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권 한국문학 번역에 관한 소고小考
1. 번역이라는 고되고 외로운 작업
필자는 어렸을 때 책 읽기를 좋아했다. 나 홀로 경험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가 안겨주는 색다른 짜릿함에 깊이 매료되어 세계문학의 바다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인간 못지않게 감정의 기복이 심한 그리스 신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 둘 풀어가는 세라자데, 난파 후 물살에 떠밀려 소인국과 거인국 등 낯선 나라도 들어서는 걸리버, 데미안이 들려주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문학작품은 양파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까도 까도 끝이 없어 읽을 때마다, 읽는 시점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른 해석으로 다가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니 …… 그러면서 세계문학이라는 무한한 세상을 열어준 번역의 세계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그렇게 필자가 돈키호테를 만나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스페인문학에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국내에 스페인문학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스페인문학이라는 종합 선물 세트를 국내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번역을 시작했지만, 번역이라는 작업은 하면 할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절대 끝나지 않는 외롭고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다. 게다가 들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결과나 보상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질적인 보상은 차치하더라도, 힘들게 공들여 완성한 번역 작업은 의역과 오역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가혹한 평을 받기도 한다. 1522년,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옮겼을 때 그의 번역을 혹평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마르틴 루터는 번역을 밭에서 땀 흘려가며 힘들게 돌과 장애물을 치우는 밭 고르는 일에 비유하며, 그 후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라며 자신의 번역에 대한 비평을 쟁기질에 비유하기도 했다. 번역할 때면 늘 원본을 존중하느냐, 가독성을 존중하느냐, 직역이나 의역이냐의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하다가, 그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의역하게 될 경우, 자칫 잘못하면 의역과 오역 사이를 넘나들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번역이 완성된 후 다시 읽어볼 때마다 문장을 다듬게 된다. 어쩌면 원고 마감일이 없다면 시시포스Sisyphus 처럼 지금도 계속해서 언덕을 오르내리며 바위를 들어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 한국문화 콘텐츠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번역 작업
요즘 국내 출판시장 흐름을 보면 해외 문화의 번역서 출간과 국내 문학의 해외 출판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번역이 현실적으로활발하게 이뤄지는 가운데도, 학계에서는 번역의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전환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번역의 불가능성'을 꾸준히 거론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술 더떠서 미래에 사라질 직업을 얘기할 때면 심심치 않게 번역가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 번역은 일상적이고 실무적인 소통을 위한 기능적인 번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인공지능 AI번역에서는 아직 무사할 수 있다. 이제는 타문화, 타언어가 거의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일상으로 파고들어 오는 현대사회에서 번역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은 불필요하고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다. 실제로 자동번역기가 나날이 최첨단화되는 요즘,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정보의 번역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수월해졌다.
그러나 문학 번역은 기계적인 번역이 아닌 언어의 속성과 연관되어 창조성을 구현해내는 방식으로 문학의 본질적인 성격, 즉 문학성을 드러내야 하고, 그로 인해 번역의 불가능성이 논의되기도 한다. 이러한 번역의 불가능성이 인공지능 AI 번역에서 문학 번역을 무사히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러니는 앞으로 문학 번역이 점차 특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학성을 고려한 문학 번역의 전문화는 외국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나, 한국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 모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했던 김수영은 1966년에 출간된 「모기와 개미」에서 당시 일역본의 중역에 의존하는 국내 번역문화의 관행과 출판사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문학이 없음을 한탄하며, 단편소설 하나 제대로 번역한 것을 구경하기 힘들다고 분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돈키호테』도 완역이 아닌 15페이지짜리 축약판이었고, 이후 다른 번역 작품들도 번역자가 스페인어 전공자가 아닌 영어나 일어 전공자로 대부분 중역이었고 해적판도 난무했다. 다행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스페인어 전공자로 이뤄진 번역가들이 등장하고 있고, 1987년 세계 저작권협약 가입과 함께 영어나 일어에서 중역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해당 언어로 직접 번역하는 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 번역 출간되는 도서의 90%가 영어와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언어권으로 편중되어 있고 기타 언어권 작품의 비중은 10%에 불과해, 스페인어 번역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현대 작품인 경우, 일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에만 치중되어 있어, 좋은 작가와 양서를 시대별로 골고루 발굴해 번역 출간할 수 있는 환경 또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스페인어권 번역은 20여 개국이 넘는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많은 국가의 번역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글로벌 출판시장에서 수준이 높아진 독자의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보다 특화되고 전문화된 국가별 작가와 작품을 소개해 번역할 수 있는 전문번역가가 필요하다.
