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시인을 가리켜 눈 밝은사람이라고들 한다. 일반인들과는 다른안경을 낀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들 시집을 읽는 이유도, 침침한 길을 밝혀주는 그 안경 때문이다.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그 시인들은 우리의 어두운 길을 밝혀주고 잃어버린 것도 찾게 해준다. 그런데 어떤 시인들은 어두운 길을 밝혀주기는커녕 자신부터 길을 잃고 만다. 이들은 가끔씩 안경을 찾아 헤매다 못해 가족에게도 하소연한다. 그러다 안경이 자기 귀에 걸린 것을 보고 식겁한다.

 

어찌 보면 이들 시인들이 낀 안경이야말로 고배율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이 쓴 안경은 찾던 것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 때의 섬광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세상에 숨겨진 길들이 몇 개 더 나타난다. 안경을 찾아 방바닥을, 세면대를 더듬던 손가락이 문득 눈가를 더듬었을 때 만나게 된 세상은 방금 전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비록 일순이겠지만 이때 들어온 세상은 미묘한 기시감을 드러낸다. 이 기시감은 이들의 시집을 읽는 우리에게까지 전염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걷는 까지도 그렇게 들어오도록 만든다. 이렇게 본다면 이 안경 렌즈 속으로 다르게 들어오는 어제의 길과 오늘의 길, 그리고 내일의 길은 그 달라짐의 근거로서 오늘이다. 이 시인들의 시에서는 걸어온 길이 걸어가는 길 위에 쓰이고 걸어야 할 길이 걸어온 길 위로 덮인다.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시집들이 최근 발간됐다.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 임동확의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김수열의 빙의는 그렇게 길을 헤매는/찾는 자들의 이야기다.

 

최정례 시인은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며 자신으로 변하는 길의 얼굴에 관심이 크다. 가령 방금 전 나타난 어떤 길이 지금에 와서 잘 보이지 않는 사태, 그 미세한 교란의 순간을, 보는 자의 느낌표를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어 넣는다. 임동확 시인은 그런 당혹스런 길 주변에 난 생명의 풀꽃들을 바라본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지난날 빛났던 함성을 교란하는 신자유주의의 길을 넘을 생성의 오솔길을 모색한다. 김수열 시인은 임동확 시인이 관념적으로 사유한 미래를 지금 걷고 있는 삶의 길에 대입한다. 그것은 장터와 빨래터로 육화하는 길이다. 최정례 시인부터 읽는다.

 

 

길의 교란

 

술에 곤드레만드레되어 귀가한 사람이 안경을 쓴 채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안경을 찾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세수부터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세면대로 가서 손에 물을 모아 안경을 닦는다. 실소 자아내는 이야기지만, 이번 최정례 시집은 이것이야말로 우리 세계의 진풍경이라 말한다. 이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세계가 안경을 쓰고 본 세계인지 벗고 본 세계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 태도는 그간 최정례 시인의 시를 언급할 때 자주 언급돼온 기시감과도 연계된 것인데, 이번 시집에서는 본 것을 다시 보았을 때곤죽으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좀 더 본격적 성찰로 가고 있다. 최정례는 묻는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세계의 진풍경들을 보여주는 안경을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느냐고. 그녀는 안 보였던 세계가 갑자기 잘 보이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길거리가 고향으로 나타나는 이 세계의 맨얼굴을 보는 고배율 안경 하나를 이번 기회에 만든다. 그것이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다. 시집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당신은 유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당신의 길조차 믿을 수 없게 되므로. 이 시집의 표제작이자 상기 풍경에 대한 보고서인 개천은 용의 홈타운안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당신은 개천 같은 이 세계가 싫다.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너머를 꿈꾼다. 용이 나는 세계 말이다. 몰라서 그렇지 용은 하늘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그런데 개천 냄새가 나지 않는 그 하늘로 당신을 데려다줄 버스는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공평해야 한다면 공평무사하지 못한 권력을 저지하는 자가 어딘가에 있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다시 묻는다. 권력을 저지할 수있는 자가 누구냐고. 이 질문 속에서 개천에서 솟구쳤던 용은 휘리릭 사라진다. 그녀는 다시 질문한다. 용은 어디 있느냐고. 당신은 또 생각한다. 용은 이 개천과는 다른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라고. 그런 당신에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낙심한 당신을 보면서 시인은 이번에는 자상히 말한다. 찾기로 하면 찾을 수 없는 것만도 아니야. “잘 생각해봐, 어디에 둔 거야?”(쥐들도 할 말은 있다) 그 말을 따라가보니 날개가 없는 용이 하늘을 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용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늘이 처음부터 개천이었던 것이다. 개천이 용의 영원한홈타운이었던 거다. 아무리 날아보려 해도 당신은 개천을 벗어날 수 없다. 뒤척일 수 있을 뿐. “갑자기 흰 빨래가 흙투성이가되는 세상이 여기 있다(흙투성이가 되다). 이 사실을 알 때’, 찾아 헤맨 안경은 당신 귀에 걸려있다. 당신의 깊은 수치심과 만나는 이 순간에 당신의 용이 난다. “코트 안주머니에 깊숙이 뭔가를 넣어두었다가 몇 계절이 지나도록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이때 당신도 찾게 된다. 시인은 일화 하나를 건넨다.

