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6000, 자사주라는 잠긴 금고의 빗장이 풀리다
오늘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6022.70'이 찍히자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코스피 지수가 개장과 동시에 사상 처음 6000선을 넘어선 순간이다. 지난 1월 22일 5000 고지를 밟은 지 불과 34일 만에 앞자리가 바뀌었다. 삼성전자 20만 원, SK하이닉스 100만 원, 현대차 8% 급등.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시가총액 합계는 장중 처음으로 5000조 원을 돌파했다. 한국 증시가 수십 년간 눌려 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무게를 털어내고 있다는 평가가 곳곳에서 나온다.
같은 시각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을 둘러싼 필리버스터가 밤을 새워 이어지고 있었다. 전날 오후 법안이 상정되자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이 첫 반대 토론에 나섰고, 여야 의원들이 교대로 단상에 올랐다. 민주당은 전날 오후 3시 57분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를 제출했다. 국회법에 따라 24시간이 지나면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찬성으로 토론을 끝낼 수 있다. 오늘 오후 4시께 표결이 이뤄질 전망이다.
증시의 환호와 국회의 공방이 같은 날 겹친 이 풍경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해 7월 통과한 1차 상법 개정안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총주주'로 넓힌 이래, 한국 증시는 구조적 재평가 국면에 진입했다. 같은 해 8월 통과한 2차 개정안은 전자주주총회를 도입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강화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월 코스피 5000 돌파 직후 "상법 개정이 재벌의 공고한 의결권을 억제하는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했다. 코스피는 2025년 G20 국가 수익률 1위를 기록했고, 10년 넘게 1배 아래에 머물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마침내 1배를 넘었다. 외국인 상장주식 보유액은 지난해 말 기준 1326조 8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96.9% 급증했고, 시가총액 내 비중도 27.0%에서 30.8%로 확대됐다. JP모간과 CLSA, 노무라 등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잇따라 한국 증시 목표치를 상향하며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흐름의 마지막 퍼즐이 오늘 오후 표결에 부쳐지는 3차 상법 개정안이다. 핵심은 단순하다. 회사가 자기주식을 사들이면 1년 안에 소각하라는 것이다. 임직원 보상이나 우리사주 제도처럼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는 이사 전원이 서명한 보유처분계획을 매년 주주총회에서 승인받아야 한다. 이미 쌓아둔 자사주에도 시행일로부터 1년 6개월 안에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이 법안이 왜 증시 재평가의 핵심 고리인지를 이해하려면, 한국에서 자사주가 어떻게 쓰여 왔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그러나 기업이 이를 우호 세력이나 계열사에 넘기는 순간, 경영권을 지키는 방패로 변한다. 한국일보가 2025년 6월 보도한 바에 따르면, 50대 그룹 핵심 계열사의 97%가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소각률은 10%에 불과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자사주를 매입한 880개사 가운데 소각을 한 차례라도 진행한 곳은 315곳, 35.8%에 그쳤다. 2003년 영국 헤지펀드 소버린이 SK를 공격했을 때, SK는 보유 자사주 10.41% 가운데 약 4.6%를 하나은행·신한은행 등에 넘겨 경영권을 지켰다. 고려아연은 2024~2025년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자사주 비중을 0%에서 12.3%까지 끌어올렸다. 국민일보는 오늘자 보도에서 "자사주로 경영권을 방어하는 건 한국 기업이나 쓰는 방법"이라는 전문가 평가를 전했다.
소액주주 입장에서 보면, 회사가 자기 돈으로 사들인 주식이 경영진의 금고 안에 잠긴 채 돌아오지 않는 구조다. 유통 주식 수는 줄지 않고, 주당순이익(EPS)은 희석되며, 언제든 제3자에게 넘겨질 수 있는 잠재적 물량이 시장 위에 매달려 있다. 키움자산운용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PBR은 1.04배로 신흥국 평균(1.58배)에도 못 미쳤고, 미국(3.64배)과는 세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삼일PwC 분석에서 한국 기업의 10년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8.0%로 미국(14.9%), 영국(9.6%), 중국(9.3%)보다 낮았다. 자본시장연구원은 한국 상장기업의 주가수익비율(PER)이 의료와 부동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업종에서 해외 비교집단보다 낮다고 분석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잠긴 금고, 풀리지 않는 자사주의 구조에 있었다.
3차 상법 개정안은 그 금고의 빗장을 법으로 풀겠다는 선언이다. 자사주가 소각되면 발행 주식 총수가 줄어들고,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가 올라간다. 시장은 이미 이 기대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뉴스1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코스피에 상법 발(發)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고 보도했고, 민주당 K자본시장 특별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오늘 "3차 상법 개정 다음은 소액주주 권한 강화"라고 예고했다.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의원은 지난해 말 인터뷰에서 "주주의 돈으로 장난치지 말자는 것, 그게 개정안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다만 재계의 우려를 단순히 기득권 방어로만 볼 수는 없다. 자사주라는 방패를 거둬들이면서, 그 자리를 채울 경영권 방어 장치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지난 1월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과 차등의결권 제도를 담은 '적대적 M&A 방지 3법'을 발의했다. 미국·일본·유럽에서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제도다. 이투데이 분석에 따르면, 자사주를 전량 소각할 경우 대주주 지배력이 5% 미만으로 떨어지는 기업이 20개사에 이르고, 서울경제는 중소·벤처기업까지 예외 없이 적용되는 점을 우려로 꼽았다. 매일경제가 전한 2월 13일 국회 공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측이 "편법적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국민의힘 측은 "경영권을 지키는 마지막 안전띠를 끊는 것"이라며 맞섰다.
증시의 구조적 재평가가 지속되려면, 법 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랭클린템플턴은 오늘자 보고서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국면이 진행 중이지만, 기업 스스로 수익을 내고 자본 효율을 높이는 변화가 없으면 지속 불가능하다"고 짚었다. 경영권 방어 공백을 메우는 후속 입법도 과제다.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필 같은 제도적 안전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기업 생태계를 흔드는 충격이 아니라, 자본시장의 체질을 바꾸는 전환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오늘 오후 4시, 필리버스터가 종결되고 표결이 이뤄지면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현실이 된다. 1차·2차 상법 개정이 주주의 권리를 법에 새겼다면, 3차 개정은 기업이 쌓아둔 자사주의 빗장을 풀어 그 권리를 실체화하는 단계다. 코스피 6000은 한국 자본시장이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있다는 증거다. 반도체 실적의 힘, 글로벌 AI 투자 사이클의 동력, 그리고 지배구조 개혁이라는 제도적 변화가 맞물려 만들어 낸 결과다. 금고의 빗장은 풀렸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빗장이 풀린 뒤, 그 안의 가치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