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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건 다리이기 전에, 미뤄둔 시간이었다

서소문고가도로 붕괴와 울리히 벡 『Risk Society(위험사회)』가 묻는 예고된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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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2026년 5월 26일, 서울 서소문고가도로 철거 현장에서 상판이 무너져 3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습니다. 1966년에 지은 이 다리는 2019년 안전진단에서 이미 최하위권인 D등급을 받았죠. 갑작스러운 사고였을까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펼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위험은 갑자기 닥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쌓아 두고 미뤄 둔 자리에서 터지거든요.

다리가 무너지는 일에는 보통 '갑자기'라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을까요? 2026년 5월 26일 오후 2시 31분, 서울 서소문고가도로 철거 현장에서 상판과 거더, 비계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3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죠. 충정로역 방향 가장 바깥쪽 구조물이 엿가락처럼 주저앉았습니다.

무너진 고가도로의 나이는 예순입니다. 1966년에 지어졌거든요. 그리고 2019년 정밀안전진단에서 이미 시설물 안전등급 D등급을 받았습니다. D등급은 주요 부재에 결함이 있어 긴급한 보수·보강이 필요하거나 사용 제한 여부를 따져야 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구조물의 위험은 7년 전부터 숫자로 적혀 있었던 셈입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Risk Society(위험사회)는 이런 사고를 읽는 오래된 지도입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직후 출간된 이 책에서 벡은 현대 사회의 위험이 자연재해처럼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산업과 기술, 개발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제조된 위험'이라는 거죠. 풍요를 좇는 사회는 그 풍요와 함께 위험도 생산합니다.

벡이 말한 위험사회의 핵심은 위험이 이제 계급을 넘어 번진다는 데 있습니다. 가난할수록 더 나쁜 위험을 떠안는 건 여전하지만, 미세먼지나 무너지는 구조물 앞에서는 부자도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죠. 그렇다고 위험이 모두에게 똑같이 나뉘는 건 아닙니다. 같은 고가 아래라도, 누가 더 자주 그 길을 지나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위험은 번지되, 고르게 번지지는 않습니다.

서소문고가도로는 그 명제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1966년의 고가도로는 산업화 시대의 속도와 효율이 만든 구조물이었습니다. 그 구조물이 늙어가는 동안 위험도 함께 쌓였고, 2019년의 D등급은 그 위험을 이미 측정해 둔 기록이었죠. 벡의 말을 빌리면, 위험은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저 여기저기로 나뉘고, 자꾸 뒤로 미뤄질 뿐이죠.

이건 서소문고가도로 하나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1960~70년대 고도성장기에 서둘러 세운 다리와 고가, 지하구조물이 지금 한꺼번에 노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때의 속도가 시간이 지나 위험으로 돌아오는 셈이죠. 빨리 짓는 일은 박수를 받았지만, 오래 돌보는 일은 늘 뒷순위로 밀립니다. 노후 시설의 등급표가 두꺼워질수록, 손볼 곳과 손볼 돈 사이의 간격도 함께 벌어집니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위험이 누구에게 도착했는가입니다. 부상자 가운데 한 명은 철거 공사와 무관한 구청 직원이었습니다. 거리 점검을 위해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다, 무너진 구조물에 차량이 깔린 겁니다. 위험사회의 위험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깔끔하게 나누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를 지나간 사람에게 도착할 뿐이죠.

벡은 또 하나를 짚습니다. 위험이 커질수록 사회는 '누가 책임지는가'를 두고 길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노후 구조물의 위험은 설계와 시공, 관리 주체, 예산을 미룬 결정 사이에 흩어져 있습니다. 등급은 매겨졌지만, 그 등급을 행동으로 옮기는 책임은 늘 다음으로 넘어가죠. D등급이라는 경고가 오래 경고로만 남아 있던 이유입니다.

벡은 이런 상태를 '조직화된 무책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사고가 나도 누구 하나 혼자 책임지지 않도록, 책임이 제도와 절차 사이로 잘게 쪼개진다는 겁니다. 설계는 규정대로였고, 점검은 기준을 지켰고, 예산은 순서가 있었다 — 저마다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정작 무너진 자리 앞에는 책임질 사람이 비어 있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관여했지만 아무도 전부를 떠안지 않는 구조, 벡은 그것을 현대 위험의 진짜 얼굴로 봤습니다.

물론 이 사고의 정확한 원인과 책임은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 글은 특정 주체를 단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위험은 진단서 안에 이미 있었고, 무너진 것은 다리이기 전에 그 진단을 행동으로 바꾸지 못한 시간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위험사회』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사고를 어떻게 막느냐'를 넘어섭니다. 위험을 뻔히 알고도 자꾸 미루게 만드는 구조를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 등급을 매기는 일과, 그 등급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일 사이의 거리를 누가 좁힐 것인가. 벡은 답을 건네는 대신, 그 거리를 똑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5월 다섯째 주에 『위험사회』를 펼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사고가 난 뒤에야 위험을 발견한다고 믿지만, 벡의 책은 반대로 말합니다. 위험은 대개 이미 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저 여기저기 흩어진 채, 자꾸 뒤로 밀릴 뿐이죠. 예순 살 다리의 D등급처럼, 다음 위험도 아마 어딘가에 이미 숫자로 적혀 있을 겁니다. 그것을 경고로만 둘지, 행동으로 옮길지가 우리에게 남은 질문입니다.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위험은 '갑자기'가 아니라 예고됩니다

1966년 건설, 2019년 D등급. 붕괴의 위험은 7년 전부터 숫자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2
위험사회의 위험은 무차별적입니다

부상자 한 명은 공사와 무관하게 고가 아래를 지나던 사람이었습니다. 위험은 그 자리를 지난 이에게 도착합니다.

3
경고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관건입니다

등급은 매겨졌지만 책임은 늘 다음으로 미뤄집니다. 무너진 건 진단을 행동으로 바꾸지 못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