 

오늘 아침, 밖에서 누가 경적을 울렸는데 문득 그 시간표가 떠올랐다. 코트 안주머니 깊숙이 뭔가를 넣어두었다가 몇 계절이 지나도록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중략)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고.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면 갑자기 녹음이 짙어지는 곳이 나타난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그래 여기서 내리자 여기서 내려 살아가자, 그랬던 어떤 순간이 있었다. 그때처럼 갑자기 어떤 결심이 서는 순간, 그때에 하리라.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어떤 순간이 올지 어떨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꼭 한번은 말하고 싶었다. 그 시간표 위로 지나간 전철들을 도저히 다 셀 수는 없다.

 

_그 시간표 위로부분

 

옛집 장롱 벽에 전철 시간표를 붙였던 시인은, 이사 때마다 그 장롱을 챙겼다. 장소가 변하니 전철의 시간표도 바뀐다. 그런데 시인은 쓸모없어진 그 시간표가 왠지 유용하게만 느껴진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그래 여기서 내리자 여기서 내려 살아가자라는 고백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표 속 내용이 아님을 말해준다. 도착한 곳마다 원한 목적지가 아니라면, 목적지는 어딘가로 향하는 그 발걸음은 아닐까. 약간만 과장해보자. 당신을 데려다주는 그 전철들이 목적지였을 것이다. 어떤 전철을 탄다 해도 상관없다. “그 시간표 위로 지나간 전철들을 도저히 다 셀 수는 없으므로, 어떤 전철의 시간표도 그때 시간표가 될 수 있다. 뒤척일 때마다 용이 되는 개천처럼.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표가 아닌 그 시간표. 어떤 전철역에나 붙었을 그 시간표 위로우리는 걸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어떤 시간의 꿈인 한, ‘시간표는 항상 그 시간표들이었다(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출발 시마다 길의 크기와 무게가 사라져버리는.

 

길의 합환

 

이제 난 깊은 바닷속 잠수부랄까. 결국 아무것도 아닌 크기와 무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지극히 무기력하고 무능해지는 이 순간의 고윳값을 알고 있답니다.