그와 함께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나라는 영화 〈기생충)의 돌풍과 함께, 드라마 〈오징어 게임〉, BTS를 위시한 K-pop 등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오랜 문화수입국에서 문화수출국으로 변모했다. 세계 곳곳에서 한류 열풍이 불며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한류 열풍을 좀 더 장기적이고 효과적으로 유지·확대하기 위해서는 대중문화에 이어 고급문화도 해외에 진출해 더욱 경쟁력 있는 한국문학 콘텐츠를 소개해야 한다. 우리 한국문화의 정.서가 내밀하게 담겨 있는 문학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세계인의 마음에 깊은울림을 줄 수 있는 소통 수단이며, 이러한 소통을 위해서는 좋은 번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한국문학은 2011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미국 시장 진출과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이후 본격적인 문학 한류를시작했다. 사실 문학 한류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고 K-pop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힘들다. 그러나최근 한국문학만을 전문적으로 출간하는 해외 출판사도 등장하고, 여러언어권에서 경쟁력 있는 한국문학 번역자도 나오고 있는 지금이 전문적인 번역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해 세계문학에서 한국문학을 한 차원 높은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한국 독자들을 위해양질의 해외 문학을 소개하는 번역 작업과 함께, 우리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번역 작업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세계문학에서 한국문학의 위치는 더욱 견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
3. 스페인어권에서 출간되는 한국문학 현황
2021년 한 해만 해도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해외에서 출간된한국문학 작품이 29개 언어권, 180여 종에 이르는 가운데 여러 작품이국제 문학 번역상에서 수상하거나 후보에 올랐다. 해외 출판시장에서영향력이 있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는 한국문학도 점차 늘고 있고, 해외 문학 에이전시가 국내 에이전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한국 작가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제는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 출판계의 인식이 예전과는많이 달라졌다는 게 출판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2000년 중반 이후 문학 한류를 이끄는 한국 문학작품의 번역과 현지출판 과정, 국제 문학번역상의 수상 이력을 보면 간접 매개어로서 주로영어의 역할과 비중이 크고, 그에 비해 스페인어의 비중은 미비하다 할수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자료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21년까지 번역원 지원으로 출간된 영어권 도서는 298편, 중국어권 도서는 221편, 프랑스어권 도서는 198편, 일본어권 도서는 227편인 데 반해 스페인어권도서는 109편으로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문학의 스페인어권 진출은 출발어와 도착어 모두 글로벌 문학 시장에서 중심부의 위치가 아니라 지금까지는 많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어를 사용하는지역과 인구로 볼 때 스페인어권 출판시장이 세계 5대 시장 중의 하나로매우 경쟁력이 높은 시장이고, 최근 들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비롯한스페인에서 부는 한류 열풍과 더불어 스페인 대형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국문학에 대한 스페인어권 출판계의 관심을 일회성에 머물지 않게 하려면 한국문학 작품을 현지 실정과 그 나라의 문학 관행에 맞게 맥락화해야 한다.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다른 것은 둘째 치고, 문학관행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번역자가 한국의 문화·문학적인 의미를 존중해 대표적인 한국 문학작품을 번역했다 하더라도, 그 작품이 도착어권나라의 문학 관행과 달라 독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소설 장르에서 한국문학은 단편과 중편이 주도적이지만, 스페인어권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장편이 우세한 편이다. 물론 한국의 대표 문학작품을 먼저 번역 대상으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상대국의 문학 관행을 고려해 번역 작품을 선별하는 것 또한 주요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 관행을 고려하여 장편소설을 우선하여 번역한 후 다양한 장르를 골고루 소개한다면 스페인어권 문학 시장에 한국문학 작품을 보다 친근하고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가치와 유익함을 따졌지만, 요즘은 읽는 재미가 더해지지 않으면 넓은 독자층을 확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해외 번역 시장에서는 한국문화를 잘 대변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 내면세계와 미학성을 살린 여성 작가들의 등장이 눈에 띈다. 그리고 국내에서 외면받던 장르 소설도 인기가 높은 편이다.