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가 여기에 있다
진작 널 떠나보내야 했다. 석사과정에 네가 온 게 2006년, 박사과정을 수료한 지도 십 년이 되어 간다. 너는 아직 졸업하지 않았고, 직업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것은 물론, 이번 학기엔 여기든 다른 곳이든 시간강의도 없고 별다른 생계수단도 없다. 그리고 넌 최근 한 내장기관에 돌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았다.
네가 그렇게 여기 있는 것이 당연히, 문제는 아니다. 넌 이곳과 나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이쪽 사람들을 만나보고 스스로 선택해서 왔고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 역시 자발적인 것으로 안다. 그리고 여기에서 넌 꽤 잘 지낸다. 얼핏 보기와 달리 넌 너만의 특유한 방식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당히 사교적이며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이 있다. 무엇보다 나와의 관계도 괜찮다. 지도교수로 되어 있는 나와 넌 서로의 언저리에서 오랜 기간 여러 모습을 지켜보면서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아는 편이며 서로 기본적으로 친구로 여기고 서로 배우면서 서로에의해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네게 있어 나는, 너의 공부와 활동, 삶을 전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며 이번 학기엔 드디어 네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기슴이 부풀어 있는 사람이니, 나와 있는 것이 네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난, 내가 널 붙잡은 바도 없긴 하지만, 네가 떠나야 하는데 싶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벌써 몇 년 전부터이고 몇 번인가 네게 말하기도 했다. 널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싫다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보내는 게 필요하고 맞다고 느꼈다. 아무리 좋더라도 한계가 있고 정체되어 있으면 폐습이 생기는 법, 괜찮은 사람일수록 괜찮을 때 더 유유히 흘러야 한다. 너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그때마다 끄덕였다. 너나 나나 참 우스운 사람들이다.
2. 여기는 연구실만이 아니다.
공부하는 넌 여러 곳에 있다. 우선 넌 내게 와서 공부를 통하여 내가 관련해 온 많은 사람들과 자료와 생각 등 총체적인 세계와 접속한다. 불가피한 용건이 있지 않은 한, 궁금해하거나 염려하거나 기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널 만만하게 여기지 못하는 주제라, 내가 널 오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네가 그저 쓱 들른다. 내 관여 정도나 참석 여부와 별로 관계없이 학술행사 같은 데에도 넌 주체적으로 나타나거나 건너뛴다. 그렇게 등장하는 너는 대체로 화들짝 놀랄 정도로 시원스럽고 재미있지만 때로는 어떤 곳에 있되 실은 과거에 가 있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심연에 잠겨 있고 심지어 어떨 땐 생 너머에 있기도 하다.
그래도 고맙게도 너는 내 연구실을 내킬 때면 찾아와 주고 여기서 너는 나와 종종 종횡무진 대화를 나눈다. 읽고 있는 책 얘기부터 하는 경우는 드물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는 편인데, 말하다 보면 공부한 것, 공부하고 있는 것, 고민하고 있는 것, 느낀 것, 그 모두가 버무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서로가 자주, 혼자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던 바를 얘기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조금 놀라기도 하는데, 제법 그런 일이 많다 보니 이젠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흔히 둘 다 마구 웃게 된다. 여전히 서로 정말 잘 맞는다고는 할 순 없지만 같이 공부해 온 만큼, 둘 중 누구도 비굴하거나 추하게 되지 않으리란 신뢰가 공통적으로 깃들어있고 그래서인지 통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네 존재는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내 이름이 붙어 있는 연구실은 나 없이도 너와 따로도 잘 만나는 사이이다.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나만의 방은 아닌지라 이 방 열쇠는 너를 포함하여 비슷한 공부를 하는 여러 명이 갖고 있는데, 넌 가장 자주 방에 들어와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방을 쓰고 살피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이 방과 넌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됐다. 네가 어루만지고 깊고 예리한 시선을 보내고 그 안에서 기꺼이 헤맨 책들은 네 전체를 통과하고 매번 새롭게 너를 만들면서 네게 독특한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적절한 균형과 효율적이면서도 세련된 미적 감각으로 네가 자율적으로 배치하는 다른 물건들도 네 손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사물들은 공부하고 고뇌하고 꿈꾸는 너를 알고 인정하며, 인간이 베풀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와는 다르되 어쩌면 훨씬 더 넉넉하게 너를 품는다.