 

_중력을 이기는 법부분

 

임동확 시인은 최정례의 안경 속으로 들어온 길의 부정적/긍정적 가능성을 보는 중이다. 슬픔으로 교란하는 길과 기쁨으로 합환하는 길을 보는 것이다. 과거 빛났던 연대가 신자유주의적 연대로 변해버린 세상을, 그 시절의 어떤 오솔길로 들어가 봄으로써 넘어서려고 하는 것 같다. ‘좋은 날을 추억하는 한 운동권 인사의 노스탤지어는 여기 없다. 시인은 전날의 순수한 함성들이 그때의 찬란함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를 사색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시절 우리가 일궈낸 새 역사의 중력전망의 바탕을 암탉처럼 품고 있는 길”(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로 끝내 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의 중력은 미래의 전망을 다진 후 사라졌어야 할 아무것도 아닌 크기와 무게들이었다. 지금도 그것을 가지려 하기에 걸어온 우리 길은 교란된 것이다. “한때 지역을 화두로 책임지지 못할 말과 약속을 한 바 있었다. 이번 시집이 그 묵은 빚을 조금 탕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시인의 말)라는 고백은 시인의 그 아픈 자기반성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전일의 함성이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으로 세습되는 오늘 사태다. 모든 차이가 긍정되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진보 이념을 판매하는 인사들이야말로 놀라운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시인은 과단성 있게 말한다. “언제라도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전혀 낯선 얼굴들과/손을 맞잡고 김밥을 나누며 금세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들은/지켜갈 것이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인 것이다(광화문 연가). 그 시절의 우리 목소리는, 점점 더 국가를 사랑하고 자본을 연모하려는 사람들의 노래가 돼가고 있다. 여기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국가민족주의적인 합창이나 붉은 악마들의 함성 정도다. “꽃이 피면 같이 울고 꽃이 지면 같이 울어줄 줄 아는 너와 나의애국가는 이제 없다(나의 애국가). 우리가 열망해온 그 길은 이제 누가 진정한 벗인지,/적인지구분할 수 없게 하는 요괴의 길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전날의 그 길을 추억하는 시대착오자를 위한 길은 없다. 그는 오늘의 길에서 추방된 자다.

 

난 문득 혼자 버려져 있다는 걸 느낀다. 여전히 정착하지 못한 난민들처럼 좌불안석의 내 영혼은, 슬프게도 어느 날부터 영원히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그리고 난 또다시 생각한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들쥐의 땅속 구멍이 나 다행히도 나무껍질 속에 은신처를 마련한 애벌레들을. 이제야말로 내가 철 지난 마녀와 요괴들이 다스리는 세습왕국에서 떠나가야 할 차례라는 것을.

 

_눈 내리는 겨울 숲에 서서부분

 

길에서 버려진다는 것, 그것은 참혹한 고독의 사태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임동확 시집에서만큼은 이 버려짐이 새 길을 꿈꾸게 하는 동력이다. 버려진 자의 고독은 걷는 길이 걸어갈 길을 한사코 그리워하는 순정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며 그리워하는 자만이 자신이 걸어온 그 길과 합환한다. “금세 굵어진 빗줄기만큼 더 간절한 합환(合歡)을 꿈꾸는 먼 산의 자귀나무 한 그루 홀로 고요히 흔들리는 것처럼(조계산에 내리는 비). 시인은, 이 슬프면서도 기쁜 흔들림의 자리를 경계라고 쓴다. “겉과 속이 구분이 되지 않은, 어쩌면 바깥이 안이고 안이 바깥인 그 열려진경계에서(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모든 길은 자기 자신과 입맞춤한다.

 

지금 내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한계 또는 방랑이 또 다른 출발의 경계라는 내륙의 길이 끝나는 곳에 물길이, 물길이 다하는 곳에 하늘의 길이 다시 한번 미지의 지상과 길에 입맞춤하고 있다.

 

_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부분

 

자신에게 입맞춤하며 출발하는 길에는 출발지가 없다. 거기에 출발의 때는 늘 이르지 않는다. 목적지는 이미 지나친 장소다. “종말도 항상 지나쳐버린다. 이 길이 열어내는 오늘은, 그리고 미래는 놀랍게도 너와 나의 기억 속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들/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추억”(흔적에 대하여)일 것이다. 마주친 적 없는 추억과 만나는 이 사건은 이미 다가온 미래와 마주치는 사건이다(심청전 1-인당수에 빠지는 대목). 우리는 여기서 철 지난 마녀와 요괴들이 다스리는 세습왕국에서 떠나려 하는 시인의 진의를 읽는다. 시인은 과거 모든 순간과 이별하려 하지 않는다. “적과 아군,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공격으로 상처받는 자들에 대한 반격대신, “그것마저 넘어서는 늙은 어머니 같은 포옹성을 새로운 미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말들의 궁합). 이성희 평론가가, 혹독한 과거를 보듬는 이 시인의 능력과, 과거를 새로이 생성시키는 역량에 대해 눈여겼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해설).

