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의 기쁨과 슬픔
1. 소외된 28%
현재의 문단에서 1970~80년대 노동문학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과거에 노동문학의 대명사였던 박노해, 백무산은 휴머니스트와 구도자로 변모했고, 노동자 출신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진 송경동, 김사이 같은 작가도 노동자의 삶을 실감 나게 그려내는 일에 주력하진 않는다. (송경동은 노동자보다는 투사의 삶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김사이 또한 노동자의 삶을 모사하는 데만 집중하진 않는다.)
그러나 노동문학의 쇠퇴를 단언하기는 힘들다.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직-육체노동자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희소해졌을지언정, 서비스업 종사자와 사무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많은 작가가 등장했다. 이런 형질 변화는 사회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돌이켜보면 황석영과 박노해가 대변하던 한국의 노동문학부터가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군부독재 시절 한국은 농업 국가에서 제조업 국가로의 형질변환을 단행했다. 농민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도시로 건너가 블루칼라 노동자로 취직했다. 반면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간 지식인이 되고,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에게 온정적 관심을 가졌다.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형상화한 수기나 문학작품 같은 것들이 출간되고 읽힌 것은 그런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파생된 결과였다.
한편 지금의 한국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됐다. 농촌과 공장에서 생산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줄어들고 서비스직(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 혹은 배달 어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편 '노동자'와 구별되던 계층 '지식인'은 멸종했다. 산업화 시대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사무직, 관료가 될 기회를 얻었다. 지금은 대학에 등록금만 상납하면 대학을 갈수 있게 되었지만, 대학 졸업장은 '좋은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사무직이 되기도 쉬워졌지만, 사무직의 삶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또한 제조업 노동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담론을 만들어냈다. 사회학자들은 4차 산업혁명이나 긱 이코노미(GigEconomy) 같은 단어들을 강조하고, 인문학계에서는 비생산노동-비물질노동,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종말”(제레미 레프킨) 같은 개념어들이 유행이다.
일각에서는 인공지능이나 메타버스 같은 용어를 들이대며, 인간의 육체노동은 사라질 것이며 무인공장과 인공지능 기계 같은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과연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공장에서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지금도 누군가는 그런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주요 28개국 중 제조업 비중이 두 번째로 높은 국가이고, 한국의 GDP 중 제조업 비중은 28%에 가깝다.
하지만 그 28%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오늘날의 담론장에서 소외되어 있다. 정치인들과 언론인들만 해도 제조업 사업장의 육체노동자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 21대 국회 후반기 상임위원회 배정을 할 때, 다수당 더불어민주당에서 환경노동위원회를 ‘1지망 희망 상임위’로 꼽은 국회의원은 전무했다. 한편 정의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됐던 국회의원은 2021년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민주노총 위원장을 저격했다. 저격 내용의 가부를 따지지는 말자.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원내정당의 주요인사가 민주노총 내부의 좌담회도 아니고 연일 '노동귀족'을 비판하는 보수언론과 협업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참고로 2010년 정도까지 한국의 대표적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뿌리를 두고 '노동계급 정치세력화’를 표방했다. 그 정당의 주요한 정치인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등은 노동운동 출신이었다.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는 정당은 증발한 것이다. 한편 현재는 기성언론에서도 노동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자가 거의 없다. 보수신문은 아예 노조에 연락책을 가진 기자가 없고, 진보 신문으로 분류되는 <한겨레>, <경향신문>에서는 그나마 노동 '담당' 기자가 있지만 그들도 노동 '전문' 기자라고 말하기는 힘들다1) 결국 몇몇 영세한 '운동권 언론'을 제외하면,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진지하게 기록하는 언로 자체가 없는 셈이다.
2. 산문을 넘어선 노동문학?
문학계에서도 육체노동을 집중적으로 다룬 작가는 거의 없고 그들의 작품은 비평적 관심을 받지 못한다. 정치권, 언론계, 예술계의 침묵이 중첩되어 노동현장은 신비화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문외한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싶다. 필자는 종종 배달 라이더라든가 택배 상하차를 잠깐 '알바'로 했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가까이 지내는 지인 중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주기적으로 했던 사람은 없다. 그래서 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이 기계에 끼여 압사했다거나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 같은 것을 볼 때, 가슴은 아프지만 망자들의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헤아릴 순 없었다. 다른 한편 필자가 언론에서 접하는 노동자들의 소식은 대부분 '강성 노조'와 '귀족 노조'를 단죄하는 논조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필자처럼 '망자'와 '투사'의 이야기를 종종 전해 들을 뿐, 무난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추체험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조업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노동을 다룬 최근의 책이면서 서점가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천현우의 <쇳밥일지>를 참조해도 좋겠다. 천현우는 지방에서 일하던 용접공 출신이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써서 몇 개의 논설을 발표하다가 지금은 전업작가 겸 칼럼리스트가 됐다. <쇳밥일지>는 한 명의 노동자가 작가로 ‘자수성가’한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쇳밥일지>의 마지막 페이지 즈음을 보면, 천현우가 노동자일 때 선배였던 사람이 했다는 말이 나온다. 작가 자신의 포부를 대리표상하는 말이기에 길게 인용해본다.