대학원생들과 강사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연구실과 그곳에 있는 네 책상, 거기서도 넌 많은 시간을 보낸다. 전공, 세계관, 삶의 양식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가운데 함께 공간을 운영하는 것으로 안다. 협소한 진로와 부족한 지지 탓에 서로를 경원시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같이 공부하는 이들을 격려하는 분위기를 그나마 지켜내고 있는 것은 네 역할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교수들이 이른바 후학들에게 더러 밥도 사는 등 챙기고 잘해 주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동등한 연구자로 존중한다고 하기는 힘든 상황에서, 직위에 관계없이 교수에게는 누구든 대등하게 대하고 자연스럽게 구는 네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인상을 주고 알게 모르게 그들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느니, 어느 교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느니 어떤 파벌이 어떻다 하는 소리들이 여전히 사그라지지는 않더라도 그저 눈치만 살피기보다는 깊이 있고 폭넓게 공부하고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필요한 일임을 다들 알게 될 것이라 본다.
무엇보다 너는 네가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 전부를 주면서 있다. 수업의 교재만이 아니라 네가 보아 온 것들과 인류의 문명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들, 그리고 네 삶, 그 모든 것들이 풍요로운 자원으로 강의실 안팎을 넘나들고, 열정과 자유분방함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때로는 네 실패와 허술함까지 드러내면서 존재 자체로 학생들과 만나는 것으로 안다. 그렇게 활짝, 공간이 무한하게 펼쳐지니 학생들 역시 조금씩 자신을 열어보이고 두려워하면서도 타자와 어울리게 되는 것이리라. 대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입시준비를 위해 보내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다시 취업준비가 주를 이루는 생활을 해 온 많은 학생들에게 그와 같은 네 수업은 신선한 충격으로 작용하고 특별한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영혼 깊은 곳까지 뒤흔드는 네 수업을 듣고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 긍정해 주는 네 덕분에 네게 와서 울음을 터뜨리고 감사를 표하는 예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인간으로서 다른 어떤 인간을 동등한 인간 자체로 만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했던 학생들에게 네 수업은 함께 사는 삶을 경험하는 소중한 공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다.
아울러 넌 일상에, 거리에, 전철 안에 있다. 혼자서, 혹은 나나 누군가와 학교 주변을 걸으며 웃고 얘기하고 입매를 올리며 날카로운 분석을, 어떨 때는 심드렁하게 대체로는 난데없이 도발적으로 제시하고 차를 마신다. 어딘가 빈 곳을 보고 바람을 느낀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동네 고양이와 놀며 고단하지만 웅혼한 우주의 평화가 된다. 조우하고 겪으며 그때마다 감응하여 달라진다. 매 순간 살아가면서 공부하고 다른 존재가 된 너 스스로를 세상에 건네면서 너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
3. 넌 공부의 세계를 산다
그렇게 너는 모든 세계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언제나 공부의 세계에 있다. 교육과정 중 시험과 성적 및 취직을 위한 공부는 누구나 하지만 그 밖에 직업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공부의 세계라 할 때, 이 공부의 세계는 종종, 외부에서 보기도 그렇거니와, 공부하는 이들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으로 쓸모없어 보인다. 시민들의 질문에 적절히 답하거나 대중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책을 써내는 사람도 더러 있긴 하지만 공부한다는 사람의 대부분은, 아무도 읽지 않고 심지어 저자조차 종종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논문 나부랭이를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간신히 써내는 한심한 작자들이다. 사유가 엄청나게 통찰력 있고 탁월해서 이 시대의 나아갈 바를 착 제시하는가 하면, 책은 엄청나게 읽었다는데 도대체 그런 쪽으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고 나아가 석사니 박사니 하는 이름이 어딘가 그럴듯한 점이 있는지 대학원도 부지기수로 많은 인원이 다니니 그나마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역할이 책정되고 그를 맡을 뿐, 공부라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짓인 것도 같다.
그렇지만 공부는, 비단 무언가 산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기존의 존재양식을 성찰하고 그에 질문을 던지며 이후의 또 다른 삶을 위해 요청되는 바를 탐구하는 중요한 과정이자 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공부는 위안이고 친구이며 그곳 말고는 어디에서도 정 붙일 곳 없는 터전이기도 한 것도 같다. 요컨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대단히 다양한데, 어떤 이는 그저 알고 싶은 것이 더 있어서 또는 특정 분야가 끌려서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도피로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남들이 많이들 하니까 자신도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별 생각 없이 하다 보니 그저 오래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하고, 또 많은 경우는 학위나 강사, 교수라는 명패가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 보니 미래의 안락한 삶을 위해 공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단연코 네게 있어 공부란, 안식이자 가능성이며 생존이요, 필요성이나 효용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너이다. 공부해 온 역사, 공부하는 네 몸이 너 자신이거니와 이제 너는 공부와 분리될 수 없어 보인다. 체화되고 삶의 양식이 된 네 공부는 이해타산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도망치지 못하며, 분노가 쌓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으며, 인간이든 사물이든 부당하게 대할 수는 없으며, 잘되지 않더라도 더 괜찮아지기 위해 부끄러움을 안고 더 시도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리하여 아마도 너는 공부하지 않고는, 공부의 세계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넌 이 공부의 세계에 있는 많은 이들을 기꺼이 환대하여 함께 산다. 불편한 점까지 포함하여 차이를 긍정하고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온 몇몇과 독특한 우정을 생산해내며, 공부가 각자의 삶에 조응되는 것이 마땅하며 그리하여 모두의 세계를 더 괜찮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임을 얘기하고 실천으로 보임으로써 그 방향성을 독려한다. 향후 어떻게 교수 또는 정식 연구원이라는 자리를 확보할지 전전긍긍하지 않고, 공부하는 삶 자체를 제시하며 스스로 그에 충실하다.
