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밭, 환경을 생각하는 식탁, 소소하지만 확실한 연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들이 장소는 시장이다. 이른 아침 꽃시장도 호떡과 붕어빵 향기가 진동하는 겨울 전통시장도 좋지만, 그 중에서도 파머스 마켓이 제일이다. 파머스 마켓은 농부가 밭에서 기른 농작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직거래 장터다. 시장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나무판자에 나란히 모여 있는 제철 채소들과 과일이 보인다. 봄에는 달래,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에는 고구마, 겨울에는 귤 계절이 흐를 때마다 장터의 색과 향도 달라진다.
파머스 마켓에서는 심고 거둔 사람이 말해주는 채소나 과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다른 부추보다 두 배는 두꺼운 두메부추에서는 어떤 매운맛이 나는지, 다 익은 토마토와 덜 익은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밤을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빨간 래디쉬, 마른 표고버섯, 오색빛깔 알감자와 농부가 건네준 이야기를 장바구니에 차례로 담는다. 덤으로 얻은 방울토마토 한 움큼도 그들 사이에 있다. 아직 먹지 않았는데도 괜스레 마음이 불러온다.
농부와 대화하며 채소가 자라난 밭을 상상하는 시간을 내가 먹을 것을 나의 손으로 골라 한 입 베어 무는 장소를, 그렇게 더 든든해지는 식사를 나의 친구와도 나누고 싶어졌다. 청년을 위한 파머스 마켓을 열어보기로 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끼니의 이야기를 모아보고 싶다는 회지, 20대의 식사가 궁금했던 소정, 농사 짓는 일이 꿈이라는 수빈, 제철 식재료에 농부의 이야기를 버무려 선물하고 싶은 가영, 네 사람이 모여 밥 한 끼 함께 먹었다. 그때가 벌써 2019년 5월, 4년 전이다.
벗밭의 시작
친구를 뜻하는 벗, 싹이 자라는 밭을 이어 <벗밭>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벗을 담았고, 우리가 먹는 끼니와 식탁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니 '밭'도 넣고 싶었다. 벗밭을 영문으로 옮기면 'butground'가 되는데, 벗은 친구인 동시에 ‘그럼에도’라는 뜻을 가리킨다. 숨가쁜 일상 속에서 한 끼를 든든하게 챙기는 것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건강하면서 생산하는 이, 환경 모두와 지속가능한 식사를 기억해보자는 제안을 녹여냈다.
끼니에 대한 이야기와 파머스 마켓을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자 인스타그램 채널을 만들었다. 벗밭 멤버의 식사를 돌아보는 '벗의 밥상', 20대 친구들과 식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먹고 살자고 하는 이야기, 제철 식재료로 만든 요리 레시피를 소개하는 '따라 한그릇' 시리즈를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 업로드했다.
때로는 손을 삐끗해 소금이 한 움큼 들어가 버린 짜고 쓴 취나물 무침이나, 한쪽 면이 타서 노릇하게 구워진 쪽을 위로 올라가게 담은 전이 ‘밭따라 한그릇’에 담겼다.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통의 식사와 삶을 보여주고자 했다. 휴대폰 화면 너머에서 벗밭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친구들이 언젠가 내가 했던 비슷한 실수를 떠올리며 작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토마토 향이 가득한 '벗의 밥상'도 있었다. 가족이 택배로 보내준 토마토5KG을 소진하는 과정을 담은 콘텐츠였다. 생으로도 먹고, 계란과 볶아도 먹고 토마토로 소스와 병조림을 만들었는데도 다 먹지 못해 결국 토마토를 나누어 먹을 친구를 찾는다는 에피소드가 안타까웠다. 생활비 일부를 떼어 과일을 사는 것도 큰 결심인데, 사고 난 뒤에도 썩기 전에 모두 먹으려면 2주 내내 아침은 그 과일이라는 말을 들은 뒤라 더 그랬다. 식구 네 명과 사는 내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삶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이야기' 코너에서는 벗밭 멤버의 식사에서 나아가 20대 청년이 요즘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사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진행한 콘텐츠가 <끼니만족설문조사>다. 크게 식사 횟수와 형태, 끼니 만족도를 물어보았다. 마지막 문항은 내가 바라는 식사를 묻는 주관식 질문이었는데,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건강'이었다. 천천히 밥을 먹을 수 있고, 더 좋은 식사를 챙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답변도 눈에 띄었다. 10명 중 2명은 한 끼를 음료로 해결하고 있다는 수치와 건강이라는 단어를 겹쳐보았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더라도 건강하게 먹고 싶다는 가깝고 먼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94명의 답변으로 20대 청년의 삶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벗밭의 물음에 응답한 이들에게만큼은 건강한 한 끼를 선물하고 싶었다.