"내가 니 칼럼은 전부 챙겨 보거든. 근데 그 왜, 우리 판때기에서만 쓰는 말들이 있잖냐? 그 상스러운 걸 칼럼에다 그대로 다 실을 순 없잖어. 그렇다고 먹물들 말로 쓰면 맛이 안 살고. 그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하더란 말이지. 노조 아재들이 이게 안 돼. 맨날 머리띠 매고 메가폰 잡고 소리만 치잖아. 간절한 건 이해하겠는데 촌스러워. 그림이 너무 구리잖아. 우리가 그리 욕해도 결국 가진 놈들은 먹물이잖냐? 그 먹물들이 원하는 양식이라는 게 또 따로 있을 거 아니냐. 우리 얘기를 먹물들 언어로 번역해야 해. 좀 아니꼬워도 세상은 그렇게 바꾸는 거지. 넌 그게 되더라. 그래서 니가 중요한 거야. 쇳밥 얘기를 먹물들 알아먹게 쓸 수 있다니까."2)
노동자와 '먹물'이 쓰는 언어가 다르며, 천현우는 노동자의 삶을 먹물들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이다. 노동자와 '먹물'의 세계가 분리되었다는 점은 필자도 앞서 길게 설명한 바 있다. 언론계와 정치계는 물론이고 평범한 독자층까지 천현우의 글에 주목한 것은, “판때기들의 말”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정당한 판단의 결과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인용문은 비판할 구석도 있다. 노동자의 삶을 '먹물'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사회를 바꿀 수 있으리란 믿음은 순진하다. 과거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나름의 조력을 했지만, 결국 노동현장을 바꾼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지금 '귀족 노조'라 불리는 대기업 정규직 금속노조들만 해도 그렇다. 그런 기업들이 비교적 나은 사업장이 됐다면, 그것은 6월 항쟁 이후 줄곧 열심히 싸운 투사들 덕택이지, 자본가가 유독 선량하거나 혹은 노동자들의 삶을 “먹물의 언어”로 능통하게 옮겨내는 달변가가 활약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바뀌었고 노동운동단체의 여러 한계도 드러났다지만, 계몽적 저술보다는 노동자들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이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트집을 잡는 것은, 노동자의 삶을 기록해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작업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거세된 담론장에서는 일단 그들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필경사도 있어야 한다. 필자는 천현우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고 그가 제조업을 떠났다고 할지라도 향후 노동현장의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해줄 수 있길 바란다. 그런 삶을 진솔하게 기록한 산문은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절절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저널리즘의 영역이고, 문학은 노동자의 삶을 축자적으로 반영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 이 점은 과거의 노동문학만 돌아봐도 이내 증명된다. 박노해의 초기 시라든가 황석영의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 <객지>, <어둠의 자식들> 등등을 생각해보라. 노동자의 처지와 생각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노동자가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정동(affect)들이다. 적확한 산문이 담아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느낌을 담아내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문학의 주요한 책무였다. 지금의 시점에서 새로운 노동문학을 생각하려면, 육체노동의 당사자들이 느끼고 있는 정동을 그려내는 작업을 경유해야만 한다. 이 글은 그런 작업에 나서고 있는 두 명의 시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3. 노동의 절망적 구조
이용훈은 문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시인이 아니고, 공개적인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허나 최근 발간된 시집 <근무일지>를 보면, 그가 대략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략'이라는 어정쩡한 부사를 붙인 것은, 그의 시가 구체적인 진술을 지양하고 암시적인 단어를 통해 파괴적인 형식을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파괴적인 형식을 가진 것은 노동자의 삶이 불규칙하게 파괴됨을 알리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이 시인의 핵심적 인식을 표상한 작품을 인용해본다.
