비자에게 안내해야 한다. 기존 고시 체계에 따라 5% 초과 용량 변경을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을 경우 시정명령·공표명령·과태료 등 공정위 차원의 제재도 가능하며, 소비자원의 정기 모니터링 결과 공개가 이를 뒷받침한다.
소비자 단체의 반응은 엇갈린다. 한국소비자연맹은 "가격 인상보다 눈에 띄지 않는 용량 축소가 생활필수품에서 반복돼 왔던 만큼, 업계 자율이라도 고지 의무가 명문화된 것은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참여연대는 "자율협약만으로는 실효성이 제한적"이라며 "단위가격 표시 의무 품목을 확대하고, 불이행 시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위생용품 외에 식품·일반 가공품으로 협약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미 과자·라면·냉동식품 등 식품 분야에서는 2024년부터 유사 협약이 운영돼 왔지만, 생활용품 영역으로 확장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연합(EU)은 2025년 1월부터 모든 식품·생활용품에 단위가격(ℓ·㎏ 단위) 표시를 의무화했고, 프랑스는 2024년 7월부터 '축소 표기'를 라벨에 명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기업 측은 비용 부담을 우려한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불가피한 용량 조정이 발생할 때도 6개월 단위 공표 주기를 지키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소비자원과의 협의 창구가 원활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협약 이행 상황을 6개월 단위로 평가해 2026년 하반기 중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위생용품 11개사와의 자율협약은 용량 축소 고지 의무를 명시한 국내 첫 협약으로, 식품 이외 영역으로 규제 관행이 확장된 분기점이다.
공정위 직접 제재가 없는 자율협약이 현실에서 작동하는지가 향후 6개월 평가에 달려 있으며, 실효성이 입증되지 않을 경우 법제화로 전환된다.
가격 인상이 아닌 용량 축소 방식이 확대되면, 소비자물가지수가 왜곡돼 체감 물가와의 괴리가 더 커진다. 이는 통화정책의 신뢰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