그리하여 너는 공부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부의 세계자체를 살리고 있다. 무수한 존재들 사이에서 기꺼이 부딪히고 교류하며 늘 새로워지는 너와 같은 공부는 다른 세계와 만나고 연결되며 세계의 심장을 울린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모든 구성원이 그로써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으며 이후의 시간들을 맑게 기약한다. 그처럼 공부한다면 나이가 들어도 고루해지기는커녕 늘 더욱 젊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우리의 역사는 이어진다.
4. 이 세계가 제대로 살고 있을까
공부를 직업으로 하거나 공부가 활동시간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 혹은 시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삶의 의미를 공부에 두는 이들에 의해 공부의 세계는 주로 운영된다.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성과를 뚜렷하게 낼 리 만무한 이들을 공부하는 존재로 대접하고 존속할 수 있도록 하며 세상살이가 급격히 팍팍해져도 세계 전반과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아직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 것은 공부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공부는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건 가능하지만 여전히 대학을 기반으로 많이 행해지는 관계로 대학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고 또 사회적 지평에서 그 삶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공부로 이 세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이 세계에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 이 세계를 온당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우선, 공부하라고 개인 연구실도 받고 안정적인 경제적 · 사회적 지위도 확보하고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어 그 어떤 직업보다도 여유롭건만 모든 교수가 제대로 심도 깊고 풍부하게 공부하고 있다고 할 순 없다. 예컨대 수업자료를 복사하는 데 장학조교의 도움을 받으니 더 연구와 수업에 전념해야 하는데, 위계질서의 상부에 위치한 관계로 편해지는 데 익숙해지는 외에 그와 같은 지원에 부응하는 행동이 수반되는지는 의문이다. 강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여러 서비스를 태연히 당연한 시중인 듯 누리면서 지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교수가, 정작 공부는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을까? 아무리 양적인 실적으로만 평가를 받는다지만 논문과 저서를 얼마나 많이 써내는지가 공부 여부를 보여주는 건 아닐 것이다. 협소한 의미의 연구활동에 한정해 보더라도 급격하게 변화, 발전하는 당해 학문 분야를 책과 여러 자료를 통해 좇아나가고 때로는 선도하는 교수의 모습은 일반적이지만은 않다.
더욱이 자신의 면학에 그치지 않고 그와 같이 성찰한 것을 학생들과 나누고 더 많은 사회적 공간에 학술활동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녹여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부라고 할 때 모든 교수가 그를 성실히 수행해내고 있다고 할 순 없다. 개인의 역량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구도라 자신이 가진 자원을 스스로의 공으로 돌리기 쉬운 상황에서 교수가 자신의 영달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공동체와 세계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그 연속성에 유념하며 공부와 삶의 총체성을 빚어내는 데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적어도 그러한 사회적 책무가 기본적임은 언제나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최소한의 행동을 보여줘야 할 것이지만, 많은 교수들은 어차피 자신은 무력하다며 세계를 한갓진 자신만의 영역으로 축소시키곤 한다.
상황이 그러할진대, 교수들이 대학원생과 강사 등 공부하는 이들과의 호흡을 소중히 여기고 공동의 활동을 정당하게 돌보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지도하고 가르치는 대학원생 각각에게서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재능을 발견하고 고무하며, 더불어 학생들을 교육하는 강사들을 동학으로 존중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대하며 학교의 일을 함께 의논해 나가야 할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 그런 교수의 상은 유감스럽게도 보편적이지 않다. 공부는 세계의 넓은 지평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거늘, 고독한 섬이네 어떠네 하면서 자기 연구실에서 궁싯거리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교수의 보통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 말고 공부하는 이들의 자질을 제대로 발견하고 이끌어주며 그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을 기대하긴 힘든 노릇이다. 딱하게도, 본인의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떠받들어주는 데에 익숙해지기 딱 알맞은 것이 어찌 보면 교수라는 자리이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교수들이 혼자 공부하다 보니 자신에게 무언가 우수한 것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건강이며 상황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계속 도전하고 공부하기보다는, 자기가 이미 공부했던, 그래서 여전히 잘 알고 있고 자신 있다고 섣불리 자부하는 자원에 계속 의존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런데 이는 실은 퇴행적으로 세계를 고갈시키는 것일 뿐, 더는 공부하지 않는 것이다.