가을에 열릴 파머스 마켓의 콘셉트를 신선한 농산물과 간식 꾸러미로 정했다. 혼자 살아도 다양하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농산물을 적은 양으로 구성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벗밭 멤버와 밭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가까운 사람 중 농사를 업으로 삼은 사람도 없었다. 파머스 마켓을 열려면 '파머(farmer)'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농부를 만나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행운과 재고, 그리고 구운 감자
행운은 우연히 다가왔다. 어느 날 학교 앞 카페에서 희지와 가영은 과연 파머스 마켓을 열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마침 옆자리에서는 회지와 가영이 재학 중인 학과의 교수님께서 회의를 하고 계셨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마주앉아 음료만 마시던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시는 교수님, 교수님께선 고민을 살짝 엿들었다며 벗밭의 취지와 어려움을 묻고 천천히 들으시고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한살림1)재단의 곽금순 대표님을 소개받아 만나 뵙게 되었다. 친환경 생산품과 친환경 생산자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다니. 마치 꿈만 같았던 순간이었다.
한살림재단의 지역사회활동 지원사업과, 한살림 윤희진 선생님과 박소현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의 친환경 채소와 과일을 구입할 수 있었다. 물에 씻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과일 꾸러미, 요리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채소를 소분해 모은 꾸러미와 구황작물 꾸러미, 배부른 간편식 꾸러미, 조리하거나 가공하지 않은 1차 생산물 위주로 마켓의 물품을 정했다.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 그중에서도 과일과 채소를 바란다는 설문조사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날짜는 20대 청년이 많이 거닐고 머물 서강대학교의 축제날로 정했다. 가격은 소비자가의 절반, 절반은 한살림재단에서, 나머지 절반은 구매하는 사람이 부담하는 식이었다.
처음 시도한 파머스 마켓의 결과는 다소 절망적이었다. 채소 꾸러미는 30개 중 고작 3개 팔렸고, 구황작물 꾸러미와 과일 꾸러미도 넉넉히 남았다. 반면 간편식 꾸러미는 마켓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찍 동이 났다. 판매 물품에 대한 수요조사도 진행했고, 바라는 끼니의 모습을 묻기도 했는데 왜 이렇게 많이 남았을까.
우리는 수북하게 쌓인 재고 양배추와 파, 마늘과 고구마에서 청년이 바라는 삶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봤다. 직접 해먹고 싶어도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없어서,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마칠 시간이 없어서 채소나 과일 꾸러미 대신 간편식 꾸러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불가피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벗밭의 첫 해 활동을 마무리하며 소정과 수빈, 회지, 가영은 가장 보람찬 활동으로 파머스 마켓을 꼽았다. 재고의 양만 놓고 보자면 실패의 경험으로 회고할 수도 있었겠지만, 작은 변화는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마켓을 마치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후기 게시물에 벗밭의 꾸러미를 구매한 이가 남겨준 댓글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오늘 제 야식은 벗밭에서 샀던 감자를 구운 것과 포도였어요!! '벗밭스러운' 야식 같아서 괜히 뿌듯해요(?)"
그에게 벗밭스러운 야식 메뉴는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 혹은 실천하기 어려웠을 바람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매운 떡볶이나 갓 튀긴 치킨을 배달시키지 않고, 구운 감자와 포도라는 야식을 선택하는 데 벗밭의 파머스마켓이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이 덩달아 기뻤다.
사람들이 벗밭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식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던 20대의 식문화가 넓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감격스러웠던 적이 있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는 식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어딘가 서툴게 꺼낼 때 정말 뿌듯하다. / 회지
만나지 않고도 가능할까?
