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뮈니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의 생애와 ‘무라야마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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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

 

일본의 제81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일본 총리로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무라야마 담화’가 항상 따라붙는다. 그는 일본의 보수 주류 정치가가 아닌 사회당 출신 총리로서, 전후 50주년이던 1995년, 일본의 과거사를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국내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뚫고 발표된 이 담화는, 이후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을 가늠하는 표준이자 양심의 척도로 남게 되었다.

1924년 일본 남부 오이타 현의 한 어부 집안에서 태어난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1남매 중 한 명으로 자랐다. 젊은 시절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징집되어 군 복무를 겪었고, 패전 직후인 1946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수산업 협동조합의 간부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와 평화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키워갔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의 정치적 성향과 반전 평화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1963년 고향 오이타 현의 현의회 의원을 거쳐, 1972년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중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중앙 정치에 입문했다.

무라야마는 오랫동안 일본사회당에서 활동하며 평화헌법 수호와 반군비 입장을 견지해온 대표적 진보 정치인이었다. 일본은 전후 줄곧 보수 자민당 일당 지배가 지속돼 왔으나, 1993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정국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사회당은 다른 야당들과 연립해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을 출범시켰고, 무라야마는 그 해 말 사회당 중앙위원장(당수)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연정 내 갈등으로 총리가 잇따라 사임하는 혼란 속에서, 1994년 6월 무라야마는 보수 자민당과 전격적인 대연정을 구성하며 일본의 첫 좌파 총리가 되었다. 이는 1947년 가타야마 내각 이후 거의 50년 만에 등장한 사회당 출신 총리로, 당시 70세의 무라야마는 신문들로부터 “선량한 할아버지 총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연립 내 다수파는 여전히 자민당이었고, 무라야마 내각은 출범부터 취약한 기반 위에 있었다. 그는 “이 정권은 이념이 아니라 현실 정책이 이끈다”며 당의 이념 노선을 일부 수정해야 했다. 예컨대, 사회당이 그토록 반대하던 미일안보조약과 자위대에 대해 무라야마는 집권 후 헌법 합헌으로 인정하는 과감한 현실적 결단을 내렸다. 1994년 7월 국회 연설에서 그는 일본국 헌법 9조 하에서도 자위대 존속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공식 표명했는데, 이는 오랜 사회당 강령을 뒤집은 조치로 당내 강경파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타협은 보수 파트너와의 연정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그의 정치 철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기도 했다.