강사 역시 다 공부하고 있다곤 할 수 없다. 비전 없는 상황에서 많은 경우 같은 학과의 같은 수업을 반복해서 맡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더 체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얼마나 신선하게 기울일 수 있었을까? 학기 단위로 분절되는 만남들 속에서, 권력욕의 발로에서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내 애들인 양 아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당하게 대할 수 있을까? 사람이 초라해지도록 제도가 조장하고 방치하는 가운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오면서 어느새 구조만을 탓하고 자신은 가엾게 여기면서, 비판대상이던 교수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진부하게 지내온 것은 아닐까?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불안감은 자꾸만 엄습해오고 어떻게든 학교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공부에 대한 생각과 믿음, 스스로의 공부가 세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당연한 마음이 흐려진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공부를 한다고는 하지만 내 몸은 실은 공부와 점점 관계없이 둔탁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5. 더 넓은 세계가 공부로 제대로 살게 해 다오
강사 관련 법 개정 및 시행으로 강사도 교원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 교수와 강사 간의 차이가 심하여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등에서 줄기차게 강사 지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인데, 방학 중에도 강사에게도 임금이 지급되는 등 원한 것을 얻어냈지만 실제 상황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여전히, 교수의 경우는 처음 몇 년씩은 마찬가지로 계약직이긴 하지만 연구실적 등을 충족시킨다면 예외적인 사정이 없는 한 재계약되고 나중에는 정년이 보장되는 것과 달리, 강사는 늘 계약직이다.
아마도 강사 관련 제도는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이후에도 합리화의 길을 밟아나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제대로 공부하는 신실한 태도와 세상을 대하는 품위를 요청해야 할 것이며, 모든 교수와 강사는 이에 응당 답해야 할 것이다. 오래전에 공부한 기억으로 이후의 많은 시간을 대충 메우는 것이 아니라, 지치기 쉬운 환경에서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자기존중감을 상실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보이며 누가 어떻게 알아주건 큰 관계없이, 자신의 직위와 상황에 굴하지 않고 어디서나 자신으로서 공부하고 사는, 모든 이에게 배울 줄 알며 보고 익힌 것을 머리와 하기 편하고 듣기 좋은 말만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정직하게 구현해내는 그런 존재들을 보유하고 그로써 더 나아질 권리를 이 세계는 당연히 가지는 까닭이다.
그러할 때, 많은 경우 교수는 교수대로 강사는 강사대로 뭐가 뭔지 모르는 경쟁 속에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온지라 어떤 것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인지 잊어버렸거나 막막할 수도 있을 터, 그래서 공부의 세계는 네가 필요하고 너 같은 이가 더 필요하다. 네가 있음으로써 공부의 세계는 달라졌고, 더 풍성해졌고, 너를 통해 맛본 매혹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살아다오. 늘 다시 다른 방식으로 살아서 제대로 공부하는 세계를 꾸려다오. 아울러 이제 떠나서, 여기만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가 너로 인해, 너와 더불어 공부하고 그로써 새롭게 되게 해 다오. 너라는 세계를 그간은 여기서 과분하게 누렸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자격을 너도 이제 받고, 그 자유롭고 경계를 넘어서는 공부의 발산과 흔적을 곳곳의 세계가 만나서 그를 통해 제대로 공부하는 기쁨을 발견하고 저마다 일렁이게 해 다오. 그렇게 세계가 제대로 살게 해다오.
오정진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주변의 법』, 『사이의 법』 등이 있다. jungjin@pusan.ac.kr



![[이재명의 시대]조갑제 “보수는 왜 무너졌나―문해력 추락, 검사 귀족 정치, 그리고 자유통일의 빈자리”](/api/image?url=http%3A%2F%2Fcdn.asia24.co.kr%2Fuploads%2Farticles%2F11368.jpg)
![[이재명의 시대]김진 “보수는 정상국가를 지켜야 한다…‘석두증’ 도려내지 못하면 미래 없다”](/api/image?url=http%3A%2F%2Fcdn.asia24.co.kr%2Fuploads%2Farticles%2F1136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