짧은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 벗밭은 새로운 멤버들과 두 번제 해를 맞았다. 그 사이 소청과 수빈이 벗발 활동을 마쳤고, 기현과 남신, 영현이 새로 합류했다. 첫해에는 파머스 마켓과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통해 '건강하게 먹는 일에 대해 주로 말했다면, 2020년에는 반경을 넓혀 '건강하게 생산하고 소비해보는 경험을 제안했다. 내 몸의 건강함 뿐 아니라 먹거리가 자라는 환경, 그것을 기르는 생산자와 더불어 건강할 때 온전하게 건강한 식사가 완성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건강한 소비 경험은 파머스 마켓으로 이어나가고, 건강한 생산은 농가방문을 통해 결혼하기로 했다. 매달 공유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식사모임과 같이 모여 정도 보고 식사도 하는 지역 기반의 생활자 자치모임 '반상회'도 기획했다. 우리의 식생활, 먹거리에 관한 담론을 확산할 수 있는 온라인 채널도 놓칠 수 없었다. 인스타그램 콘텐츠에 뉴스레터까지 더해졌다. 이렇게 생산과 소비, 식사와 대화를 함께 경험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먹거리'라는 키워드로 모인 청년커뮤니티가 형성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편히 마주앉아 밥을 먹지 못하는 세상을 맞게 되었다.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같이 먹지 못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벗밭의 두 번째 해를 상상하며 식탁 곁에 둥글게 앉아 이야기 나눌 상상을 여럿 쌓아두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었다. 머지않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플랜 A를 미루어두고 플랜 B를 찾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회의도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첫 번째 오프라인 회의가 상반기의 마지막 대면 모양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오프라인 활동을 축소하는 대신 온라인 활동에 집중하는 방향을 택했다. 봄과 여름에 걸쳐 긴 호흡으로 다루었던 주제는 제로웨이스트2)였다. 우리는 빨대나 일회용 컵 등 생활용품에 대한 제로웨이스트와 더불어 먹거리 소비와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중에서도 판매할 수 있는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되거나 가공되는 못난이 농산물을 알리고 활용해보기로 했다. 못난이 농산물을 유통 및 판매하는 기업 <프레시어글리>와 의 인터뷰 콘텐츠를 만들었다. 상처 난 토마토와 초당옥수수를 주요 식재료로 삼아 벗밭 멤버와 먹기모임을 진행하고, 그 과정을 인스타그램 실시간 방송으로 송출했다. 생산되는 농산물의 30% 정도가 모양이 예쁘지 않거나 작은 흠이 있어 버려진다고 한다. 맛과 품질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에게도, 벗밭의 독자에게도 식탁에, 마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밭에서부터 폐기되는 보이지 않는 쓰레기를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밭의 장면이 더욱 궁금해졌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온라인으로만 만나던 벗밥의 팔로워(우리는 이들을 벗밭의 벗이라 부른다.)들의 손을 잡고 밭으로 가 땅을 일구고 농부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거창의 사과밭과 유기 + 농
운이 좋게도 방역 지침이 조금 완화되었던 여름날, 4명의 참가자와 거창 사과농가에 방문할 수 있었다. 첫해, 벗밭과 인연을 맺었던 한살림 연합을 통해 만난 청년 생산자 박중규 생산자님의 사과밭이었다. 아른 아침, 여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사과밭에서 우리는 사과 잎을 땄다. 사과가 아닌 사과 이파리를 딴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과가 고르게 빨간 색으로 익으려면 열매 주변에 난 사과 이파리를 떼 주어야 한다고 농부님은 말씀하셨다. 그밖에도 잡초를 베는 일, 꽃을 골라 따주는 일, 열매를 솎아주는 일, 가지를 잘라주는 일 등 맛있는 사과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심기와 수확하기 사이에 부단히 많은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걸 배웠다. 땀을 잔뜩 흘리고 먹는 새참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도 알게 됐다.