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프랑스의 마탱 칼므출판사가 K 스릴러, 한국의 장르문학을 전문 출간하고 있다. 30년 동안 추리소설을 출간해온 서미애 작가는 장르문학을 홀대하는 한국 문단의 엄숙주의로 늘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졌다고 토로했지만, 2010년에 출간된 『잘 자요, 엄마』의 판권은 14개국 이상에서 계약되었다. 스페인어권에서도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를 비롯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황석영의 『해질 무렵』, 김영하의 『검은꽃』, 정유정의 『종의 기원』, 김언수의 『설계자들』 등 다양한 장르의 장편소설이 출간되면서 스페인어권 독자층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그와 함께 한국문학 작품의 기술적인 번역만이 아닌 한국문학 담론과 문학성을 함께 살릴 수 있는 전문번역가 양성도 우선적인 과제이다. 과거 한국 문학작품의 스페인어 번역이 주로 한국인이 번역한 후 외국인이 감수하는 사실상 1인 번역체제였다면,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공동 번역체제가 서서히 정착되었다. 먼저 스페인어에 능통한 한국인 번역자가 원작에 대한 문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1차 번역한 후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하는 외국인의 번역 작업이 이뤄졌다. 1차 번역이 원작의 의미와 문체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면 외국인의 번역작업은 1차 번역을 바탕으로 스페인어권 독자들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번역이었다. 그렇게 원작의 문학성을 제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한국인 번역자와 스페인어권 독자들의 가독성을 우선으로 하는 외국인 번역자의 교정 작업을 거쳐 번역이 완성되고 나면, 최종적으로 현지 출판사의 교정, 교열 및 윤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전에는 한국 작품의 외국어 번역이 주로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의 번역지원 사업으로 이뤄지면서 거의 해외 소형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문학의 우수성이 알려진 후에는 계약 단계에서 보증수표로 통하는 대형 출판사와 일단 판권 계약이 성사되면, 이웃한 다른 국가의 출판사들 또한 바로 출판 계약을 맺는다고 한다. 스페인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진출 통로라 할 수 있는 대형 출판사 플라싸 앤 하네스 Plaza & Janes에서 2020년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를 출간했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정유정의 『종의 기원』, 김언수의 설계자들,등 여러 작품도 알리안사Allianza, 알파과라 Alfaguara, 펭귄랜덤하우스그룹PenguinRandom House Group 등 여러 스페인 대형출판사들에서 출간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최근스페인어권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작품들은 장르 소설이 주를 이루고, 교정·교열 단계에서는 원전인 한국 작품보다 영어권온양나무이나 프랑스어권에서 이미 출간된 번역정유정, 『종의 기원』, 은행나무, 2016.작품을 반영하는 추세이다. 스페인어권에서는 아무래도 낯선 동양어인 한국어보다는 영어나 불어가 좀 더 접근성이 있다 보니 교정이나 교열 단계에서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이 계속된다면 모기와 개미에서 김수영이 토로했던또 다른 중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절을 다룬 작품에서 '남산에 끌려갔다'라는 대목이 나온경우, 우리 독자는 '남산'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의 '남산'은 많은 민주인사의 고문을 자행했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의미했다. 그러나 스페인어로 번역된 작품에서는 'Montaña Nam(남산)으로 번역되었고, 그 번역은 영어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최초번역자는 원작의 가치와 의미, 문학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의역이나 각주를 다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지 출판사나 편집자는 완성된번역본과 원작에 대한 간략한 소개 글을 바탕으로 최대한의 가독성을 위한 교정·교열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원전보다는 중역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한국문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4. 전문번역가 양성을 위한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의 필요성
요즘 한국문학을 성공적으로 번역한 번역가나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번역문학상의 수상자를 보면 점차 외국인 단독 번역이 늘고 있다. 이제는 한글 원작의 문학성에 뒤지지 않는 번역이가능한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인이 점차 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한자리를 어엿이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국인 번역가 세대의 등장이 매우 긍정적이다.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의번역지원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특히 번역원은 한국문학 번역에 관심 있는 외국인과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2008년부터 경쟁력 있는 차세대 한국문학 전문번역가 및 문화콘텐츠 전문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해 번역아카데미를 개설해 교육해오고 있다.