가다와꾸가도(는) 가리고야, 가이당 가랑(은) 가라(고), 함마 (든) 함바(의)한빠 (간다) 후앙(은) 후꾸레두, 데모도(의) 데마찡(은) 데마찌(야), 보루박스(에) 시로도 쇼쿠닝 (중에) 쓰미, 오오가네(의) 쓰마(는) 말귀만 알아먹어도 끼니 걱정 안 한다 돌고 돌았더니, 공사장서 굴러다니는 돌멩이 됐습니다. 콘크리트 그늘에서 가랑비 세고 있습니다. 시멘트 가래가 굳으면 목구멍을 막아서 쎄- 소리가 나는데. 알 듯도 모를 듯도 품삯을 받았으면 홍이라도 더할텐데. 귀에 익었으면 장단이라도 딱 맞추겠습니다. 천장에 얽히고설킨 말들 벽에 흉터 난 말들 수도관에서 떨어지는 말들. 전선 타고 오가는 말들. 그 거 염불인가요? 한국말이지요? (…중략.…) 뭐라고요? 쓰지 말라고요? 아아, 건설표준어 준수하라고요. 대체 언제부터랍니까? 지금부터 잡담 잡설 중지하시고 안전장구 착용하셨으면 꼭대기 올라가서 매달려보랍니다. 여기는 좁고 일할 노인네는 많다고.
-‘당신의 외국어 부분
조금 '난해한 느낌이 드는 시편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늘날의 노동현장에 대한 통찰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의 앞부분은 공사판의 은어들을 나열한다. 시집을 보면 이 부분은 한국어로 '번역한 각주가 나와 있기도 한데, 노동현장을 경험해보지 않은 독자들은 그 각주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거푸집이나 "계단 꽁지"나 “직각자” 같은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만 해도 직관적 이해는 불가능했다.
이 시편은 노동현장의 말이 한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라고 했다. 화자는 먹고살기 위해 '외국어를 익힌다. 그런데 작품의 뒷부분에서는 갑자기 "건설표준어 준수"를 종용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은 현장의 바깥에서 일을 지시하는 중간관리자 내지는 작업을 감시하는 외부인가 공무원일 것이다. 명령은 상하관계를 폭로한다. 아마 ‘(건설)표준어'를 주문한 사람은 '외국어를 쓰는 노동자들보다 높은 사회적 위치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언어의 관계가 복잡함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의 가장 하층에는 아직 ‘외국어’를 익히지 못해서 노동도 할 수 없는 실업자들이 있다. 그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외국어’를 습득한다. 그런데 정작 ‘외국어’에 익숙한 노동자들은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보다 약자이다. 이렇게 ‘당신의 외국어’는 노동자의 은어가 일상어와 이중으로 분리된 상황임을 지적하고, 그 상황에서 노동현장의 식민화를 함축한다는 사실 또한 힐끗 암시한다. 앞의 작품이 ‘난해’한 형식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기조차 힘든 사람들의 내면을 표상하기 위한 것이겠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의 작품도 살펴보자.
우리는 파이프를 세우고 파이프를 눕힌다 서로에게 기울지 않아도 될 만큼 다져진 바닥 끝을 끝에 조심히 내밀면 끝까지 끝을 내민다 체결하듯 서로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결속 둔중한 파이프, 그 파이프를 조이면 여전히 세워지고 여전히 일어서고 여전히 놓인다 우리는 단면을 갖추자 단면을 갖추자 단면을, 단면을 외치자 다면체를 둘러쌓는 시간은 배경만큼 광활해진다 (…중략…) 형태를 갖추면 해체되는 무대에서 외줄을 타자 쇠막대 하나를 쥐자 매달린 붕붕 뜨는 몸짓들이 있다 아슬아슬 한발에 외줄타기 다음 한발을 내딛는 몸부림은 무대를 기웃거리는 단역배우의 리허설 아시바 쇠파이프는 건설되는 모든 형태보다 먼저 서야 하고 먼저 쓰러져야 하는 해체를 위한 약속. 존재하지 않았던 온전한 형태를 가져본 적 없는 우리는, 모든 다면체를 위한 우리는
-‘해체되기 위한 쇼’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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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앞부분은 여러 개의 파이프가 함께 누워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낸다. 시인 자신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 대목을 읽고 이성부의 ‘벼’를 떠올렸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 기대고 산다. / 햇살 따가워질수록 /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그 작품 말이다. 이성부는 당시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고, 이 작품 속 벼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을 그려낸 것으로 읽혔다. 이용훈의 작품 속"파이프도 그렇게 서로 기대는 민중-노동자를 표상한 듯하다.
