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에 모인 세계 종교 지도자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가자 전쟁을 멈추고,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향해 국제법의 궤도를 복원하라.” 이번 회의는 말레이시아 총리실과 무슬림 월드 리그(MWL)가 공동으로 문을 열었고, 개막 연설에 선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는 ‘문명 충돌’이 아니라 ‘정의의 결핍’을 지목했다. MWL의 무함마드 알-이사 사무총장은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라며 종교 지도자들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했다. 현장에서 확인된 건 ‘종교 외교’가 정치의 둔중함을 보완하며 글로벌 여론의 지렛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도주의 지표가 급전직하하는 와중에 종교권의 연대가 외교 무대의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정상회의의 정치적 화살표는 뉴욕을 향한다. 7월 말 유엔본부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프랑스가 공동 주재한 ‘팔레스타인 문제 평화적 해결 및 두 국가 해법 실행’ 고위급 회의는 선언을 넘어 ‘구체적 이행’을 겨냥했다. 프랑스와 사우디가 공동 의장국으로 내놓은 문서에는 정착동결, 폭력 중단, 인도주의 접근 보장 같은 시간표적 조치가 담겼고, 다수 회원국 대표단이 이를 공개 지지했다. 9월 유엔총회 기간에는 후속 회의가 다시 열린다. 프랑스는 미국에 팔레스타인 대표단의 비자 문제를 재고하라고 직접 압박했고, 벨기에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상징’이 ‘절차’로, 절차가 ‘정치 비용’으로 전환되는 수순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수치는 국제사회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8월 20~27일 사이에도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475명 늘었고, 10월 이후 누적 사망자는 6만2,895명, 부상자는 15만8,927명으로 집계됐다. 8월 22일에는 통합식량안보단계분류(IPC)가 가자주(거자) ‘기아(Phase 5)’ 발생을 공식 확인했고,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니세프도 같은 분석을 재차 뒷받침했다. 현장의 교차검증 자료는 “대규모 아사·전염병 위험이 9월 말 데이르알발라·칸유니스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자 전쟁 중단’과 ‘두 국가 해법’은 구호·정치의 선후 문제가 아니라 동시 병행해야 할 ‘쌍트랙’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아세안 관측통은 “말레이시아가 종교·시민사회 채널을 묶어 중간재로 공급하고, MWL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서방 여론장을 파고드는 구조”라고 본다. 실제로 이번 회의에는 각 종단 대표단이 대거 참여했고, MWL은 ‘종교 지도자의 영적·도덕적 역할 강화’와 ‘다문화 국가의 소수자 보호’ 두 축을 후속 과제로 제시했다. 북아일랜드 평화 과정, 필리핀 민다나오 합의 등에서 성직자·울라마가 갈등 완화에 기여했던 전례를 비춰보면, 종교 지도자의 메시지는 현장 폭력의 탈진정과 인도주의 회랑 확보에 직결될 여지가 있다. 다만 이스라엘 내 강경 여론과 안보 우선 담론, 하마스의 군사·정치 이중구조, 서방의 대이란 공조 변수는 단기간 해법을 가로막는 최대 난제다. 결국 9월 총회에서 ‘정착 동결·무력 충돌 중단·인도주의 보장’ 같은 최소합의를 명문화하고, 유럽의 ‘국가 승인 러시’가 시간표를 밀어붙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국제법의 추세도 종교 외교의 등판을 거들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24년 7월 “점령은 불법이며, 정착촌 철수와 배상 의무가 따른다”는 자문 의견을 내놓았다. 그해 9월 유엔총회는 이 의견의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에 압도적으로 손을 들어줬다. 법적 구속력은 제한적이지만, 각국 정부·의회·사법의 판단 근거로 축적되고, 금융·공급망의 ‘리스크 프라이싱’으로 번진다. 브뤼셀과 파리가 움직이면, 런던·오타와·캔버라의 보수적 주저도 좁아질 수 있다. 정상회의가 이 흐름을 여론과 도덕의 언어로 지원했다는 점에서, 쿠알라룸푸르는 ‘선언’이 아니라 ‘정치비용’의 기폭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