필자는 예전에 번역원에서 스페인어 번역 실습수업을 담당하면서 번역아카데미에서 교육받는 외국인 연수지원자는 물론 한국 학생 모두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싶은 열정 하나로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은 한국 학생과 외국인 연수지원자를 대상으로 2년 총 48주, 주당 9~15시간으로 운영되고 있다.한국 학생의 경우, 대부분은 대학원 졸업국가에서 언어 연수를 경험한 스페인어에 능통한 고학력자이다. 외국인 연수지원자도 2년간 생활비가 지원되어 한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번역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이 국가에서 인정하는 정규 교육 과정이 아니다 보니 학생들의 경력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번역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에 매우 만족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 시간에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면 훗날 자신의 경력에 더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자조 섞인 후회도 적지 않게 한다. 학생들이 최소 2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그 시간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번역가 양성을 위해서는 훌륭한 인적 자원 확보가 최우선으로 중요한데, 정식 학위가 없는 현행 2년제로는 한계가 있다. 물론 여러 대학교에서 번역대학원이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외국인과 함께 전문적인 문학 번역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번역아카데미가 훌륭한 교육 내용과 짜임새 있는 과정을 갖추고 있음에도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얼마 전 필자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메일 한 통을 받게 되었다. 번역아카데미 대학원대학교 설립에 관한 수요 및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위한 메일이었다. 이제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반가운 마음과 함께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번역원 산하에 정식 번역대학원을 개설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니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한 수준높은 번역을 위해서는 번역가 개개인의 외로운 싸움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규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과정이 절실한 상황이다.
물론 부정적인 목소리도 있다. 번역을 통한 문학의 해외 진출이 인위적인 진흥책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아니다. 중세 시절 스페인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라는 이질적인 세문화가 서로 공존하며 갈등했다. 그러나 톨레도 번역자 학교를 설립하여 아랍 세계의 과학과 철학, 문학을 라틴어나 로망스어로 번역해 유럽으로 전하면서 톨레도는 유럽 번역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3세기 알폰소 현왕의 적극적이고 제도적인 후원 아래 번역가는 단순한 해석자의역할에 머물지 않고, 번역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전파한다는 작가적 사명과 긍지를 갖고 유럽 르네상스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는 중세 스페인에서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전파했던 번역가의 학문적 위상과 사명감이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21세기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양질의 번역을 위해서는 문학에 관심 있는 한국인과 외국인 인재의확보와 함께, 그들이 긍지를 갖고 번역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적인뒷받침이 필요하다. 앞으로 문학 번역에 매진할 후배 세대에게는 번역가라는 길이 고되고 외롭지만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권미선
고려대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에서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경희대 스페인어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영혼의 집』, 『운명의 딸』,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사볼타 사건의 진실』, 『브리다』, 『먼 별』, 『레헨따』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