무라야마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연이은 대형 악재에 직면했다. 1995년 1월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대지진)이 발생해 6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같은 해 3월에는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로 시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었다. 이 두 참사는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고, 정부의 재난 대응 능력을 시험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초기 대응이 지연되면서 지도력에 상처를 입었는데, 특히 지진 피해 현장에 대한 늑장 대응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전쟁 직후부터 사회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한신 지역 주민들마저 크게 실망했고, 위기관리 경험 부족을 드러낸 총리에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이 커졌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미즈시마 고이치 주한일본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미즈시마 고이치 주한일본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재난 수습 과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국가 지도자로서 역사적 과제를 직면하고 있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1995년은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도 역사적 의미가 깊은 해였다. 일본이 패전한 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과거사의 청산 문제는 여전히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국내외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었다. 1980년대 말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사망 이후 일본에서도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공식적인 사죄나 배상 문제에서는 보수 세력의 저항이 뿌리깊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의 역사 인식을 놓고 우익 진영과 진보 진영의 입장 차가 컸다. 1993년 고노 담화로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를 처음 인정하며 변화 조짐이 보였지만, 광범위한 식민지배와 침략 행위 전체를 놓고 총리가 직접 나서 사죄한 적은 없었다. 무라야마는 연립정권의 수반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전후 50년을 맞은 1995년, 무라야마 정부는 과거사에 관한 국회 결의와 총리 담화 발표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부터 거센 정치적 진통을 수반했다. 사회당과 무라야마 본인은 분명한 사죄 결의를 희망했지만,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 내 다수파와 보수층은 “이제 충분히 사과했다”거나 “또 사죄하면 국익을 해친다”는 입장이었다. 6월 9일 일본 중의원에서 우여곡절 끝에 채택된 종전 50주년 결의문은 결국 “‘깊은 반성’을 표명한다”는 모호한 표현에 그쳤고, ‘사죄’(謝罪)라는 단어조차 빠진 반쪽짜리 결의로 통과되었다. 애초 사회당이 제출했던 강도 높은 사죄 결의안은 자민당 등의 압력으로 크게 후퇴한 것이다. 표결 결과는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국회의원들이 불참하거나 기권하는 혼란상으로 나타났다. 전체 502명 중 고작 230명만 결의에 찬성했고, 240명 넘는 의원들은 표결을 기피했다. 보수 자민당 소속으로도 50여 명이 “너무 지나치다”며 표결에 불참했고, 사회당 내에서도 “불충분한 사죄”라며 14명이 동참하지 않았다. 이는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 내부의 분열과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편 보수 세력은 민간 차원에서도 결사적으로 반대 움직임을 벌였다. “일방적 사죄 결의는 미래 세대의 자긍심을 해치고, 외국으로부터 끝없는 배상 요구를 불러올 것”이라는 취지의 반대 청원 운동이 전개되어, 1995년 초 수백만 명의 서명이 모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만이 유일하게 침략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전쟁 책임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국내 여론의 압박은 무라야마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었다. 연립정부 내부에서도 “지나친 자학 역사관은 곤란하다”는 신중론이 있었고, 심지어 무라야마 자신의 사회당 동지들 중 일부마저 연정 유지를 위해 사죄 수위를 낮춰야 한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는 역사의 교훈 앞에 겸허해지는 것이야말로 일본이 나아갈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시아 이웃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신념 하에 각 당 간사장들을 직접 만나 담화 내용 조율을 시도하는 등 진심 어린 설득에 나섰다. 결국 무라야마는 자신의 이름을 건 총리 담화 형식으로 보다 분명한 사죄를 표명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전후 50주년 종전 기념일 추모식에 맞춰 역사적인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전국에 생중계된 기자회견장에 나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담화문의 핵심 대목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 정책을 잘못 결정하여 전쟁의 길로 나아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국가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이 짧은 연설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이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한다는 것이다. 무라야마는 아울러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밝히며, 이러한 역사 인식이 미래 세대에 교훈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국내외를 막론하고 추모하며 애도의 뜻도 함께 표명했다. 담화 말미에는 일본이 앞으로 “독선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국제평화와 비핵 군축에 앞장서겠다는 다짐을 덧붙였다. 이는 패전 이후 오랜 세월 자국의 피해만을 부각하고 가해 책임에는 소극적이었던 일본 정부의 기존 태도와 결별하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무라야마 담화 발표 직후, 국내외의 반응은 극적으로 엇갈렸다. 해외에서는 환영 일색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일본 총리의 솔직한 사죄 표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특히 오랫동안 식민 지배와 전쟁 피해를 겪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이를 공식 사과로 받아들이며 환영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총리가 직접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의심할 여지 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사죄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한국의 언론과 국민 다수는 “진정성 있는 사죄”라고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 내 우익 세력이 이 담화 정신을 얼마나 공유할지에 대한 의구심도 표했다. 중국 정부 역시 “정치적 용단”이라며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일본 정치인들이 이 담화의 정신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일본 내 역사의식의 불균형을 꼬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국들은 대체로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서 지속되길 기대하며 이를 높이 평가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지지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퍼져나갔다. 대다수 일반 국민들은 이전부터 “이젠 정부가 뭔가 확실히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총리의 사죄 표명을 환영하거나 최소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실제 여론조사들에서도 일본인 다수가 “이웃 나라들에게 너무 늦은 감은 있지만 사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아키히토 일왕(당시 천황)까지 종전 기념일에 “깊은 반성”을 표하며 과거 전쟁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등 이례적인 언급을 해, 무라야마 담화의 진정성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사회가 전후 50년을 맞아 역사와 화해하려는 성숙함을 보인 긍정적인 징표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정치권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보수 성향의 일부 정치인들은 “왜 우리만 가해자로 몰려야 하느냐”는 불만을 공공연히 터뜨렸다. 담화 발표 직후 문부상(교육부 장관) 시마무라 요시노부는 “거듭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며 “일본이 반드시 침략자였다고는 볼 수 없다”는 망언을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이를 철회하는 소동도 있었다. 자민당 내 강경 보수파들은 무라야마 담화가 국회 결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비난했지만, 당시 자민당 총재였던 하시모토 류타로(곧 이어 총리가 됨)는 “나 역시 무라야마 담화와 동일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며 담화를 사실상 추인했다.

