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피로사회』가 2010년 독일에서 출간됐을 때, 128쪽짜리 얇은 책은 철학 에세이의 변방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 책은 10년 만에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21세기 노동·피로 담론의 표준이 됐다. 핵심 주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21세기의 피로는 타자의 착취가 아니라 자기 착취에서 온다."
한병철의 분석은 이렇다. 20세기까지 사회는 '규율 사회(disciplinary society)'였다. 공장, 학교, 군대가 사람을 "해야 한다(must)"는 명령으로 묶었다. 푸코가 분석한 세계다. 그러나 21세기는 '성과 사회(achievement society)'다. "할 수 있다(can)"는 긍정의 언어로 사람을 묶는다. 아무도 당신에게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다. 당신이 스스로 야근을 한다. 상사의 채찍은 사라지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자기 독려만 남는다.
이 구조에서 피로는 성취의 부산물이 아니라 시스템의 본질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이자 피고용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 착취에 저항할 수 있는 외부가 없다." 2026년 한국의 '포괄임금제'와 '카톡 업무 지시'는 이 분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법정 근로시간 안에 끝내지 못한 일은, 당신의 '능력 부족'으로 귀속된다. 그래서 야근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개선의 과정으로 감지된다.
한병철이 제시한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은 '긍정성의 폭력'이다. 20세기의 폭력은 '부정(不)의 폭력'이었다. 외부의 적과 대결하고, 규율 체계가 금지하는 것에 맞서는 방식이다. 그러나 21세기의 폭력은 '긍정(肯)의 폭력'이다. 더 많은 가능성, 더 많은 선택지, 더 많은 자기 계발 권고가 쏟아지며 개인을 소진시킨다. 우울증·번아웃·주의력 결핍은 모두 이 과잉 긍정성의 병리적 징후다. 한병철은 책의 2장에서 이를 "면역학적 타자의 소멸"이라 부른다.
한국 국가데이터처 2023년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 41분으로 OECD 평균 8시간 24분보다 43분 짧다. OECD 2025년 발표 기준 한국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1,901시간으로 OECD 평균(1,752시간)보다 149시간 길다. 두 통계는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적 쌍이다. 적게 자면서 많이 일하는 사회. 그 바깥에 어떤 '가능성의 과잉'이 쌓이는지는 직장인의 주말 자기계발 강좌, 주식·코인 정보 채널, 피트니스 앱의 사용 시간으로 측정된다.
이 책이 주4.5일제 시대에 주는 메시지는 역설적이다. 근로시간 단축만으로 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주4.5일제가 4.5일 동안 5일 치 업무를 압축하는 '고강도 단축'이 된다면, 성과 사회의 자기 착취 논리는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 한병철은 "시간을 단축해도 시스템이 그대로면 피로는 재분배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중소기업중앙회 4월 15일 조사는 이 경고의 현실적 증거다. 주4.5일제 도입 의향을 밝힌 중소기업은 32.5%에 그쳤다. 반대 이유 1위는 '인건비 부담'(58.4%). 이는 4.5일에 5일 치 생산을 맞추기 위한 '압축 노동'의 가능성을 이미 경영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다. 한병철이 경고한 '피로의 재분배'는 정책 설계의 실패로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 책을 비관의 자리에 두지 않는다. 마지막 장 '깊은 피로'에서 그는 "깊은 피로는 명상적 관찰의 능력이기도 하다"고 쓴다. 피로가 자기 착취의 결과일 때는 파괴적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수용할 때는 새로운 감응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가 말한 무위(無爲)의 덕'을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한다. 한가롭게 보내는 시간, 목적 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성과 사회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그는 본다.
주4.5일제가 이 '깊은 피로'의 시간을 만들 수 있을지는 제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개별 노동자가 그 시간에 새로운 자기계발을 시작한다면, 제도의 의미는 소실된다. 반대로 그 시간에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수용한다면, 한병철이 말한 저항의 가능성이 열린다. 한병철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쓴다. "오로지 무엇이 인간인지를 묻는 물음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피로를 치유한다." 2026년 4월 주4.5일제가 시작된 아침, 그 질문이 다시 열린다.
이번 주 추천 독서: 한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 128p). 병행 독서로 한병철의 후속작 『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 2014), 『심리정치』(문학과지성사, 2015)를 추천한다. 한병철 3부작을 순서대로 읽으면, 주4.5일제 시대 한국 사회의 피로가 어떤 구조 위에 서 있는지가 입체적으로 보인다.
한병철의 '성과 사회' 개념은 한국 포괄임금제·카톡 업무 지시의 핵심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는 이론적 도구다.
우울증·번아웃·주의력 결핍은 규율 사회의 외부 폭력이 아니라, 성과 사회의 '긍정성의 폭력'이 빚어낸 구조적 징후다.
주4.5일제가 '압축 노동'으로 변질될 경우, 한병철이 경고한 '피로의 재분배'가 정책 실패의 형태로 현실화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