오전에는 땀을 흘리며 밭에서 경험했다면 오후와 저녁에는 생산자님과의 대화를 통해 깊어져갔다. 우리가 만났던 농부님은 먹거리와 그들이 자라는 땅을 건강하게 가꾸어나가는 친환경 생산자님들이셨다. 첫날에는 청주에서 거창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주신 나기창 생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종류의 채소와 쌀을 선물해주셨는데 그중 방울토마토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종3) 씨앗으로 재배한 것들이었다. 나기창 생산자님은 토종이 더 좋거나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재배되는 양도 적고, 방식도 수월하지 않다고. 그럼에도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토종 작물을 재배하고 계셨다. 물기가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한, 초록빛이기도 하고 검은빛이기도 한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한 알 한 알 열심히 씹어 삼켜보았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소거되는 수많은 삶의 방식이 떠올랐다. 저마다의 결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세상의 논 을 상상해보았다. 분명 오색빛깔로 빛날 것만 같았다. 그 다음 날에는 거창의 한살림 산하늘 공동체의 생산자님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고, 셋째날에는 정남 2030 청년 농부와 이야기장을 마련했다. <지속가능한 농업과 노동, 그리고 먹거리>라는 주제 안에서 서로 질문을 주고받았다. 유기농업에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농업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는 뜻을 가진 '유기와 농업'을 연결해 보았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농산물을 예쁘게 키워내는 효율적인 방식이 아닌, 우리가 닫고 있는 땅과 그곳에서 자라는 음식과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연결성 이 보였다. 유기농이라는 방식을 시도하고 어렵게 지켜나가는 농부의 삶에서 더불어 건강한 먹거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로가 지켜내는 건강함
가을에 열릴 파머스 마켓에는 농가방문을 통해 경험한 밥의 이야기. 식탁 너 머의 과정을 충분히 담아보기로 했다. 우선 농가방문에서 만난 생산자분들께 건강한 농산물과 가공품을 제공받았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농부님들을 마켓 현장에 모실 수는 없었지만 농부의 인터뷰를 팸플릿으로 가공해 꾸러미와 전달했다. 지난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꾸러미의 품목도 새로 정했다. 과일 위주의 1차 생산물 꾸러미, 부각이나 매실원액 등 원물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가공품 꾸러미가 그것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대관할 수 있었던 오프라인 공간이 귀했던 그때에. 서강대학교 인근 마지스 예수회 청년센터에서 공간을 지원해주셔서 안전하계 마켓의 문을 열게 됐다. 첫 해와 동일하게 소비자가의 절반 정도로 가격을 책정했음에도, 모든 꾸러미를 남김없이 소진했다. 양손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던 길, 빗발의 벗이 오늘 저녁 차려낼 식탁의 모습이 괜스레 궁금해졌다. 사과와 포도 토마토중과 함께 그 것을 심고 가꾸고 거둔 농부의 계절도 깃들어있을까. 우리의 작은 팬플릿.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농부의 이름과 삶을 제법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보았다. 마켓을 마치고도 농가방문에서 경험했던 토종 식재료를 나누고자, 요리 연구가 월란 손현숙 선생님과 명림 심충택 생산자님을 모시고 토종을 주제로 한 소셜다이닝 행사를 열었다. 뉴스레터와 온라인 콘텐츠도 남은 가을과 겨울 동안 꾸준히 발행했다. 코로나라는 큰 장애물 앞에서 각자의 현생과 벗밭 활동을 무사히 병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팀 활동에서 아무런 기여 없이 얹히어 가는 사람을 혼히 ‘무임승차한다’고 묘사한다. 당시 벗밭의 다섯 사람들 모두는 자신이 무임승차자라며 서로에게 무한한 사과와 감사를 보내곤 했다. 모두가 무임승차를 했다면 벗밭이라는 탈것은 도로 한복판에서 가만히 멈추에 있어야 했을텐데, 이상하게 탈것 안에서 바깥을 보면 풍경은 늘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명이 잠시 자리를 바우면 다른 한 명이 대신 운전대를 잡았고, 또 다른 한 명은 운전자의 어깨를 주물러주곤 했다.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벗밭은 무사히 건강함이라는 방향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벗발. 온라인이어도 괜찮아