여당 내 논란을 무마하기 위해 무라야마가 담화를 내각 공식 결정(각의 결정) 형식으로 채택한 것도 주효했다. 그는 자신의 담화가 단지 개인 의견이 아닌 정부 공식 견해로서 후대 정권들도 따라야 할 각의 결정으로 남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뒷이야기는 무라야마가 국내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왜 담화를 추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일본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를 내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설령 일시적으로 국내 비판이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일본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침략이 아니었다거나 식민지 해방이었다는 식의 역사관은 중국·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2020년에까지 강조했다.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역사인식을 일본이 가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무라야마의 개인적 신조와 성격 또한 이러한 결단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직접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세대로서, 평화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체득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총리가 되기 전부터 사회당 내 절대평화주의자로 통하던 무라야마는, 전쟁 책임을 부정하거나 애매하게 둘 경우 다시 군국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 사회당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비무장 중립” 노선은 집권하면서 현실적으로 수정되었지만, 전쟁 반성과 화해라는 대의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보았다. 1995년 담화 준비 과정에서 그는 “잘못은 잘못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신을 주변에 피력하며 직접 문안 조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무라야마의 겸허하고도 강직한 태도는 담화의 진정성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무라야마 담화를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사죄”라고 높이 평가하며, 영국의 전쟁 포로들까지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를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무라야마 한 사람의 용기가 일본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이다. 또한 무라야마는 담화 발표와 동시에 아시아 여성기금(Asian Women’s Fund) 설립을 제안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국민적 속죄” 사업을 시작했다. 정부 예산이 아닌 국민 모금 형식으로 위로금과 지원사업을 추진한 이 기금은 한계도 있었지만, 전후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공식 나선 첫 사례였다. 비록 한국 등 피해국의 피해자 다수가 “진정한 공식 배상”이 아니라며 아시아여성기금을 거부하는 등 반발이 있었지만, 무라야마의 이 같은 노력은 과거사 문제에 실질적으로 응답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피해자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96년 1월 돌연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1995년 연말까지 각종 현안을 마무리한 그는 “50주년이라는 중대 고비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며 새해 벽두 퇴진 결심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신년 하늘을 바라보며 결심했다”는 소회를 남겼는데, 이는 자신의 임무가 일정 부분 끝났음을 자각한 지도자의 담담한 퇴장으로 받아들여졌다. 1996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무라야마는 2000년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고향 오이타에서 소박한 노년을 보냈다. 공식 경호도 받지 않은 채 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전직 총리의 모습을 일본 국민들은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누비는 백발의 전 총리에게서,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도 무라야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후배 정치인들이 과거사 문제에서 퇴행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보수 강경파들이 “이제 전후 체제에서 탈피하자”며 헌법 개정과 역사교과서 수정 등을 추진하자, 무라야마는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아베 신조 정권 시기(2012~2020) 일본 정부가 과거사에 대한 표현 수위를 낮추고 헌법 9조 개정을 시도하자, 무라야마는 “전후 일본의 평화와 도덕적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라며 강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는 아베 전 총리가 전후 70주년 담화(2015년)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 언급을 애매하게 처리하려 하자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2020년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 25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무라야마는 다시 한 번 “일본의 침략 전쟁은 명백한 잘못이었다”면서 “이를 부정하거나 미화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 어디서도 용납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또한 그는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구축을 위해 과거 중국에 끼친 막대한 피해를 잊어선 안 되며,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라야마의 이러한 일관된 소신은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도 역사의 경계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무라야마는 국내 정치 현안과 사회 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2011년) 이후 그는 “과거 원자력 발전을 용인한 것은 잘못이었다. 사과드린다”고 공개적으로 사죄하면서, 자신의 재임 시절 핵발전 정책을 되돌아보았다. 나아가 호소카와 모리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등 초당파 원로 정치인들과 함께 탈원전 운동에 동참해 후쿠시마 사고 10주년에 “원자력 없는 세계”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신념의 폭넓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0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과거사 문제와 평화 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일본 국내외 언론들은 무라야마를 언급할 때마다 무엇보다 그의 1995년 담화를 집중 조명하며, "역사에 남을 사죄를 한 총리"로 평가한다. 실제로 무라야마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2005년 60주년), 간 나오토 총리(2010년 한일병합 100년) 등이 공식 담화나 연설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 약 20년 간 역대 총리들이 크고 작은 형태로 이 담화 정신을 존중해왔다는 점에서, 무라야마 담화는 하나의 외교적 기준점으로 기능해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아베 신조 총리가 2010년대 들어 과거사 언급을 최소화하며 이 흐름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지만, 무라야마 담화가 내포한 도덕적 힘은 여전히 일본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일본의 한 원로 칼럼니스트는 “무라야마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일본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전후 한때 세계로부터 고립될 위기에 처했던 일본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있어, 진심 어린 사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입증한 지도자가 바로 무라야마였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의 생애와 정치 경로는 일본 현대사가 지닌 명예와 책임의 두 얼굴을 고스란히 비춘다. 그는 평범한 어부의 아들에서 시작해 사회운동가, 야당 정치인을 거쳐 예기치 않게 총리에 올랐다. 집권 기간은 1년 남짓으로 짧았지만, 그 임무의 무게는 어느 누구보다도 컸다. 국내적 어려움과 정치적 제약 속에서도 무라야마는 국가 지도자의 양심에 따라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함으로써, 일본이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1995년 담화는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고 피해 이웃들에게 용서를 빈 용기 있는 행동으로, 지금까지도 아시아의 피해 국가들 사이에 잔잔한 존경을 받고 있다. 물론 그의 결단이 일본 내 모든 갈등을 해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라야마가 열어놓은 화해의 문은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계승되며, 동아시아 역사 문제 해결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우리에게 한 국가의 지도자가 어떻게 역사와 마주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상징적 인물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나 울림을 주는 메시지로 남아 있다. “잘못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다.” 생전에 무라야마가 자주 강조했던 이 신념은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교훈이 될 것이다.

일본 사회당 출신 총리 재임기간
출처: 일본 내각부
이 기사는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맥락과 통계를 추가해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