 

눈 내리는 겨울 숲에 선 시인은 이제 그 고독한 오솔길로 들어간다. 오솔길은 이념의 섬광이 터졌던 옛길을 천천히 돌고 돌면서 다시 그 옛길로 향한다. 가진 것 없던 자들과 함께 걸어갔던 길이다. 그 위에는 그 시절 함성이 피워놓은 새싹들이 환하다. 새싹은 그 시절 함성을 지르던 자들의 속울음으로 아직도 벌어져 있다. 물이 오르는 그 새싹들의 몸은 시인이 꾸는 시간의 꿈꿈의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속정 깊은 그 길은 이 시집에서 때때로 여리면서도 강한 동식물들의 길로도 나타난다. “곤두박질치게 하는 중력을 거스르는 숭어”(숭어)의표상이 그 한 예이다. 자신의 과거와 합환하는 임동확의 길은 건망증에 걸린, 생명을 돌보지 않는 지난 길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미래다.

 

길의 유대

 

최정례의 안경 속으로 들어온 임동확의 길은 생명의 오솔길을 찾아 후퇴하는 미래다. 김수열의 미래는 임동확의 그 미래를 바라보며 펼쳐지는 오늘이다. 아울러 그 오늘의 옆구리에는 항상 과거가 달려 있다. 김수열의 오늘 속에는 내세울 것이라곤 남루와 무명뿐이어서 어떤 기록이나 분류에도 자꾸만 엇나가는 역사의 푼수들”(임동확, 순간들)이 숨어 있지만, 시인이 그들을 그리워할 때 그들은 역사 속으로 걸어 나온다. 빙의의 페이지들이 두레마당처럼 펑퍼짐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어제를 껴안아 내일을 열어보려는 시인의 안간힘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그 펑퍼짐한 일상어의 돗자리 위로 그들을 초대한다.

 

이전 시집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부터 김수열은 모르는 사이에/내 안에 자리 잡은/나 아닌 것들을/버리”(여행)는 연습을 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그 연습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 같다. ‘를 벗어난 자리, 아니 그보다 한결 넓어진 우리라는 장마당에서 말이다. ‘우리를 향한 그 꿈은 내 밖 생명체들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장마당에는 인간은 물론이고, 돼지, , 오리, 병아리들도 걸어 다닌다. 인간의 마당은 때로 동물들의 마당과 합환하며 그 두 곳이 같은 자리임을 드러낸다. 마당 위로 내려오는 빛은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인 장날에서 환하다. 모진 고초 앞에서 국 데우면서라도 굳세게 살아가는”(국 데워라 금순아) 자들의 마당은 더 그렇다. 거기서는 죽은 생명의 길까지도 환하다. 산 것이었건 죽은 것이었건 그들이 걸어온 길을 시인이 따라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생의 권리를 누려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존재들에 대해 보여주는 애처로운 시적 응시도 있다(“반쯤 해체된/오리 한 마리//죽은 사랑을 껴안은/아픈 사랑의 날갯죽지 위에/아침 햇살이/시리다”, 사랑을 배우다). 하여 이 시집의 핵심어인 빙의는 어제와 오늘 쓰러진() 생명에 헌사하는 사랑의 발화. “자연과 인간을 두루 껴안고, 그리고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며 현재와 과거를 가로지르는 시인의 사랑을 시적 빙의라 본 김진하의 시각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해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이 고향 제주 사람들 쪽으로 좀 더 당겨질 때, ‘빙의그리움의 말이 된다. 어떤 면에서 이 그리움은 같은 제주시인 김경홍의 떠도는 자의 노래(인동꽃 반지, 대한, 1999)의 기억 위에 있다. 김수열에게 가치 있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란, 상처받은 이들의 기억을 보듬어가는 그 과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늘을 제대로 버티기 위해서 그들의 시간을 껴안는다. 이번 시집에서 그가 누구보다 간절히 껴안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시간이다. 부친이 걸어간 숱한 그 시간표들위로 그도 걷고자 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너그 아부진 집밖으로 나갔다 하면 동네방네 다니믄서 꽃이란 꽃은 죄다 꺾어 한 아름 안고 돌아와 마당 가득 널어놓았니라 마당이 꽃 천지였당께 남새시럽기도 허고 동네 미안헌 것도 한두 번이지 그때 생각으룬, 이그 저 냥반 왜 죽지두 않고 저 지랄인가 했는데 막상 옆에 없으니께 맴이 시리네 길 가다가두 꽃을 든 남자만 보믄 너그 아부지가 살아 돌아왔나 하고 한 번 더 보게 되더랑께

