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교수는 1993년 이후 한국 노동시장의 원·하청 구조를 연구해 온 사회학자다. 그는 『노동자의 삶은 다시 쓸 수 있는가』에서 한국 노동사회의 핵심 문제를 단 한 문장으로 축약한다. "한국은 정규직 사회가 아니라, 정규직이 된 소수와 그 바깥에 놓인 다수가 공존하는 사회다." 2024년 출간된 이 책은 고용 형태의 양극화, 원·하청 이중구조, 그리고 이에 저항해 온 시민·노동 운동의 궤적을 동시에 조명한다.
저자의 가장 날카로운 관찰은 '하청 노동의 비가시성'이다. 한국의 원·하청 구조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30년에 걸쳐 정착됐다. 대기업은 직접 고용을 줄이고, 도급·파견·용역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제조업 생산 현장의 상당수는 대기업 정규직이 아니라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가 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정을 수행하면서도, 통계·교섭·사회보험·재해 보상에서 별개의 존재로 분류된다. 이 분리가 한국 노동시장 양극화의 뿌리다.
이병훈은 이 구조가 가져온 세 가지 결과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첫째, 임금 격차. 2024년 기준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은 평균 63%였으며, 대기업 정규직 대비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45% 수준이다. 둘째, 안전 격차. 산업재해 사망자 중 하청 노동자 비중은 2000년대 초 35%에서 2023년 53%로 증가했다. 셋째, 교섭 격차. 전체 노조 조직률 13.2% 중 정규직이 87%, 비정규직은 13%다. 이 세 가지 격차가 맞물리면 '위험과 저임금의 외주화'라는 단일 현상이 완성된다.
2026년 봄의 장면들은 이 책의 문장 위에 정확히 포개진다. 3월 10일 시행된 개정 노조법(노란봉투법)은 '사용자'의 정의를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자"까지 넓혀,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교섭 상대가 될 수 있게 했다. 이병훈이 20년 이상 주장해 온 '원·하청 통합 교섭 체제'의 부분적 실현이다. 4월 7일 포스코가 협력사 7,000명 직고용을 발표한 것은, 법 개정이 기업의 자발적 선제 대응을 이끌어낸 첫 대형 사례다. 대법원은 4월 16일 포스코 소송 215명 승소를 확정했다.
그러나 이병훈은 이 사건들을 낙관적으로만 읽지 않는다. 책의 후반부에서 그는 경고한다. "원·하청 구조는 법 조문 하나로 해체되지 않는다. 기업이 외주 자체를 줄이는 방식으로 법을 우회하면, 보호 대상이 오히려 일자리 자체를 잃는다." 2026년 4월 베타뉴스 보도에 따르면 노란봉투법 시행 첫 달 제조·건설·서비스 대기업의 외주 발주가 평균 14.7% 감소했다. 이병훈의 경고가 현실화되고 있는 정확한 모습이다.
책의 제목 "노동자의 삶은 다시 쓸 수 있는가"는 수사적 질문이 아니다. 이병훈은 '쓸 수 있다'와 '쓸 수 없다'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답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다시 쓰는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 1990년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설립, 2000년대 비정규직 보호법 제정, 2015년 쌍용차 해고자에 대한 시민 연대(노란봉투 캠페인), 2026년 개정 노조법 시행 — 이 모든 것이 '다시 쓰기'의 장면들이다.
이 책이 특히 유효한 대목은 '정책 실패의 역사'를 정리한 부분이다. 2006년 비정규직보호법, 2013년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2017년 인천공항 정규직화 선언. 각 정책은 일정한 성과를 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차별(무기계약직·자회사 고용 등)을 만들어냈다. 법이 대응하면 시장이 우회하고, 시장이 우회하면 법이 다시 대응하는 순환이 30년간 이어졌다. 노란봉투법도 이 순환의 다음 마디일 뿐, 종착역은 아니다.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제시한 '사회적 대화의 재설계' 제안은 2026년 시의적절하다. 그는 "원청·하청·노조·정부의 4자 상설 교섭 체제"를 제안한다. 독일 공동결정법, 프랑스 사회적 대화위원회, 일본의 산업별 노사협의회 등의 한국적 변용이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핵심은 같다. 원·하청의 분리를 법으로만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대화의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이번 주 추천 독서: 이병훈, 『노동자의 삶은 다시 쓸 수 있는가』(창비, 2024, 356p). 병행 독서로 Guy Standing, 『The P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Bloomsbury, 2011), 신광영,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후마니타스, 2013)를 추천한다. 노란봉투법 시행이라는 사건과 이 책을 나란히 읽으면, 2026년 한국 노동사회가 어떤 오래된 지형 위에 서 있는지가 보인다.
이병훈이 제시한 임금·안전·교섭의 세 격차는 한국 원·하청 이중구조의 가장 간결한 축소판이며, 노란봉투법이 풀어야 할 과제의 전체 지형이다.
비정규직보호법·정규직화 가이드라인 등 과거 정책이 만든 새 차별을 복기하면,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에도 외주 우회 현상이 반복될 가능성을 경계하게 된다.
저자가 제시한 원청·하청·노조·정부의 4자 상설 교섭 체제는, 법적 봉합을 넘어선 '일상적 대화 구조'로의 이행을 구체화하는 참조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