2021년은 공개 리크루팅을 통해 새로운 멤버를 모집했다. 샘물과 수아가 벗밭의 멤버가 되었다. 첫해에 같이 벗밭을 꾸렸던 수빈도 다시 멤버로 함께하게 됐다. 특히 생물은 인스타그램으로 연결된 사이였는데. 농촌에서의 삶과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다. SNS만으로도 관계가 형성되고,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난 2년 동안 벗밭이 온라인을 통해 쌓아왔던 식사에 대한 이야기가 유효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3년차에 들어서자 벗밭 활동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코로나 상황에도 제법 익숙해져 온라인 기반의 행사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강구하며 활동을 시작했던 것 같다. 고민 끝에 우리가 먹는 것이 어디서 출발해 식탁까지 오르는지 먹거리의 여정을 기록할 수 있는 ‘음식지도 툴킷’과. 음식을 남김없이 먹을 수 있도록 저마다의 1인분을 찾아보는 ‘나의 1인분 찾기 툴킷’을 제작했다. 이후 툴킷을 활용한 온라인 워크숍을 열어 벗밭의 벗과 공방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특히 4월에는 환경매거진 <바질>의 김승현 대표님과 함께 먹거리의 탄소발자국을 짚어보는 비대면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먹거리의 환경적 파급력을 실감하며 식탁과 환경의 연결성을 선명히 드러내고 싶다는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1월에는 다큐멘터리 <자연농>의 강수희&패트릭 감독님과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작가님을 모시고 토양을 주제로 온라인 토크쇼도 열었다. 식물 그리고 먹거리가 자라기에 충분히 건강한 토양의 모습에 대해 서로 묻고, 자연을 이기거나 착취하기보다는 더불어 살 수 있는 법을 듣는 시간이었다.
다시 여름 사과밭
여름방학엔 벗밭 멤버들과 지난해에 갔던 박중규 생산자님의 사과밭에 방문했다. 거창에 도착한 날에는 별이 따뜻하니 좋았다. 숙소에 발 들이자마자 옷 을 갈아입고 사과밭으로 향했다. 나무 아래에 서서 생산자님께 사과 따는 법을 배웠다. 사과가 멍들거나 다치지 않게 위로 살짝 올려 가지에서 떼어내면 끝. 너무 작거나 초록빛이 많이 감도는 사과는 따면 안 되고, 탄저병에 걸린 사과는 딴 뒤 바닥에 버리면 된다고 하셨다. 탄저는 비를 통해 전염되는 사과의 뿐이다. 작은 자국이라도 하루가 지나면 금세 크게 번지고 옆 사과로도 옮을 수 있기 때문에 빨리 골라내주어야 했다. 기후변화로 장마가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며, 적과4) 작업이 끝난 뒤에 가을비를 통해 탄저병이 돌아 피해가 제법 컸다. 버리기 전에 탄저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어보았다. 사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한입 더 먹고 싶어지는 싱그러운 맛이었다. 크게 맽힌 사람에 탄저병이 옳았다고 버려야 한다니. 이렇게 잘 익었는데. 난 농부가 아닌데도 ‘아이고’ 하는 탄식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과 하나 따고 탄저 사과 두 개 버리며 안타까운 마음에 옆에서 같이 일하던 멤버에게 말을 걸었다. 버려지는 게 너무 않다고 작은 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친환경 사과를 산다는 건, 탄저 사과도 같이 사는 게 아닌가 하고, 다음 나무로 발을 옮기며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 사는 소비자가 부담할 수 있는 짐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가격이 조금 더 비싸고 모양이 고르지 않아도 함께 건강할 수 있는 먹거리를 선택하는 것, 내일의 세상을 같이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게 문득 감사해졌다. 도시에 사는 청년이 소비와 생산이 더불어 건강한 식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벗밭이 지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싶어졌다. 동시에 벗밭 활동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자문했다. 외부의 지원과 자금으로 운영하던 지금의 구조로는 벗밭의 지속가능함을 담보할 수 없었다. 동아리 형태로 지속하다가는 바쁜 일상에 치여 흐지부지 마무리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활동하는 멤버에게 제공할 수 있는 마땅한 인건비와, 충분한 활동비를 우리 안에서 자급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밭 활동을 중단할 결심을 하기도 했다. 앞서 스스로에게 건넨 벗밭의 수익성에 대한 질문에 뚜렷하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좋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사랑과 희망, 즐거움 외에도 밥과 돈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건강함의 모양을 잃지 않고 삶으로 지켜나가고 있는 벗밭의 많은 벗들 덕에 무너지지 않고 사랑과 희망 쪽을 향할 무모한 힘이 생긴다. 더 많은 식구, 더 많은 농부 친구와 더불어 꾸리는 식탁이 세 배는 풍요롭고 즐겁다는 걸 지난 4년간의 벗밭 활동을 통해 알았다. 