 

먼 길 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선지 어머니는 말없이 채널을 돌리신다

 

_꽃을 든 남자부분

 

시인은, 어머니에게서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일화를 듣는다. 꽃을 유달리 좋아했던 아버지 얘기다. 시인에게는, 치매기를 보이던 그 시절의 부친이 꺾은 꽃들이 단지 그 시절 꽃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푼수 같아서 더 애처로운 그 꽃은, 당시의 남편을 통박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지금의 어머니 얼굴이기 때문이다. 방 안에 풀어놓았던 그날의 꽃향기는 모르긴 몰라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건넨 한 사내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不忘記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아버지의 유품인 대학 노트의 귀퉁이에 고독하고 애절한 사연이 메모돼 있는 것을 본다. 만일의 사태가 나더라도 아내를 잊지 않기 위해 끼적였던 메모는 아닐까. 시인은 그 시절 아버지의 아픔을 끌어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처의 자리까지 걸을 성싶지 않다. 그 아버지는 잔인한 아픔의 세월을 겪어냈던, 그리고 오늘도 그 상처에 휘둘리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되어 시인에게 걸어온다. 이 시집의 장터한편에 작은 빨래터가 놓인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어제를

빨아

 

오늘

넌다

 

내일은

마를까

 

_빨래전문

 

어제를 빠는저 행동이 빙의일 것이다. 빨고 빨아도 상처가 사라지지 않기에 빨래는 반복된다. 이것이 김수열의 시적 역정을 끌어온 슬픔의 동력이었다면, 앞으로도 상처를 빨고 너는 저 제의는 어제처럼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마르지 않는 상처를 널고 또 너는 그의 손목에는 내일도 하이타이물이 흐를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빨며 왁자한 저 개천의 어느 길가에는 그러나 꽃이 핀다. “으깨어지고 짓이겨져도/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꽃들이 일어난다(). “아무리 봐도 그저 그런 똥개들이 사는(누이네 집 똥개) 세상에서 환한 꽃들 타오른다. 그러니 저 빨래는, 빨래하는 순간에만 마르는 꽃일 것이다. 빨래터, 아니 그 개천가에서 시인 김수열의 용이 승천한다. 개천 옆에서 그와 나, 당신, 그리고 우리가 걷고 있는 세상의 장날이 또 열린다. 장날에 짐꾼으로 따라나선시인은 이래 주왁 저래 주왁거리며 오늘도 세상을 두리번거린다. 이 신자유주의 세상 속에서도 병아리가 뺙뺙이고 강아지가 낑낑거리는장터에 간 것이다(장날). 사장님도 기사님도 차에서 내려서 해장국 한 그릇을 함께하는 이 혼란한 장날이야말로, 2015년 이후 시들이 다시 품어야 할 암탉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돌아갈 미래, 홈타운 말이다.

 

 

 

최종환

1969년생. 문학평론가. 2015문화일보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