그런데 절박하면서도 결국 희망적인 메시지로 끝을 맺는 이성부의 작품과 달리, 이용훈은 결연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은 노동자의 삶이 명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채 위태로운 직립과 해체를 거듭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이 결국은 "해체되기 위한 쇼불과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육체노동이 무망한 자기소멸의 연속일 수도 있음을 이렇게 구조적으로 형상화한 시인은 많지 않다.
4. 노동에서 사랑으로
다음으로 살펴볼 책은 옥빈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업무일지>이다. 옥빈은 충남 출신으로 대우조선에서 일을 하다가 현재에는 기계장비를 판매, 설치하는 회사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그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 내지는 소상공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에서 많은 제조업 '기업'은 결국 대기업 같은 곳에 하청을 하고 있으며, 이때 하청기업은 실질적으로 정규직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일회용 노동자에 가까운 처지일 때도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옥빈의 작품도 현재의 노동시장을 보여주는 일종의 노동문학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다음의 작품은 '자본가'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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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적서를 보내며’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 견적서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시편이다. 이 작품은 '노동시'인가? 회사에 고용된 사람만이 노동문학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본가'의 목소리를 담은 이 작품은 노동시가 아니다. 그런데 작중 화자는, 정규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보다도 더 취약해 보일 수 있을 만큼, 일견 비굴해 보일 법도 한 어투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자본가'라는 존재가 항상 '노동자'보다 좋은 것만은 아니며, 판촉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라고 하는 편이 정당할 것도 같다.
물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어쨌거나 기업을 하는 사람은 노동자보다 자유롭다. 보통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해진 업무만을 수동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반복 작업은 노동자를 수동적 존재로 만든다. 반면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번거로운 영업의 부담까지 견뎌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영업 자체가 주체적인 기투인 셈이다. 사장은 어쨌든 노동자보다 많은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옥빈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주도적으로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는 데 급급하지 않고, 차라리 "눈물"과 "용기"로 이루어지는 "사랑"(<생산성 향상에 대하여>)을 창조해내려고 한다. 갑자기 사랑이라니, 무슨 말인가.
저기서 여기까지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힘들었던 삶의 추억이 자꾸 나를 울렸다
공고를 졸업할 무렵 미래는 잴 수 없는 불안이었다
그렇게 팽개쳐진 날들은 독서처럼 조용했고, 내가 방관했던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흘렀다
여기까지 기록할 역사가 너무 빈약하다
빼앗긴 자유와 희망의 눈금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작하자
여기서 저기까지
알맞은 자리 저만치 안개의 강이 흐른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강둑을 따라 내 인생의 그래프는 자주 반복 주기를 갖는다
미래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내가 풀어놓았던 저기까지의 일들을 방관할 수 없다 꼼꼼하게 눈금을 읽어야 한다
하루가 너무 빠르다
저기까지 기록할 이력은 짧지만 나는 전문가다
아름다운 추억의 거리를 재야겠다
-‘줄자’ 전문
인용한 작품에서 화자는 줄자를 재고 계량하는 단순노동 같은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전문가”다. 전문가라는 말은, 이용훈 식으로 말하자면 “해체되기 위한 쇼”를 계속 해왔다는 의미이고, 실제로 이 시편은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온 사람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런 와중에도 줄곧 자신이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추억"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루가 너무 빠르다"고 한탄하면서 매일매일의 일에 충실하면서도 과거를 “기록”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꿈꾸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이 과정을 “몸살 같은 사랑"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신승리법' 같은 것이라 할수도 있겠지만, 문학은 본래 그렇게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힘겹게 "사랑"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줄 수도 있는 언어적 창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옥빈의 시가 실질적으로는 '노동자이지만 '사장'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면서도, 그 구조 속에서 삶의 '주인'이 되어 희망과 사랑을 주체적으로 노래하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노동시의 현황을 톺아본 후 이용훈과 옥빈의 작품을 간략하게 분석했다. 이용훈은 노동자의 삶이 마모된다는 점을 현시하고, 옥빈은 노동자 같은 처지의 '자본가가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그려냈다. 이들은 제조업 노동자들의 정동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희소하고 귀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1) 장슬기 기자, ‘노동전문기자는 사치다’, <미디어 오늘> 2022.10.16. 더불어민주당에서 환노위를 1지망으로 희망한 의원이 없다는 사실 또한 이 기사를 참조했다.
2) 천현우, <쇳밥일지>, 문학동네, 2022, 283~284면.
전철희, 문학평론가.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kjturi@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