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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가 약한 걸까, 달러가 특별한 걸까

원/달러 1,500원 재돌파와 배리 아이켄그린 『Exorbitant Privilege』가 묻는 기축통화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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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2026년 5월 15일, 원/달러 환율이 다시 1,500원을 넘었습니다. 3월 말엔 1,530원까지 올라 2009년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았죠. 환율이 뛸 때마다 '원화가 약하다'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배리 아이켄그린의 Exorbitant Privilege를 읽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문제는 원화가 아니라, 달러가 누리는 '과도한 특권'일지도 모르거든요.

2026년 5월 15일, 원/달러 환율이 다시 1,500원을 넘어섰습니다. 앞서 3월 말에는 장중 1,530원대를 기록했는데,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3월 이후 17년 만의 최고치였습니다. 숫자가 오를 때마다 화면에는 비슷한 진단이 흐릅니다. 원화가 약하다, 한국 경제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말입니다.

환율은 한 나라의 통화가 다른 나라 통화와 교환되는 비율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모든 환율을 달러를 기준으로 읽습니다. 원도 엔도 유로도 달러 대비로 표시됩니다. 세계의 무역과 금융, 외환보유액과 원자재 가격이 달러를 축으로 돌아갑니다. 환율이 흔들릴 때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절반은, 사실 달러라는 기준점 자체에서 옵니다.

배리 아이켄그린의 Exorbitant Privilege(과도한 특권)는 바로 그 기준점을 들여다봅니다. 제목의 과도한 특권은 1960년대 프랑스가 미국을 두고 한 말에서 왔습니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 세계의 상품과 자산을 사들이고, 다른 나라는 그 달러를 벌기 위해 수출하고 외화를 쌓습니다.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게임은 처음부터 규칙이 다릅니다.

달러가 어쩌다 이런 자리에 올랐을까요. 2차 대전 직후 브레턴우즈 체제는 달러를 금에 묶어 세계의 기준 통화로 세웠습니다. 1971년 미국이 금 태환을 끊은 뒤에도 달러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죠. 금이라는 닻을 풀고도 여전히 기준으로 남은 통화 — 아이켄그린은 그 끈질긴 관성을 들여다봅니다. 한번 기준이 된 통화는, 그 자체로 바꾸기 어려운 습관이 되니까요.

이 렌즈를 끼면 5월의 환율 급등이 다르게 읽힙니다. 원화 약세에는 국내 요인도 있지만, 미국 금리와 달러 강세, 지정학 불안이라는 바깥의 힘이 함께 작동합니다. 올해 원화 약세의 배경에도 중동발 지정학 위험과 안전자산으로서의 달러 수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환율은 한국만의 성적표가 아닙니다. 달러를 중심으로 짜인 판에서 한국이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죠.

아이켄그린은 이 특권이 영원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달러의 지위가 미국 경제의 규모만이 아니라 깊고 안전한 금융시장과 오랜 신뢰, 그리고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에 기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유로나 위안화가 부분적으로 도전하지만, 어느 것도 달러를 단숨에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세계는 불안할 때마다 다시 달러로 몰립니다. 위기가 미국에서 시작돼도 돈은 오히려 달러로 몰리죠. 묘한 역설입니다.

'과도한 특권'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세계가 달러를 안전자산으로 사 모으니, 미국은 남보다 싼 이자로 돈을 빌립니다. 적자를 내도 그 적자를 메울 달러를 스스로 찍을 수 있죠. 다른 나라라면 외화가 빠져나가 위기를 맞을 텐데, 미국은 그런 걱정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셈입니다. 같은 적자라도 누가 지느냐에 따라 무게가 전혀 달라지는 겁니다.

한국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고 자본시장이 열린 나라에 이 구조는 양날의 칼입니다. 평소에는 달러를 벌어 성장하지만, 세계가 출렁일 때는 가장 먼저 자본이 빠져나가는 통로가 됩니다.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풀고 금리를 조정해도, 기준점 자체가 흔들리는 한 개별 국가의 노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책의 표현을 빌리면, 특권은 미국의 몫이고 비용은 세계가 나눠 집니다.

한국이 환율에 유독 예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997년과 2008년,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경제가 휘청였던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은 외환보유액을 두둑이 쌓고 주요국과 통화스와프도 맺어 둡니다. 그러나 아이켄그린의 책을 덮고 나면, 그 모든 대비조차 결국 '내 통화가 기준이 아니다'라는 한 가지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방패를 아무리 키워도, 운동장의 기울기 자체를 내가 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환율을 운명으로만 받아들이자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켄그린은 통화의 지위가 정책과 제도, 신뢰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한국에게 그것은 외환 건전성, 수출의 질, 금융시장의 깊이를 꾸준히 다지는 일입니다. 환율 숫자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충격이 왔을 때 견디는 체력을 기르는 쪽이 더 본질적입니다.

물론 이 글은 환율의 방향을 점치지 않습니다. 1,500원이 새로운 표준인지 일시적 고점인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환율을 읽을 때 원화가 약하다는 문장 하나로 끝내지 말자고 제안할 뿐입니다. 그 문장 뒤에는 달러 중심 체제라는 더 큰 구조가 놓여 있습니다.

5월 셋째 주에 Exorbitant Privilege를 펼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환율은 매일의 뉴스지만, 그 숫자가 놓인 운동장은 70년 넘게 이어진 달러의 특권 위에 있습니다. 원화의 자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달러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를 봐야 합니다. 환율 앞에서 필요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구조를 보는 눈입니다.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환율은 원화만의 성적표가 아닙니다

5월 1,500원 재돌파에는 미국 금리·달러 강세·지정학 불안이라는 바깥의 힘이 함께 작동합니다.

2
과도한 특권은 게임의 규칙입니다

기축통화국 미국은 달러를 찍어 세계 자산을 사고, 다른 나라는 그 달러를 벌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운동장이 기울어 있습니다.

3
방어보다 체력입니다

기준점이 흔들리는 한 개별 국가의 환율 방어는 한계가 있습니다. 외환 건전성과 시장의 깊이를 다지는 일이 더 본질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