농부 친구가 선물해 준 여름 바질, 그 바질로 만든 페스토를 함께 먹은 친구들, 둘러앉은 식탁을 추억할 때 차오르는 든든함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 난 조금 더 오래 ‘벗밭’해보기로 결정했다. 올해에는 기현, 한솔과 벗밭의 자립을 이루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보통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창업’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을 시도해 보며 벗밭의 지속가능성과 우리 먹거리의 지속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중이다. 올해 4월에는 벗밭의 아지트로 쓸 사무실도 구했다. 벗밭의 일에 시간과 마음을 더 쓰고 싶다는 의지이기도 했고 더 많은 친구들을 초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5월에는 책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의 저자 이동호 작가님과 벗밭 아지트에서 첫 행사를 열었다. 다가오는 8월에는 제철과일을 함께 챙겨먹는 ‘즉흥과일클럽’의 첫 모임을 시작해 볼 예정이다. 또 적극적으로 벗밭과 식탁에서 만나 더불어 성장할 친구들을 찾고 만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은 출장을 떠나지만 지치기보다는 제법 힘이 난다. 겨울과 봄에는 홍성의 <논밭상점>에 들러 다양한 농부의 일을 경험했다. 생산자님은 논밭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여러 식구들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고민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포장하는 일도, 하루 종일 밭에서 로즈마리나 민트를 자르는 일도 모두 농부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하셨다. 하나라도 빠지면 돌아가지 않는,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있는 모든 농사의 과정을 다시 한 번 톺아보았다. 초여름에는 <오와린 농장>의 이재영 생산자님과 만나 다른 곳에 살며 그리고 있었던 더불어 건강한 세상이라는 동일한 꿈을 나누기도 했다. 오와린 농장에서 자라는 동그란 가지와 붉은색 감자, 노란 패티팬 덕분에 채소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알 수 있었다. 지난달에는 제주도에 가 모든 것을 갖추지 않더라도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식사를 도시의 청년에게 전할 계획을 <소농로드>와 구체적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남은 한 해 동안은 서로의 끼니와 삶을 묻는 식구 커뮤니티를 차근차근 만들어보려 한다. 밭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이 도시의 식탁으로 도착했을 때 밭의 소리가 나란히 들릴 수 있도록 농산물 꾸러미와 생산지의 이야기를 계속 해서 실어 나를 것이다. 또 바쁜 일상 속,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나의 식사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함께 모여 건강한 먹거리를 챙기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함께 벗이 되고 밭이 되는 일에 대하여
벗밭을 길게 풀어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이 되고 밭이 되는 일에 대하여’가 된다. 난 앞으로 벗밭이 마당발이 되었으면 좋겠다. 밭에 갈수록 어떻게 더 많은 존재와 넓은 우리가 될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끼니 바깥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이름들을 선명하게 부를 수 있게 될 때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리라 믿어본다. 더 유심히 묻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이야기가 많다는 걸 벗밭 활동을 통해 배우고 있다. 이 벗밭의 여정에 더 많은 벗들을 초대하고 싶다. 함께하는 그 식탁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든든할 거니까.
1) 한살림은 자연과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생산자와 그들의 물품을 이해하고 믿으며 이용하는 소비자가 함께 결성한 생활협동조합이다. 생명농업을 바탕으로 도농 직거래 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한살림 홈페이지의 소개 참고)
2) 제로웨이스트는 없음을 뜻하는 'zero'와 쓰레기라는 뜻의 'waste'를 합한 단어로, 쓰레기를 절감하고 자원의 순환을 장려하자는 취지의 운동이다.
3) 토종은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그곳의 기후와 환경에 적용해 온 종자를 뜻한다.
4) 너무 많이 달린 열매 나무를 솎아주고, 튼실하게 열린 열매만 골라 남기는 일.
벗밭의 인스타그램 / @butgrou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