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키트 하나가 국경을 넘는다. 같은 진단키트가 국경에서 멈춰 선다. HLB파나진이 유럽 체외진단의료기기 규정(IVDR) 인증을 서두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2024년 4월부터 EU가 중국산 의료기기를 공공입찰에서 사실상 배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2억원에서 131...
HLB파나진의 품질관리팀장은 마지막 인증서류를 검토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유럽체외진단의료기기규정(IVDR) 인증. 이 복잡한 알파벳 조합이 회사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밀려온다. 중국 경쟁사들은 이미 게임에서 밀려...
퇴근길 지하철. 한 중년 여성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관광 바우처 신청 페이지가 자꾸 오류를 일으킨다. 옆자리 청년은 능숙하게 화면을 넘기며 무언가를 주문한다. 같은 공간, 다른 속도. 디지털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간극이다. 이번 주, 한국관광...
빅터 파파넥은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에서 이렇게 썼다. 산업디자이너란 해로운 직업이며, 광고업자 다음으로 사기꾼에 가깝다고. 1970년대 그가 본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는 디자인의 폭력성이었다. 쓸모없는 물건들이 필수품으로 둔갑하고, 멀쩡한 제품이...
당신이 매일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 중 몇 명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여성가족부가 한부모가족을 위한 복지서비스 안내서를 발간했다는 소식은 그저 정책 브리핑의 한 줄로 지나갔다. 필요한 서비스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이 전부였다. 안내서가...
당신의 하루는 몇 개의 역할로 쪼개져 있는가. 직장인, 부모, 자녀, 배우자. 이 중 하나라도 비어 있다면 그 빈자리는 누가 채우는가. 여성가족부가 한부모가족을 위한 복지서비스 안내서를 발간했다. 필요한 서비스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안내서의 존재 자...
광양시가 새로운 벤처생태계 육성사업을 시작했다. 지방투자촉진보조금부터 뿌리산업 선도기업 육성까지, 산업과 주거와 문화가 결합한 복합공간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지방 도시들이 비슷한 청사진을 그렸다. 2003년 노무현...
공릉역 인근 한 카페 주인은 오늘도 텅 빈 테이블을 닦는다. 5년 전 역세권 개발 소식에 기대를 품고 문을 열었지만, 멈춰선 공사 현장만 창밖에 보일 뿐이다. 그는 이제 폐업을 고민한다. 약속된 미래가 무한정 연기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제3종일반주거지...
2030년 어느 날, 우리는 2025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의료 디지털화가 완성된 원년? 아니면 공공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길을 잃은 시작점? 레몬헬스케어가 상급병원 80%에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미래의 누군가는 이 순간을 분기점으로 볼지도 모른다. 병원이...
마르타 누스바움은 『역량의 창조』에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일 때, 그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 갓 태어난 아이, 병든 노인, 장애를 가진 이들. 이들을 돌보는 일은 오랫동안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다. 누스바움...
아침 7시, 한 남자가 작업복을 입는다. 허리춤에 공구를 차고, 안전모를 쓴다. 아내가 건넨 도시락을 받아들며 문을 나선다. 평범한 출근길. 그가 향하는 곳은 직원 5명이 일하는 작은 공장이다. 이런 사업장이 우리나라에만 수십만 개가 있다. 정부가 소규모 사업장의 산업...
서울 구로구의 한 전자부품 공장. 새벽 5시 30분, 형광등이 켜지면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환풍기 소리와 기계음이 뒤섞인 공간에서 하루 10시간씩 같은 자세로 부품을 조립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씨는 입사 3년차, 최근 들어 손목 통증...
인공지능 기본법이 일주일 뒤면 시행된다. 2025년 1월 21일, 법은 고영향 AI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낸다. 한편에선 규제의 틀을 짜느라 분주하고, 다른 한편에선 이미 AI가 누군가의 대출 심사를 거절하고 있다. 캐시 오닐의 『대량살상 수학무기』를 펴든 건 우연이...
2025년 1월 16일, 건설안전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중대재해 발생 시 원도급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발주처와 원청, 하청으로 이어지는 책임의 사슬. 그 끝에는 언제나 노동자가 있다. 건설 현장의 죽음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매년 400명이 넘는 건...
당신이 오늘 아침 먹은 쌀은 누군가의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식물 신품종보호 출원이 1만 4천 건을 넘어섰다. 기후변화 대응 품종부터 바이오 소재까지, 식물이 특허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깊어지고 있다. 1998년 12월 31일, 한국...
한 엔지니어가 데이터센터의 서버 사이를 걷는다. 24도로 유지되는 공간, 끊임없이 돌아가는 냉각 팬 소리, 깜빡이는 수천 개의 LED 불빛. 그는 서버 한 대를 점검하며 잠시 멈춘다. 이 기계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이 가정집 하나와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2030년쯤 어느 경영학 교실에서 학생들은 2025년 1월의 교원구몬 사례를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생률 감소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교육기업이 택한 해법. 롯데마트 출신 CEO 영입. 그때 학생들은 무엇을 읽어낼까. 위기 앞에서 한국 기업들이 반복해온 그 익숙...
서울 중구 을지로 교원구몬 본사 건물. 겨울 아침 햇살이 유리창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1층 로비를 지나는 직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엘리베이터 안, 누군가가 조용히 말한다. 새 대표가 온단다. 롯데에서. 1985년 창업 이래 교육 사업 한 길을 걸어온 이 회사가 외...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안 된다고 말한다. 매년 12월이면 되풀이되는 진부한 공방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논쟁하고 있는 것일까.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노동이 상품이 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19세기 영국. 시장이 모든 것을...
『니클드 앤 다임드』에서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플로리다의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시급 2.43달러로 일한다. 팁을 합쳐도 한 달 벌이로는 트레일러 한 칸도 빌릴 수 없었다. 그녀는 이중직을 뛰어도 모텔에서 모텔로 떠돌았다. 2001년의 미국 이야기다. 2024년 말, 한국에...